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소설가.”
“아.”
알겠다는 듯 멜리사가 눈을 반짝였다.
“아가씨의 외삼촌분이 되게 유명한 소설가시라고 했죠?”
“맞아. 제레미 디쉬.”
낯익은 이름에 박수 친 멜리사가 방방 뛰었다.
“미스테리 스릴러 작가! 이름 많이 들어 봤어요! 은둔해서 대중한테 얼굴을 안 보인다던데. 어떻게 생기셨어요? 아가씨를 닮았나요?”
핏줄이니 아마 닮았을지도 모른다. 닮았다면 대단한 미남이 분명하다. 기대 가득한 멜리사와 달리 로위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글세…… 잘 모르겠어.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외삼촌은 부모님을 전염병으로 일찍 여읜 자신을 키워 준 사람이었다.
―힘이 들 땐 언제든 돌아오렴. 로위나.
―그렇게 할게요. 감사해요. 외삼촌…….
마지막으로 그를 본 건 3년 전, 부푼 마음을 안고 소설가가 되기 위해 수도로 올라가기 직전이었다.
올라오는 기차에서 공작을 우연히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수도로 오라고 손짓했던 친구를 믿지 않았더라면…….
부질없는 가정이었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점점 가라앉는 로위나의 표정을 살피던 멜리사가 눈치껏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머리 손질이 어느 정도 끝나 갈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미스 필로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는 타운 하우스를 관리하는 거트루드 부인이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경멸을 감추지 않았던 데본셔 공작가의 오랜 하녀장.
긴장한 로위나가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들어오세요.”
열리는 문을 바라보며 로위나는 속으로 단단히 각오했다.
그녀가 가져오는 소식은 대개 좋지 못한 일이기에.
거트루드 부인.
세 채의 타운 하우스를 관리하는 그녀는 모두가 무서워하는 대상이었다. 성격 자체가 매우 꼼꼼하고 깐깐했고, 잘 웃는 법도 없기 때문이었다.
하녀와 하인뿐 아니라 아주 작은 물건조차 그녀의 허락이 없으면 들어오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했다.
그래서 로위나는 항상 거트루드 부인 앞에 설 때면 긴장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자신은 그저 관리해야 할 주인의 인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까.
그에 반해 거트루드 부인은 실질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상대였다. 주인의 잠자리까지 관리할 정도로.
―저하께선 노련하고 무르익은 여성이 취향이십니다. 그러니 처음인 것 같지 않게 유혹적으로 굴어야 해요.
공작가에 들어오고 나서 제일 먼저 선생으로 맞이한 건 거트루드 부인이 비밀리에 데려온 노련한 코르티잔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자질이 있으시군요. 열심히 배운 만큼 충분한 보상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미스 필로네.
로위나는 그녀와 마주하면 그때의 수치심과 굴욕감이 제일 먼저 찾아들었다. 그래서 눈을 마주치는 것도 힘겨웠고, 이렇게 대화를 나눈 적도 드물었다.
“아침부터 찾아뵌 이유는…….”
끝을 길게 빼는 거트루드 특유의 어조에 로위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눈앞의 여자를 겁내고 있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유는요?”
잔뜩 힘주어 잡은 찻잔이 뜨거웠다. 덜덜 떨리는 로위나의 홍차를 흘깃 본 거트루드가 운을 뗐다.
“미스 필로네의 거처를 록포드로 옮겨야겠습니다.”
“록포드요?”
뜻밖의 이야기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로위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직 사교 시즌…인데요?”
“일정이 앞당겨졌습니다.”
날이 따뜻한 7월 초였다. 의회 일은 끝났다 하더라도 매년 8월에나 다시 컨트리 하우스로 돌아갔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보통 거트루드를 마주하는 것도 힘들어하던 로위나가 용기 내어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작님도 가시나요?”
“아니요.”
냉담한 대답에 심장이 철렁했다. 그러나 또 질문할 용기는 없었다.
“하녀에게 내일부터 짐을 꾸리라 이를 테니 준비하세요. 모레 점심 무렵에는 록포드로 떠날 겁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마친 거트루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문고리를 잡은 그녀가 멈춰 섰다. 그러더니 로위나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편지가 한 통 왔더군요. 무슨 출판사라던데.”
그늘졌던 로위나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그 웃음을 미묘한 눈길로 바라보던 거트루드가 곧 뒤를 돌았다.
* * *
초여름 햇살이 집무실 창을 통해 쏟아졌다.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남의 일이었다.
데본셔 공작가에는 귀속된 땅과 섬이 많았다. 그것을 관리하는 데는 하루의 반을 써도 모자랐다. 대부분 대리인과 섭정인을 썼던 선대 공작과 달리, 킬리언 데본셔는 하나의 섬을 제외하곤 모든 걸 본인의 손을 거치게 했다.
단정한 손끝에서 수없이 넘어가는 서류를 바라보며 거트루드가 깍듯이 보고했다.
“미스 필로네에게 말씀하신 대로 전달하고 왔습니다.”
“수고했습니다.”
