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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6화 (6/120)

6화

원고를 위해 공원에 나오라고 통보한 것 치고 윌리엄은 마치 연인과 데이트를 하러 나온 남자처럼 꾸미고 나왔다.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잠깐 대화를 나눈 뒤, 그는 바로 그녀를 분위기 좋은 식당으로 안내했다. 소탈한 식당이었지만 연인들이 즐겨 찾는 곳인 듯 마주 앉은 남녀손님들이 로위나와 윌리엄을 계속 힐끗거렸다.

“이게 통상적인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랍니다.”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치고 나자 윌리엄이 출판사의 도장이 찍힌 계약서를 내밀었다. 잠시 어안이 벙벙한 로위나가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

“제 소설이 마음에 안 드시는 줄 알았는데요.”

“분위기와 문체는 마음에 든다고도 했었는데요. 그리고 오늘 제 말에 따라 이렇게 나오셨으니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걸로 보입니다.”

환하게 웃은 윌리엄이 등 뒤에 감춰 놓은 무언가를 꺼냈다. 장미 열 송이였다. 연이어서 놀란 로위나가 눈만 동그랗게 뜨자 재촉하듯 꽃을 든 손을 더 내밀었다.

“이건 계약 성립을 축하드리는 꽃입니다.”

“보통… 이렇게까지 하나요?”

안 그래도 다른 사람들 눈에 남자 두 명이 이런 식당에 오붓하게 앉아 있는 것도 이상해 보이는 판국에 꽃까지 받으니 영락없이 오해를 사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첫 계약이지 않습니까. 전 모든 첫 계약 작가님들에게 장미를 드린답니다. 일종의 의식인 거죠.”

“…….”

“제 손이 민망해지려 하네요. 하하.”

그렇게까지 말하니 일단 받는 수밖에 없었다.

만남은 그게 끝이었다.

계약서를 받았고, 혹시 몰라 챙겨 온 도장을 찍어 다시 건넸다. 추후 연락은 멜리사를 통해 주고받기로 했다.

계약이 성립됐으니 남은 건 원고였다. 거의 완고까지는 쓰긴 했지만 지적받은 부분을 고치고 마무리를 짓기 위해 로위나는 글에 매달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원고에 매달린 지 일주일째 되던 날까지 킬리언은 오지 않았다.

“일이 많으신가 봐요. 거트루드 님께서 그러시는데, 지금 수도에 없으시대요.”

“그러니.”

“예. 이상하네요. 원래는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실 때는 항상 아가씨께 미리 언질을 주시거나 아니면 사환 편으로 따로 연락을 주실 텐데.”

“많이 바쁘신가 보지.”

멜리사의 말에 씁쓸하게 웃은 로위나가 원고에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그가 있을 때면 숨을 쉬는 것도 눈치를 봤는데, 그가 없으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새벽에 깨어나는 일이 잦아졌다.

얕은 잠에서 깨어난 로위나가 목이 말라 부엌으로 내려가던 때였다. 문을 열려는데 안쪽에서 익숙한 이름이 그녀의 귀에 흘러들어 왔다.

“킬리언 나리 말이야.”

“응?”

“어제 연회는 바네사 백작의 차녀와 참석하셨다지?”

다른 여자. 문손잡이를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로위나가 멈칫한 사이 대화가 이어졌다.

“그랬지. 아주 화려하고 아름다운 연회였다던데.”

“연치가 이제 적지 않으시니 슬슬 성혼을 생각하시는 걸까?”

“그럴지도. 공작 부인 자리가 비워진 지 오래니까. 그간 웃어른이신 에식스 후작 부인께서 대리해서 컨트리 하우스 살림을 맡고 계시긴 했지만 이젠 연세도 많으시잖아.”

“그럼 미스 필로네는 어떻게 되는 걸까?”

“뭐… 적당한 돈을 주고 내보내겠지. 아무리 쉬쉬한다지만 대놓고 정부가 있는 남자한테 제 딸을 내놓을 사람은 없으니까. 하물며 귀족이라면 체면도 있는데.”

비수가 가슴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헉, 하는 신음과 함께 로위나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런데 여왕께서 조카의 아내로 겨우 백작가 여식을 받아들이실까? 그리고 그 왜, 있잖아.”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춘 하녀가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삼 년 전에 돌아가셨다던 약혼녀분… 그분을 못 잊고 계셔서 여태껏 독신을 유지했다던데.”

“나도 그 소문 들었어. 태중 약혼녀라니. 정확히는 모르지만 굉장한 미인이었다는데…….”

“첫사랑을 놓지 못하는 남자라니! 낭만적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심장을 엷게 베었다. 비틀거리며 로위나가 뒷걸음질 쳤다. 그때 인기척을 눈치챈 하녀 중 한 명이 뒤를 돌았다.

“거기 누구 있어요?”

숨을 들이마신 로위나가 급하게 주위를 휘 둘러봤다. 그러나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을 때 부엌 반대쪽의 문이 열렸다. 동시에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가 쉬고 있던 하녀들에게 일갈했다.

“일은 안 하고 여기서 뭐 하고 있지?”

“거, 거트루드 님!”

