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편지의 발신인은 소규모 독립 출판사였다.
로위나는 들뜬 마음으로 건물을 올려다봤다. 그녀가 선 곳은 으리으리한 타운 하우스가 줄지어진 부촌이 아닌 할렘 거리였다. 눈앞의 건물 또한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져 회벽이 드러난 낡은 건물인데다가 버젓한 간판 하나 달리지 않은 곳이었다.
예상에 벗어난 모습에 조금 긴장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원고를 보냈던 출판사 중에서 유일하게 답신을 보내온 곳이 아닌가.
“아가씨…….”
그때 겁에 질린 목소리가 기대에 부푼 로위나의 주의를 끌었다. 고개를 돌리자 불안하게 주위를 훑는 멜리사가 있었다.
“아가씨……, 여긴 어디예요…? 백화점에서 쇼핑을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순진한 얼굴에 죄책감이 든 로위나가 시선을 피했다.
남자 이름으로 소설을 투고한 것 또한 비밀이었고, 이곳이 출판사인 것도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됐다. 공작은 자신이 얌전히 집에 머무르는 인형이길 바랐기에.
뒤에 항상 수행원이 따라붙지만, 삼 년이나 되고 보니 멜리사가 동행하는 경우에는 따로 사람이 붙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멜리사를 이용한 거였다. 대답을 피하는 로위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멜리사가 그녀가 쥔 가방 안을 힐끔거렸다.
“그건 남자 옷 아니에요? 대체 이게 무슨…….”
“그게…….”
망설이던 로위나가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갖다 댔다.
“비밀을 지켜 준다면 이야기할게.”
로위나는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봤던 날을 기억했다.
그녀의 나이 다섯 살 때였다.
―얌전히 지내면 돌아올게. 로위나.
―다섯 밤 정도 기다리면 된단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부모님은 누구보다 다정한 분들이었다. 그리고 서로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그 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을 만큼. 그리고 그건 외동딸이었던 로위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위나는 어린 마음에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은 두 번째라는 걸.
―유모 말 잘 듣고 기다리렴.
가게가 번성해 여유로워질 무렵, 부모님은 미뤘던 신혼여행을 떠났다. 유모의 품에 안긴 로위나를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서.
그렇게 떠나간 부모님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곳에서 전염병에 걸려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났다. 소식이 알려지자, 단번에 고아가 된 로위나의 주변으로 친척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의 재산을 산산조각 내어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누구도 로위나를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저렇게 어린 여자아이를 데려가기엔 환경이 너무 척박해서요.
―언니네만 그런 줄 알아? 우리도 지금 막 태어난 아기 때문에 정신없어.
―그렇다고 고아원에 보내기도 뭐하고…….
자신을 흘깃 보며 숙덕거리던 말들을 로위나는 아직 기억했다. 결국 약간의 돈을 주고 위탁 가정에나 맡기자는 의견이 모일 즈음 낯선 이가 찾아왔다.
젊은 청년이었다.
―그렇다면 로위나는 내가 맡겠습니다.
―제, 제레미?
생각지도 못한 등장에 경악한 어른들이 눈을 홉떴다.
―당신…… 열여덟 살이 되자마자 집을 나가지 않았었나.
―여태껏 뭐 하고 살았지?
―예의상 묻는 걸 테니 대답은 하지 않겠습니다.
차갑게 대꾸한 남자가 구석에 쪼그려 앉은 로위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녕. 로위나.
로위나는 찬찬히 남자를 살폈다. 엄마와 닮은 금발의 머리카락, 그리고 검은 눈동자. 엄마와 닮았지만 좀 더 따뜻해 보였다.
―누구세요…?
로위나가 눈을 깜박이며 묻자 남자가 무릎을 접은 뒤 눈높이를 맞췄다.
―내 이름은 제레미 디쉬란다. 네 엄마의 남동생이지.
말재주가 없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던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육아는 해 본 적 없고 흥미도 없지만… 네 친구이자 보호자는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
―괜찮다면 나와 가자.
그의 등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나왔다.
―흑…….
어깨를 들썩이자 커다란 손이 등을 껴안았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대답 대신 로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따라간 곳에서 그녀는 스무 해를 살았다. 아는 사람만 아는 외진 시골에 방 세 개짜리 단출한 이층집.
가난한 작가 지망생이었던 외삼촌 제레미 디쉬가 유명한 작가가 되어 많은 인세를 벌어들여도 생활은 항상 같았다. 부족하지도 풍족하지도 않은 나날에 그녀는 만족했다.
하나하나 모두 자신의 손때가 묻은 곳이었다. 앞뜰에는 작은 텃밭을 가꿨고 암탉 두 마리와 염소 한 마리를 키웠다. 정겹고 소담했던 골짜기.
그러던 어느 날, 성년이 된 그녀의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어릴 적 잘 어울려 놀았던 소꿉친구의 편지였다.
