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렇게 삼 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는 아침마다 제 옷차림을 정돈하고 넥타이를 매어 주는 손길에 익숙해졌다. 커프스 단추를 채우고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처음에야 여왕이 들이미는 혼담을 피해 보겠다고 데려온 여자였지만, 조금씩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이 나라의 단 하나뿐인 공작이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되고, 때론 작은 행동 하나가 아랫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니 뿌리도 알 수 없는 천한 혈통을 공작 부인으로 들일 수는 없었지만, 아이가 생긴다면 평생 먹고 살 재산과 섬 하나 정도는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총애와 믿음은 별개였다.
로위나 필로네. 그의 하나뿐인 정부는 젠트리도 못 되는 노동자 계급 출신. 더불어 한때 코르티잔이었던 여자였다. 천박함은 지속적인 교육과 지도로 어느 정도 가릴 수 있지만, 타고난 천성은 고칠 수 없었다.
─미스 필로네에게 만나는 남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헛소리라면.
─감히 누구 앞에서 헛소리를 하겠습니까. 그 남자의 이름도 압니다. 윌리엄 제넌이라는 남자입니다.
낮의 그는 긴 시간 자신을 모셔 온 거트루드의 입을 찢어 버릴 뻔한 충동에 휩싸였다. 로위나를 믿지 않는 것과 별개로, 조금 풀어 주기 시작한 건 한 가지 자신이 있어서였다.
로위나 필로네에게 남자란 오직 ‘킬리언 데본셔’뿐이라는 자신.
수많은 부귀와 영화를 안겨 줬다. 부귀와 영화, 더불어 쾌락 또한 안겨 줬다. 외모 외에는 봐줄 것 없는 여자가 공작의 정부 자리를 꿰찬 일은 전무후무한 신분 상승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순간의 감정에 눈이 멀어 멍청한 짓을 저지르는 이를 경멸했다. 잠시 잠깐의 불장난에 놀아나는 멍청이 또한.
누구를 믿을지는 이미 답이 나온 문제였다. 그는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로위나 필로네는 그의 정부지만 출신도 비천했다. 반면, 거트루드는 출신도 확실한 신분인데다 오랜 시간 데본셔 공작가를 모셔 온 하녀장이었다.
해가 질 무렵에서야 두어 번의 노크 소리와 함께 기다리던 여자가 돌아왔다.
“공작님……?”
“들어와요.”
킬리언은 천천히 열리는 문을 바라봤다.
“공작님…….”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잔뜩 위축된 로위나가 말을 이었다.
“일찍… 귀가하셨네요.”
“미스 필로네.”
차분한 대답에 로위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몰아붙여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공작의 얼굴은 평온했다. 귀가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는지 그는 실내복이 아닌 외출복 차림이었다.
타닥거리는 벽난로의 불씨. 옅은 와인 냄새. 그가 기대앉은 카우치 앞 테이블엔 먹음직스럽게 잘린 치즈와 와인 한 병. 그리고 두 잔의 와인잔이 있었다.
“웬일로 혼자 술을 드세요…….”
심기를 거스르지 말아야지. 결심한 로위나가 애써 웃는 얼굴로 운을 뗐다.
대답 대신 그가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턱짓했다. 쭈뻣쭈뻣 다가온 로위나가 카우치에 앉자마자 킬리언이 빈 잔에 와인을 채워 건넸다.
“예전에.”
잔을 받은 로위나가 한 모금 마시자 그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개 한 마리를 키운 적이 있습니다.”
“개…요?”
로위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박제된 수사슴의 머리 말고 그의 거처엔 동물이란 보이지 않았으니까.
“여왕께 받은 선물이었는데 아주 예쁜 사냥개였습니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털에 우아하고 말을 잘 알아듣는 암캐였죠.”
능숙하게 치즈를 한 겹 자른 킬리언이 그대로 나이프에 자른 치즈를 얹어 그녀의 입 쪽으로 들이댔다.
놀란 로위나가 나이프의 손잡이 부분을 잡으려 했지만 조용히 묵살됐다.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린 로위나의 입 안에 그가 손에 쥔 나이프를 집어넣었다.
미뢰를 타고 번지는 달콤한 맛에 혀가 사르르 녹았다. 그녀가 치즈를 씹어 삼키는 걸 확인한 뒤에야 킬리언이 제 손을 거뒀다.
“새를 사냥할 때면 지시하기도 전에 총에 맞은 사냥감을 물고 오는 개였습니다. ”
사람에게조차 잔정이 없는 그가 개를 아끼는 모습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로위나는 이야기에 빨려들 듯 그의 말에 경청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생겼죠. 목줄을 끊고 도망친 개가 돌아오지 않은 겁니다.”
“영영… 돌아오지 않았나요?”
안타까운 마음에 로위나가 조용히 물었다. 킬리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대신 웬 잡종개와 교미를 했더군요. 새끼를 배어 왔어요. 더부룩하게 배가 불러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내 바짓단에 뺨을 비벼 왔습니다.”