화들짝 놀란 하녀들이 벌떡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겁에 질린 하녀들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혀를 찬 거트루드가 열려 있는 반대편 문을 발견했다.

“뭘 떠들건 문밖까지 들리게 하지는 말아야지.”

다음 순간, 로위나가 서 있던 쪽의 문이 홱 열렸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또 걸리면 그날로 그만둘 줄 알아.”

차갑게 경고한 거트루드가 거칠게 문을 닫았다. 문 뒤에 서 있던 로위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킬리언의 결혼.

현실감 없는 단어였다. 로위나는 계속해서 그 말을 잊으려 애썼다.

그가 언제까지고 독신으로 살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더구나 이렇게 방치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나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말은 그다음이었다.

죽은 태중 약혼녀.

…근거 없는 헛소문이야.

애틋한 첫사랑의 흔적 따위 지난 삼 년간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하물며 정부가 된 이후, 웬만한 연회를 그와 동행했던 자신이었다.

로위나는 부스러기처럼 모아 두었던 다정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젖은 머리를 직접 수건으로 닦아 주던 손길, 초콜렛을 먹여 주던 눈빛, 첫눈이 내릴 때 제 외투를 벗어 주었던 따듯한 온기.

죽은 여자를 기린다면 자신에게 그럴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가 조금이라도 제게 마음이 있다고 믿었다.

역시 이대로는 안 돼.

언젠가 서로에게 빚진 것이 없는 관계가 되었을 때 그녀의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다. 잘못 꿴 단추를 풀어내고 처음부터 함께 꿰어 가고 싶었다.

그 첫걸음이 바로 책을 출간하는 일이었다.

동등한 눈높이로 그의 옆에 서기 위해서는 우선 그에게 진 빚을 전부 갚아야 하니까.

* * *

“다녀올게.”

“네! 응원할게요.”

환하게 웃은 멜리사가 로위나의 손을 잡았다.

“첫 작품 출간하시면 꼭 한 권은 저 주셔야 해요.”

“당연한 소릴. 두 권도 세 권도 줄게.”

너스레를 떠는 것도 잠깐이었다. 출판사 건물 앞에 서니 절로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심호흡한 로위나가 문을 두드렸다.

“아. 오셨군요.”

빙긋 웃은 윌리엄이 그녀를 맞았다.

“저번에 말씀드린 부분 어떻게 하실지 생각하셨나요?”

“네.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오랜 시간 써 왔던 원고를 고치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돈이 필요했다.

결연한 눈빛에 윌리엄이 입매를 끌어 올렸다. 원고를 받아 쓱 훑어본 뒤 평을 내렸다.

“매우 좋네요. 오탈자 검수만 마친 뒤 바로 출간해도 되겠어요.”

“정말이요?”

희망에 로위나가 눈을 빛냈다. 마주 웃어 주며 윌리엄이 창밖을 힐끔 봤다. 저번에는 없었던 미행이 붙어 있었다.

이 여자에게 붙은 미행이리라. 거트루드라는 여자가 찾아온 건 눈앞의 남장한 여자가 오기 일주일 전이었다.

―연극을 하나 해 주면 됩니다.

―연극이요?

―네. 아주 간단한 겁니다.

의외였던 건 시골 여자라 무시했던 것에 비해 이 여자의 원고는 생각보다 괜찮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진심으로 충고를 해 준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세상은 돈이 전부였다. 돈이라는 우선순위에서 글은 아무 소용 없었다.

이미 받은 착수금도 적지 않았다.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삼킨 윌리엄이 보란 듯이 커튼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의자에 풀썩 앉았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 * *

“이곳입니다.”

한낮에도 어둑한 곳이었다. 직원의 깍듯한 안내에 따라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덮치는 매캐한 연기에 킬리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한 환락가는 속이 비치는 옷을 입은 여자와 낄낄대며 도박과 술에 절은 남자들로 가득했다.

“이곳입니다.”

안내한 직원이 정중하게 문을 열었다. 텁텁한 공기가 가득 찬 공간에 취한 남자 한 명이 여자들과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럼 이만.”

등 뒤로 문이 닫혔다. 킬리언은 모자를 벗은 손으로 코를 막았다. 지독한 술 냄새에 머리가 찡할 정도였다. 불결했다. 원래라면 시선조차 주지 않을 곳이었다.

처치 곤란한 쓰레기를 보는 눈으로 주위를 훑자, 그를 발견한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이야. 저하께서 웬일이신가. 이런 곳에 행차를 다 하시고.”

“펠릭스.”

사립학교 시절 함께 수학했던 동기였다. 백작가의 사생아로 자유분방하고 문란했다.

태어날 때부터 공작이란 지위를 낙점받아 정해진 길을 걸어온 그와 정반대의 인물.

학교를 뺀 나머지 접점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사이였지만, 많은 비밀을 공유한 관계이기도 했다.

“여전히 쓰레기처럼 사는군.”

“뭐 새삼스럽게!”

어깨를 으쓱인 펠릭스가 나신으로 자던 여자 두 명을 깨워 내보냈다. 그가 환기를 조금 시키고 나서야 킬리언이 카우치에 앉았다.

“알아보라고 했던 건.”

거두절미하고 본론에 들어가자 공기가 확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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