고개조차 들지 않은 킬리언이 짧게 치하했다.
“나가 보세요.”
그는 같은 지시를 두 번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거트루드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갈 수 없었다.
“이제…….”
주먹을 쥐었다 편 거트루드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이제 내치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그가 서류에 못 박혔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고저 없는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린 거트루드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모님 되시는 에식스 후작 부인께서 제게 언질 하시기를…….”
킬리언이 들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았다.
에식스 후작 부인.
방계이긴 하나 데본셔 공작가의 몇 없는 웃어른이었다.
“여왕께서 얼마 전 결혼 적령기의 외국 부호의 딸을 초청하셨다고 합니다. 그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공작께선 영민하시니 아실 거라면서…….”
말을 하면서도 계속 입이 말랐다. 몇 번 머뭇거리며 거트루드는 눈을 내리깔았다.
“부호의 딸이라…….”
고개를 기울인 킬리언이 미소했다.
“기어이 뚜쟁이 노릇을 자처하시는군. 대가로 무엇을 얻어 내시려고.”
“저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말에 거트루드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정작 무엄한 말을 내뱉은 장본인은 태연했다.
“미스 필로네가 가치를 다한 모양이야.”
왕실은 손이 귀했다.
데본셔 공작인 그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삼 년 전, 태중 약혼녀가 낙마로 죽은 이후 바로 다음 혼약자가 정해졌어야 했으나 여왕은 그러지 못했다. 약혼녀의 장례가 끝나기 무섭게, 자신이 한 여자를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로위나 필로네.
그녀가 공식적으로 사교계에 얼굴을 내비친 날, 여왕은 경악했다.
순금처럼 반짝이는 금발과 초록 눈동자. 오뚝한 코에 두툼한 입술.
모든 게 죽은 여자와 닮았기에.
그는 경악한 여왕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내 정부도 죽이실 겁니까?
―어찌…… 알았지?
―쥐새끼야 어디든 있는 법입니다.
덤덤한 대답에 높은 단 위에 앉아 있던 여왕이 부채를 꽉 쥐었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그가 전하고자 하는 뜻은 분명했다.
이 이상 자신을 좌지우지하려 한다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경고.
팽팽히 당겨진 실 같던 공기가 두 사람을 옥죄였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매섭게 그를 노려보던 여왕이 한걸음 양보했다.
―고매하신 내 조카님에게 잠시나마 위안이 된다면…….
―…….
―여자 하나쯤… 기꺼이 눈감아 드려야지.
그날, 로위나 필로네는 데본셔 공작의 여자로 인정받았다.
“더는 미룰 수가 없는 문제니까요.”
상념은 짧았다.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무거운 정적을 가로질렀다.
“또…….”
바싹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인 거트루드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분도… 금발에 초록 눈이라 하셨습니다. 직접 보고 오신 후작 부인께선, 미스 필로네보다 돌아가신 분을 더 닮았다고…….”
“하하!”
소름 끼칠 정도로 날카로운 웃음이 말허리를 끊었다. 보고 있던 서류를 사정없이 구긴 킬리언이 음산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거트루드.”
“…….”
“난 죽은 여자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
어릴 적 한 번 본 여자를 가슴에 품고 잊지 못한다니. 웃기지도 않는 신파였다. 삼류 잡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그러나 그는 그 오해가 기꺼웠다. 장례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로위나 필로네를 만났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자리를 잘못 봐서…….
―괜찮습니다. 심심하던 차였으니까.
―감사합니다…….
한여름의 복숭아처럼 물들던 뺨.
―이것도 인연인데, 가는 동안 제 말벗을 해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미스…….
―…필로네, 필로네에요.
부채처럼 퍼진 긴 속눈썹과 옅게 코끝을 스치던 은방울꽃 향기.
수줍은 미소를 언제 마지막으로 봤었는지 되짚는 사이, 실망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쓸모가 다해도… 내치지 않겠다는… 말씀이군요.”
“그건 내 겁니다.”
귀여운 애완동물이었다. 버릴 이유가 없었다.
“록포드의 컨트리 하우스로 거처를 일찍 옮기는 것도 그녀를 위해서였군요.”
“…….”
“그래도 그녀가 있으면 혼담은…….”
“거트루드.”
킬리언이 성가시게 이어지는 대화의 맥을 끊었다.
“내 모친은 오래전에 죽은 줄 알았는데. 아닙니까?”
네가 감히 내 모친 역할을 자처하냐는 물음이었다. 목덜미가 선득했다. 거트루드가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저, 저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당황한 거트루드가 뭐라 변명하기 전, 킬리언이 귀찮은 벌레를 쫓듯 손을 내저었다.
떨어진 축객령에 모멸감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혹시 몰라 처음부터 미스 필로네, 그 여자에 대한 불신을 심으려 얼마나 노력했던가. 여기 얽매인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거트루드는 경련이 일 정도로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
“미스 필로네에게 남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공기가 단번에 얼어붙었다.
뚝. 깃펜 끝이 부러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공작의 얼굴을 본 순간, 거트루드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