오랜만이야. 로위나. 잘 지내고 있어?
난 수도에서 완전히 정착했어. 아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
혹시 너 아직 소설가가 꿈이니?
그렇다면 부디 조만간 놀러 와. 네가 쓴 소설도 투고하고, 결과를 기다리면서 내 집에서 같이 지내자.
스무 살의 그녀는 어렸고 세상 물정을 몰랐다. 그리고 너무 순진무구했다.
로위나는 친구의 편지 하나만을 믿고 무작정 낯선 수도를 향해 기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희망과 기대로 벅찼던 가슴은 편지에 쓴 집에 도착한 순간 스러졌다.
미안해. 로위나.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네 외삼촌이 돈 잘 버는 소설가니까 대신 갚아 달라고 해.
전부 함정이었다.
그토록 믿었던 소꿉친구는 자신을 배신했다. 수도에 불러들인 것부터가 계획 중 하나였다.
친구는 ‘로위나 필로네’로 분장하고, 그녀의 이름으로 막대한 빚을 남겼으니까.
눈앞이 깜깜했다. 골짜기로 다시 돌아가 외삼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만류하는 외삼촌을 뒤로하고 올라온 수도이기에 절대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상황을 인지함과 동시에 매서운 남자들이 그녀를 쫓기 시작했다. 결국 당장은 몸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져온 돈으로 며칠은 임시 숙소에 숨어 지냈지만 한계가 있었다.
달려드는 빚쟁이들을 피해 그대로 길거리에 내쫓긴 건, 비가 지독하게 내리던 추운 밤이었다.
갈 곳 없이 배회하던 그녀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운명의 장난처럼.
―미스 필로네?
―…킬리언 씨?
기차에서 만났던 남자.
누군지 알아차린 순간 수치심이 올라왔다.
비에 젖은 생쥐 꼴로 마주하니 그대로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로위나가 홱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지나치려고 했는데 커다란 손이 팔을 붙잡았다.
―놔, 놔주세요. 가야 해요.
―어디 갈 곳은 있습니까?
싸늘한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대답 대신 로위나는 곱아든 손끝을 마주 잡았다. 차가운 온기에 숨을 내쉴 때마다 부연 입김이 올라왔다.
말없이 혀를 찬 남자가 제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에 온몸이 저릿했다.
―따라와요.
고저 없는 단정한 목소리. 그뿐이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처럼 느껴졌다. 마치 외삼촌 제레미를 처음 봤을 때처럼.
그녀는 미련 없이 뒤도는 남자를 쫓았다. 홀린 듯이 그 새카만 등을 따라갔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가장 고귀하면서도 가장 천박한 여자.
그의 여자가 되리라는 건 첫 만남에서 본능적으로 예감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친구의 편지를 믿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를 뒤따라가지 않았더라면.
당시의 유혹을 거절하고 떳떳한 입장으로 다시 만났었더라면.
어쩌면 킬리언과 좀 더 제대로 된 관계로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로위나는 되짚어 봐도 부질없는 가정을 습관처럼 반복했다. 그랬기에 이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언젠가 소설가로서 돈을 벌게 되면, 그에게 진 빚을 전부 갚으리라.
서로에게 부채가 없는 관계가 되고 나면 진실한 관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 남자였지만 그녀는 알았다. 킬리언은 자신을 사랑했다. 이따금 보여 주는 눈빛과 손길에서 알 수 있었다. 그걸 깨닫는 게 느릴 뿐이었다.
때때로 포기하고 싶을 때면 로위나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3년이란 시간을 불명예 속에서도 그의 옆에 있었던 이유는 그의 눈에서 사랑을 읽어낸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킬리언은 넓은 세상으로 나와 처음 본 사람이자 가장 도움이 절실할 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었다. 그를 볼 때면 막 알에서 깨 어미 새를 본 아기 새처럼 맹목적으로 몸과 마음이 향했다.
“…해서 투고하게 된 거야.”
공작과의 이야기를 뺀 과거사가 끝났다. 내내 로위나의 말에 귀 기울이던 멜리사가 눈물을 글썽였다.
“세상에. 그런 사연이 있으셨군요…….”
순수하고 솔직한 반응에 로위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멜리사는 배려심 있고 사려 깊은 소녀였다. 앞에서야 공작 가문의 위세 때문에 그녀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지만, 뒤에서는 남몰래 손가락질하는 다른 고용인과 달랐다. 그런 그녀를 볼 때마다 로위나는 수도로 올라오기 전 자신을 떠올렸다. 친구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면, 킬리언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 또한 여전히 멜리사 같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남장은 왜…….”
“혹시 모르니까. 아는 사람을 마주칠 수도 있고.”
상념도 잠시, 날아든 조심스러운 질문에 어색하게 대꾸한 로위나가 거듭 당부했다.
“우리만의 비밀이야.”
결연한 얼굴로 멜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