새끼라니. 생각지 못한 반전에 로위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도망친 줄 알았던 개가 돌아왔고 새끼까지 배어 왔으니 결국 좋은 일 아닌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킬리언이 나직이 말했다.
“나는 내 개가 새끼를 낳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창문이 열린 모양이었다. 로위나는 등 뒤에서 부는 서늘한 바람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리고요?”
잔을 내려놓은 킬리언이 담백하게 이야기를 끝맺었다.
“새끼를 닮은 잡종개를 찾아서 그 개의 눈앞에서 전부 죽여 버렸습니다. 한 마리. 한 마리. 결국 미치더군요. 날 물려고 하기에 그 개도 처분했습니다.”
“…….”
“그래서 지금까지 개를 키우지 않죠.”
장작이 다 되었는지 벽난로의 불씨가 사그라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방 안의 온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로위나는 온몸을 파고드는 한기에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를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가 느껴졌다.
혹시 몰래 출판사에 간 걸 눈치챈 걸까? 덜덜 입술이 떨렸다.
“미스 필로네.”
눈이 점점 암흑에 익숙해졌다. 로위나는 어느새 다가와 제 턱을 들어 올린 손을 바라봤다. 칠흑 같은 어둠 가운데에서도 새파란 안광이 번득였다.
“난 나를 배신한 개는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저, 저하.”
“하지만 잠시 잠깐의 실수였다면 넘어갈 수도 있죠.”
물론 그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뒷말을 삼킨 킬리언이 통보했다.
“사정이 생겨 아무래도 록포드로 거처를 옮기는 건 조금 뒤로 미뤄질 것 같습니다. 난 당분간 바빠 이곳에 잘 들르지 않을 것 같으니 사교 시즌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요.”
그는 로위나 필로네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거트루드의 말도 섣불리 믿을 수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킬리언은 타운 하우스를 떠났다. 넓은 침대를 뒤척이며 새벽까지 잠 못 이루던 로위나를 깨운 건 멜리사였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멜리사?”
“오늘 약속 있으시잖아요.”
“약속?”
“그 출판사 분과 공원에서 만나기로 하셨다면서요. 벌써 정오예요.”
“아.”
눈을 크게 뜬 로위나가 벌떡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준비하고 나가면 아슬아슬하게 약속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말까였다. 정신없이 씻고 옷을 갈아입는데 불현듯 머릿속으로 의문이 들었다.
“멜리사.”
“예?”
“그런데 내가 그 말을 한 적 있었니?”
“아……예. 하셨어요.”
“그랬구나.”
“갈아입으실 남자 옷은 씻으시는 사이에 제가 다 챙겼어요. 삯마차를 부르러 갈게요.”
“고마워.”
짐가방을 건네받은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히고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한숨을 내쉬려는데 불쑥 어젯밤 킬리언의 눈빛이 떠올랐다.
“내가 미쳤지.”
고개를 저은 로위나가 옷을 갈아입다 말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막 현관문을 열려던 멜리사를 붙잡았다.
“멜리사!”
“아가씨?”
“생각해 보니까. 헉…….”
“예?”
“가지 않는 게… 나을 거 같아.”
벅찬 숨을 몰아쉰 로위나가 숨을 죽여 속삭였다.
“공작님 심기가 불편하신데, 혹시라도 오해를 사게 되면 곤란해지니까.”
책도 물론 중요했다. 하지만 그보다 킬리언이 우선이었다. 그를 만난 순간 인생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동일했다.
“아가씨.”
“응?”
“저 사실 어제 아가씨 원고를 몰래 봤어요. 출판사에 가져가신 원고 말고 다른 원고가 가방에 있길래.”
“…그랬구나.”
“아가씨.”
크게 심호흡한 멜리사가 돌연 로위나의 손을 잡았다. 놀란 로위나가 주춤하는 사이 멜리사가 눈을 반짝이며 열정적으로 말을 쏟아 냈다.
“아는 것 없는 제가 보기에도 아가씨는 정말 재능이 있는 분이에요.”
“…….”
“겨우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오늘은 계약하실 수도 있잖아요?”
이렇게까지 열정적으로 그녀의 글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해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로위나의 가슴 안쪽으로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잠시 말이 없는 로위나를 향해 멜리사가 쐐기를 꽂았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어요. 록포드로 돌아가시면 또 반년이나 그곳에 있어야 하시는걸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 멜리사의 말에 로위나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동시에 잠시 잊고 있던 열정이 샘솟았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주먹을 꼭 쥐었다.
“네 말이 맞아.”
어차피 남장을 하고 나가니까 혹시나 그녀를 아는 사람이 지나쳐도 알아볼 확률은 전무했다.
“네가 같이 가 줄 거지?”
“중요한 일이잖아요. 이번엔 제가 없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그럼…….”
“걱정 마세요. 갈 때 올 때는 장소만 말해 주시면 제가 같이 갈 테니까요. 그럼 따로 사람도 안 붙고 거트루드 부인에게도 흠 잡힐 일 없겠죠.”
빙긋 웃은 멜리사가 안심하라는 듯 대답했다. 환하게 웃은 로위나가 멜리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정말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