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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7화 (7/120)

7화

“네 말이 맞았어. 남부 항구 쪽에서 금주 밀반입이 이뤄지고 있더군.”

여왕이 엄격하게 금지한 이후, 에셀우드에서 술이란 허용받은 와인류 말고는 들여올 수 없었다. 걸리게 된다면 재산 몰수는 물론이고 처형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중죄였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밀반입을 시도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막대한 돈.

“어떻게 할 거야? 은밀히 알아보라 한 걸 보면 비밀경찰 노릇을 하고 싶은 건 아닐 테고.”

조금 전과는 딴사람처럼 진지하게 돌변한 펠릭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대답 대신 조소한 킬리언이 품 안의 궐련을 하나 물었다.

“내가 가져야지. 전부.”

펠릭스의 눈이 흔들렸다. 여왕의 측근이면서 뒤통수를 친다는 말이었다.

“너무 위험하지 않아?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넌 이미 가진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테이블 위에서 성냥을 든 펠릭스가 그의 궐련 끝에 불을 붙였다. 길게 연기를 내뿜은 킬리언이 등받이에 편하게 등을 기댔다.

“돈은 아무래도 좋아.”

“그럼…….”

“힘이 필요해. 누구도 날 좌지우지하지 못할 정도의 힘.”

음지에서 세력을 키우겠다는 이야기. 예상치도 못한 소리에 펠릭스가 입을 떡 벌렸다.

“여왕과 필적한.”

덤덤하게 선언한 킬리언이 피곤한 뒷목을 젖혔다. 높은 천장에 그려진 열두 명의 성인. 추악한 곳과는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그보다 또 한 건 있지 않나.”

“아. 그거.”

눈을 반짝인 펠릭스가 두 손을 맞대 문질렀다.

“내가 이번에 참 놀랐는데. 이걸 말해도 될지 모르겠네.”

능청스러운 대답에 외투를 챙겨 일어나던 킬리언이 그를 내려다봤다.

“말하기 전에 뭐 때문인지 물어봐도 돼?”

“아니.”

“차갑기는.”

바로 나온 단답에 펠릭스가 밉지 않게 킬리언을 흘겨봤다.

“웬 소년을 오붓한 식당에서 만나더라고.”

“…소년?”

뜻밖의 말에 킬리언이 미간을 좁혔다. 고개를 끄덕인 펠릭스가 말을 이어 나갔다.

“응. 그 식당 오너가 지인이라 아는데, 연인들이 가는 곳이래. 엄청 빼입었다던데. 나도 사환 편으로 연락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하.”

실소한 킬리언이 몸을 돌렸다. 넓고 단단한 등에서 뼈가 시릴 것 같은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뒷모습을 바라보던 펠릭스가 질문은 쏟아 냈다.

“동성애자인가? 그런데 그런 남자를 왜 뒷조사 하라고 했던 거야? 지금 하려는 일과 관련이… 야!”

대화는 끝이었다. 무시하고 문을 연 킬리언이 어둑한 공간을 나왔다. 문밖에서 대기하던 비서 제녹이 말을 걸었다.

“오늘의 일정은 이제 끝입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미스 필로네가 있는 타운 하우스로.”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제녹이 마부석과 연결된 유리를 두들겼다. 이윽고 말들이 출발하는 소리를 들으며 킬리언은 눈을 감았다.

“거트루드에게 사람을 한 명 붙여요.”

“미행을 붙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기왕이면 인기척 없고 조용한 사람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하라는 말이었다. 킬리언은 밀려오는 피곤함에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로위나의 밀회 상대로 남색가를 갖다 붙이다니. 턱도 없는 거짓일 거라 생각은 했지만 실상은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처음엔 미스 필로네를 들이라 은근히 권유하던 거트루드가 이제 와 이렇게까지 그녀를 음해한 이유가 궁금했다. 뒤에 누가 있는 건지 아니면 독단적인 행동인지.

“알겠습니다.”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제녹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다시 입을 열었다.

“맞다. 오늘 대부인이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지금쯤 와 계시겠네요.”

* * *

“킬리언! 내 조카님!”

화사하게 웃음 지은 에식스 후작 부인이 그에게 가벼운 포옹을 했다.

얼음처럼 서 있던 킬리언이 그녀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죄인처럼 푹 고개를 숙인 여자에게로.

“미스 필로네.”

“…….”

“로위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덜덜 떨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든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비스크 인형처럼 매끈했던 뺨에 붉은 자국이 나 있었다.

“뺨을 맞았습니까?”

하얗게 사색이 된 후작 부인이 뭐라 변명하려 했다. 그런 그녀를 지나친 킬리언이 뒷걸음질 치는 여자의 손목을 가로챘다.

눈앞이 새빨개지고 심장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 여자는 그의 것이었다. 다른 이가 감히 손대는 안되는. 사냥감의 피를 뒤집어쓴 맹수 같은 얼굴로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뺨을, 맞았습니까?”

로잘린 에식스.

에식스 후작 부인은 그야말로 귀부인의 귀감이라 불리는 여자였다.

