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멜리사에게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아 내고 나서야 로위나는 마차 안에서 남자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럼 전 마차에서 기다릴게요.”
“고마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다녀오세요.”
낡고 후미진 첫인상과 달리 출판사 안은 생각보다 넓고 깨끗했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원고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변을 신기해하며 둘러보던 로위나가 자리에 앉자 남자가 커피를 내왔다.
마주 앉은 이는 서른 남짓 되었을까. 생각보다 젊은 남자였다. 번듯하게 차려입은 옷차림과 큰 키, 호감형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책을 쓰고 읽는 사람이라면 으레 느껴졌을 잉크 냄새 대신 옅은 향수 냄새가 맡아졌다.
로위나가 조금 의아해하는 사이, 빙긋 웃은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윌리엄 제넌입니다. 이 출판사 사장이죠.”
“……필립 맥카시입니다.”
목소리를 일부러 낮게 내느라 목에 힘이 들어갔다. 다행히 상대는 그리 개의치 않고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각설하고, 다시 원고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매끄럽게 잘 읽긴 했습니다. 다만 수정해야 할 부분이 좀 있더군요.”
“어떤 부분이요…?”
눈을 깜박인 로위나가 묻자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이 없던 사장이 대뜸 내뱉었다.
“문장은 좋은데 이야기가 뭐랄까… 공감하기 어려워요.”
“그 말씀은…….”
“주인공이 가는 장소가 너무 한정적이에요. 회원제 식당이나 호화 유람선, 최고급 호텔. 물론 생생하게 잘 묘사했고 어린 소녀들에게는 이 점이 동경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공감하기 어렵고 허황된 소설이 일반 대중들한테 먹힐까요?”
뼈를 때리는 감평이었다. 처음 들어 본 제대로 된 평가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로위나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선술집이라거나 햇살 좋은 날의 공원이라거나 봄날의 호숫가라거나. 이런 일상적이고 공감을 살 수 있는 배경을 넣어 보세요.”
“하지만…….”
머뭇거리던 로위나가 입술을 오므렸다.
“하지만?”
“그런 곳에 가 본 적이 없는걸요.”
“그럼 경험을 해 보죠.”
“네?”
갑작스런 제안에 로위나가 눈을 크게 뜨자마자 윌리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로 또 약속이 있어서 나가 봐야겠네요. 내일 콘웰 공원으로 나와요. 정오까지. 시간이 없으니 이만 가 보세요.”
다급한 축객령에 로위나는 내쫓기다시피 건물을 나왔다.
“어떠셨어요?”
“음, 잘모르겠어.”
“계약은요? 도장은 찍으셨어요?”
“그것도…….”
연이은 멜리사의 질문에 어색하게 웃은 것도 잠시, 마차 안에서 원래의 옷으로 갈아입고 타운 하우스에 돌아올 무렵에 해는 이미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마차에서 내린 로위나가 황급히 이 층 침실의 창문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불이 켜져 있었다.
“…아직 돌아오실 시간이 아닌데.”
“아가씨?”
로위나가 따라 나오려는 멜리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멜리사.”
“네?”
“지금 원래 퇴근할 시간이지?”
“그렇긴 한데…….”
“그럼 들어가 봐. 어서.”
“예? 그래도.”
“가 봐.”
실랑이는 짧았다. 머뭇거리던 멜리사를 보내고 나서야 로위나는 문고리를 잡았다. 그대로 돌리는데 반대편에서 문이 열렸다.
딱딱한 얼굴의 거트루드 부인이 그녀를 맞았다.
“늦으셨군요.”
“어쩌다 보니…….”
“대기하던 마부도 부르지 않으시고요.”
“가까운 거리라서요…. 번거롭지 않을까 싶어 삯마차를 탔어요.”
“쇼핑을 가셨다던데 짐꾼이 안 보이는군요.”
“오늘은 별로 살 만한 게 없었네요.”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 올린 로위나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침실에 불이 켜져 있던데.”
“공작님이 조금 일찍 귀가하셨습니다.”
혹시나 했던 예상이 들어맞았다. 멜리사를 돌려보낸 건 잘한 일이었다.
굳은 로위나에게 슬며시 잡일 하녀가 다가왔다. 하녀에게 외투를 벗어 건넨 로위나가 두려운 눈으로 위층을 바라봤다.
킬리언은 고용인들에게나 그의 정부에게나 어느 정도 관대한 주인이었다.
웬만한 실수에는 그저 못 본 척 넘어갈 정도의 아량도 있었고, 아랫사람이라 해도 편하게 말을 낮추거나 함부로 대하는 법도 없었다. 하물며 로위나를 타운 하우스 안에서 꼼짝도 못 하게 잡아 두는 류도 아니었다.
수행원을 붙이기는 하나 멜리사와 동행할 경우엔 예외니까. 그러나 거기엔 지켜야 할 한 가지 절대적인 불문율이 존재했다.