그 일례로,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서 정석으로 숙녀 교육을 받은 고귀한 소녀. 사교계에 데뷔한 첫해 여왕에게 인정받은 아가씨. 아버지의 명에 따라 지체 높은 집안에 시집간 귀부인. 수십 년 후 남편이 죽은 뒤로는 검은 상복만 입는 정숙한 과부. 불행이라고는 남편이 자식을 갖지 못하는 몸이었다는 것 외에는 없는 여인.

데본셔 공작가가 그런 그녀를 웃어른으로 받아들인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데본셔 공작 부인 대리.

드높은 명예와 막대한 권한. 그리고 그에 따르는 거금의 연금.

그녀는 너무나 당연하게 데본셔 공작가에 자리 잡았다. 모두가 그녀를 존경했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조카이자 공작인 킬리안 데본셔마저도 그녀를 존중했다.

그랬기에 로잘린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 아버지의 장례식 때마저도 반듯한 자세와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던 킬리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사납게 분노하고 있었다. 넓고 새카만 등 뒤에서 흘러드는 살기가 숨통을 조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드디어 저 오물에게서 관심을 끊었나 싶었던 것뿐인데. 공작가에 끼얹어진 오물 하나를 치우려 한 것뿐인데.

“킬리언…….”

“로위나.”

그녀의 초조한 애원은 가차 없이 묵살됐다. 목 안쪽에서부터 긁어내리듯 스산한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거듭 불렀다.

“로위나.”

“…….”

“네 주인이 묻지 않나.”

“…공작님.”

로위나가 가만히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떨리는 대답이 뭉텅이처럼 잘려 나왔다.

“멍청하게도 제가… 후작 부인께… 무례를 저질렀어요.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예요.”

“…….”

“그래서…….”

부어오른 왼쪽 뺨을 한 손으로 숨긴 로위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격앙된 숨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저를 잡아먹을 듯 흉흉한 눈빛에 온몸이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아. 그래?”

입매를 뒤튼 킬리언이 그제야 뒤를 돌았다. 뱀 앞에 선 쥐처럼 바짝 굳어 있는 로잘린에게 강퍅한 시선을 던졌다.

“말해 보세요. 대부인.”

“키, 킬리언…….”

“멍청하고 비천한 내 정부가 고귀하신 내 이모님께 무슨 무례를 저질렀죠?”

등 뒤의 여자를 한없이 깎아내리면서도 극점에 치달은 분노의 방향은 명확했다.

그런 반면 표정은 평소와 다를 게 없어 기괴했다.

아니. 아니다. 마주한 눈은 어두웠다.

뒷덜미가 싸늘했다. 로잘린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말을 자칫 잘못하면 사달이 나리라는 예감이 강렬하게 머리를 스쳤다.

“저하.”

생전 처음 보는 피붙이의 모습에 에식스 후작 부인이 산송장이 되어 갈 즈음, 분위기를 읽고 다가온 거트루드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오해?”

“내 정부가 무례를 저질렀다 하여 들으려는 것뿐인데, 무슨 오해 말입니까.”

입매를 뒤튼 킬리언이 성마른 손길로 코트를 벗었다. 손등 위로 뼈가 희게 불거졌다. 벗은 코트를 내던지듯 거트루드에게 건넨 킬리언이 조언을 구하듯 느릿하게 물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부인?”

“그게…….”

찍어 내리는 공포에 온몸의 근육과 힘줄이 바르르 경련했다. 송곳니를 드러낸 맹수 앞에 맨몸으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로잘린이 구명줄을 찾듯 거트루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간절한 눈빛에 거트루드가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그리고는 땅에 머리를 박을 듯 등을 굽혔다.

“미, 미스 필로네가 대부인의 외투에 차를 쏟았습니다. 계단에서 내려오다가 실수로요. 대부인께서도 많이 놀라셔서 그만…….”

“미스 필로네의 잘못이다. 이 말이군.

급하게 지어낸 것치곤 조리 있는 말에 킬리언이 눈썹을 좁혔다. 작은 희망을 찾아낸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맞아…! 교육상 그랬던 거다. 비천한 게 내게 감히 차를 쏟아서.”

그가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자라 하나, 자신은 여왕과 종종 말벗을 할 만큼 인정받는 귀부인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웃어른이자 핏줄이기도 했다. 한낱 정부 때문에 틀어지는 건 그의 성격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트루드와 로잘린 모두 가쁘게 머리로 돌리고 있을 때 킬리언이 몸을 틀었다. 그가 정물인 듯 서 있는 그녀의 뺨을 들어 올렸다. 새빨간 눈가를 엄지로 훑고 부어오른 뺨을 쓸었다.

정말이냐고 묻는 듯 저를 내려다보는 눈에 로위나가 핏기 없는 입술을 열었다.

“맞, 맞습니다. 공작님. 거트루드 부인의 말씀이 옳아요…. 제가 손이 미끄러져서… 실수를 했어요. 그래서 맞은 거예요…….”

금방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듯 위태로운 공기에 로위나는 뭐라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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