그가 귀가할 때 침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
최소한의 선을 만들어 두고 그 선을 넘지 않는 한에서는 관대하나, 반대의 경우엔 가차 없는 남자였다.
침실에서 기다릴 남자를 떠올리자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심장의 맥박이 귀로 들리는 듯했다. 어떻게든 머리를 굴리며 로위나가 말을 더듬었다.
“그럼 일단 머, 먼저 씻고…….”
거트루드는 모래폭풍을 피해 고작 바위 아래에 머리를 파묻는 여우를 보는 눈으로 로위나를 바라봤다.
“아니요.”
“…….”
“돌아오시는 즉시 올라오라 하셨습니다.”
냉담한 선고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로위나는 떨리는 손으로 벽을 짚었다. 등 뒤는 막혔고, 눈앞은 시커먼 맹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도망갈 길은 없었다.
킬리언 데본셔가 본 로위나 필로네의 첫인상은 여리고 순진한 여자였다.
왕래가 드문 산골짜기 출신에 남을 의심하지도 못하고 세상 물정에도 무지한.
기차 안에서 그녀가 스무 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킬리언은 머리끝까지 차오르던 피가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그는 스물여덟 살이었고, 막 성인이 된 여자는 그에게 너무 어렸다.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도덕성과 결백이 본능을 가로막았다. 음습하게 올라오던 상상 또한 끝났다.
즐거웠던 시간도 잠시, 기차가 목적지에 다다르자 언제 흰 목덜미를 탐냈냐는 듯 그는 담백하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도착했네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미스 필로네.
─아…… 네. 저도요. 킬리언 씨.
아쉬운지 조금 어깨를 늘어뜨리던 모습을 기억했다. 여자는 잘 익은 과실처럼 단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사실 어린애였다. 아직 채 익지 않아 끝맛이 떫을. 차마 더 말을 걸지 못하고 저를 바라보는 여자에게서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대로 끝이어야 했다.
원래라면 기차를 나선 순간 깡그리 잊어버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여자가 제게 얼마나 강렬히 박혔는지 간과했다.
기차에서 내려 미리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타는 도중에도, 타운 하우스에 도착하고 나서도 여자의 모습이 머릿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엔 단순히 욕구불만인가 싶었다. 그는 여자를 안은 지 오래되었던가 생각하다가 교제했던 여배우와 두 달 전에 헤어졌음을 기억해 냈다.
이후 의미 없는 연회를 전전했다. 하룻밤이라도 좋다는 여자는 많았지만, 개중 침대로 데려갈 상대는 없었다. 해소되지 못한 갈증에 뒤척일수록 그는 몇 번이나 곱씹었다.
그 여자가 안 되는 이유야 많았다.
일단 그녀는 스무 살 어린애였다. 그리고 척 보아도 중산 계급조차 못되었다. 하지만 얄팍한 양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끝없는 불면과 욕구불만에 시달리다 낸 결론은 합리화였다.
스무 살이면 성인이 아닌가?
결혼 상대를 찾는 것도 아닌데 신분이 중요한가?
어쩌면 한 번 안아 버리면 모든 흥미가 식을지도 몰랐다.
─로위나 필로네. 금발에 초록 눈. 얼마 전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알아봐요.
갑작스러운 명령에 거트루드는 놀란 눈을 했지만, 잠깐이었다.
얼마 뒤 들려온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금발을 무기로 내세운 고급 코르티잔이었다고 합니다. 빚을 아주 많이 지고 도망치는 중이라는군요.
누군가 정수리 위로 찬물을 퍼부은 느낌이었다. 형형한 공기에 거트루드가 급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데려올까요?
─아니요.
순수한 시골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실소가 차올랐다. 어느 정도 노회했다고 생각한 자신도 깜짝 속아 넘어갈 만큼 대단한 연기 아닌가.
턱에 힘이 들어갔다. 살기가 차올랐지만 그런 여자에게 며칠이라도 헤어나지 못한 스스로가 가장 우스웠다.
─됐습니다. 나가 보세요.
차갑게 명령한 그가 잠시 놓았던 펜을 다시 잡은 순간이었다. 머뭇거리던 거트루드가 슬며시 물었다.
─저하, 그 여자… 죽은 레이디 안젤라를 많이 닮았던데 말입니다.
─…….
─지금 돈도 궁핍한 것 같고… 잘 이용한다면 꽤 쓸모가 있지 않을까요? 여왕께서 또다시 혼담을 가져오실 것 같은데…….
그 순간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럼, 당장…….
화색이 된 거트루드가 뒤를 돌았다. 금세라도 몸을 돌려 나갈 듯한 기세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아닙니다. 조금 더 구를 대로 구른 뒤에.
바닥을 구르고 추락을 해 본 인간이야말로 제 주제를 아는 법이었다. 처절하게 진흙탕을 구른 뒤에야 유순해진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은 들어맞았다.
바닥을 길 때까지 기다린 끝에 구해 주자 여자는 쉽게 그의 손을 잡았다. 막대한 빚을 갚아 주는 대신, 제 정부가 되라는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