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250)화 (485/486)

제250화

“그만두지 못해!”

이미 육체를 잃은 에티모스는 나를 저지하지 못했고, 나는 비명을 내지르는 그의 손을 피해 북북 책을 찢어 나갔다.

“안 돼, 안 된다고-!!!”

에티모스가 절망하며 뻗은 손에 흩어진 책의 낱장들이 나비처럼 팔랑이며 날아가기 시작한다.

낱장과 맞닿은 허공에서 아이네스가 소환했던 책들, 그러니까 그녀가 반복한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적힌 책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욱.

지익, 지이익.

에티모스가 연 아공간에 생성된 모든 원작이 파괴될 때까지 나는 난도질을 멈추지 않았다.

“흐으.”

내가 달뜬 숨을 내뱉으며 단검을 내려놓았을 때, 희멀건 빛만 가득했던 아공간은 찢어진 종잇조각으로 넘실거리는 상태였다.

‘……죽었나?’

나는 더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 에티모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에티모스는 종이들의 무덤 속에 가라앉아 눈을 감은 채였다.

육체는 문밖에서 소실되었으니 숨을 쉬지 않는 건 당연했지만, 나는 두 눈을 감은 그의 콧등에 손가락을 내밀었다.

“뭐 하는 거지?”

그러자 희번득 눈을 뜬 에티모스가 누운 채로 나를 노려본다.

“죽었나 안 죽었나 확인하는데.”

내 짐작대로 에티모스는 자신의 영혼을 기반으로 <아.황.장>의 원작이라는 아티팩트를 생성한 모양이었다.

책을 파괴하자 힘을 잃은 그는 축 늘어진 채 간신히 입만 움직일 수 있을 뿐이었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죽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까 지켜봐야지.’

에티모스의 소멸을 기다리며 천천히 손을 모으는 나를 향해 그가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인다.

“죽지 않으면, 네 두 손으로 목이라도 틀어쥘 셈인 건가?”

“응.”

나는 그의 물음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나는 네가 설정한 여자주인공처럼 착하지 못해서.”

에티모스는 생긋 웃는 나를 흘기며 주먹을 쥐었다.

“끝까지, 끝까지 내 이야기를 망칠 셈이냐.”

아이네스도 착한 주인공과는 거리가 아주 머니까 그의 입장에선 이미 망한 이야기 아닌가 싶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돌렸다.

“에티모스, 당신 이야기는 끝났어.”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위로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었다지만, 그 이야기에 얽매여 봤자 더 깊은 고독감에 빠져들 뿐이다.

“이야기가 끝났다는 걸 인정하면 미련이 안 남을 텐데.”

에티모스는 사라질 때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알레테이아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그를 향한 신의 사랑이 의심스러웠다.

자신이 사랑하는 인간에게 영원 따위를 안겨 주는 신 같은 건 없을 테니까.

“내가 소멸하면 내가 만든 이 세계도 사라져.”

가라앉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꿈에도 모를 에티모스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인다.

“네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도 괜찮다는 건가?”

“그건 당신 이야기에 묶여 있는 영혼들도 자유로워진다는 말이겠지.”

아빠도, 자카리도, 실비와 에녹 전부.

그들은 몇 번이고 삶을 반복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레오노라의 죽음과 가문의 멸망을 목도해야만 했다.

“넌 또다시 외로워질 거다.”

에티모스는 갈라진 목소리로 나를 저주했다.

“아무도 널 사랑하지 않을 테고, 넌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테지.”

나는 묵묵한 얼굴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넌 또 혼자가 될 거야. 네가 차지한 건 결국 레오노라의 자리니까.”

“그래?”

나는 에티모스의 말이 달갑다는 듯 방긋 웃었다.

“다행이네. 내가 어부지리로 주운 행운을 그녀에게 돌려줄 수 있어서.”

그는 내가 자신을 비꼬는 줄 알았겠지만, 진심이었다.

“난 어른이 되었지만, 그녀는 어른이 되지 못했잖아.”

레오노라는 끝까지, 단 한 번도 어른이 될 수 없던 사람이다.

책을 통해 엿볼 수 있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쿵 가라앉으며 괴로웠다.

“아이를 외롭게 둘 수는 없으니까, 잘됐어.”

나는 천천히 눈을 감는 에티모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가, 에티모스.”

이 빌어먹을 원작자야.

* * *

“8호, 8호. 일어나.”

나는 내 어깨를 흔드는 작은 손길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응? 일어나.”

익숙하지만, 아주 오래 듣지 못했던 목소리.

아, 기억났다.

나는 흐릿한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 방엔 무슨 일이지? 6호.”

내가 8호로 불렸던 시절, 나보다 먼저 연구소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여자아이였다.

“어제 저녁 안 먹었잖아. 배고플 것 같아서.”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내가 연구소에 들어온 게 기뻤는지 줄곧 내게 친한 척을 하곤 했었다.

“안 고파. 갖고 꺼져.”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른 후 그녀가 내미는 손을 뿌리쳤다.

‘내가 꿈이라도 꾼 건가?’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이 꿈인 걸까.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있어. 배고프면 서럽잖아.”

우물쭈물 내놓는 6호의 대답에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거 느끼지 않아.”

그래, 나는 언젠가 이 아이와 이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기계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이 익숙했다.

“그렇다면 너는 서럽고 외로운 거 평생 못 느꼈으면 좋겠다.”

6호는 날카로운 내 대답에 히죽 웃으며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넌 언젠간 가족이 생겼으면 좋겠어. 난 틀렸으니까.”

6호는 다음날 사라진다.

내가 자란 연구소에서는 특정 나이에 그들이 정한 ‘적정 기준’에서 미달된 아이는 양육하지 않았으니까.

“아버지라면 이미-”

“아니, 진짜 가족말이야. 그 개자식 말고.”

아버지란 말을 곱씹으며 6호의 그림자가 흐릿해진다.

허물어진 아이의 그림자는 이윽고 내가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 인간의 형상을 만들었다.

“A-168호는 폐기 처리한다.”

귓가에 내리꽂히는 차가운 목소리.

그를 위해 충성을 다했던 나를 버리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듯했다.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절대로, 그 누구의 사랑도 갈구하지 않을 거야.’

아, 그래.

이런 마음을 굳게 먹었던 때도 있었는데.

그때의 그 다짐은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아무도 믿지 말자는 내 결심은 언제 흩어진 걸까.

“아이는 조건 없이 사랑받아도 된다, 리니.”

의구심에 고개를 기울이는 내 위로 가스파르의 다정한 목소리가 떨어진다.

“나는 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단다.”

“나는 언제나 내 목숨보다도 너를 아껴.”

그래, 가스파르였다.

가스파르는 내가 이유 없이 사랑을 받아도 된다고 처음으로 알려 준 사람이었다.

내가 자신의 친딸이 아니리란 의심이 들었을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사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진짜 레오노라가 아니어도 사랑해 주지 않을까.’

혹시나 모든 걸 알게 된 가스파르가 레오노라의 영혼이 소멸되었다며 나를 원망할까 싶은 두려움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아니, 사랑할 거다.

그러나 나는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공포를 걷어찼다.

여전히 두려웠지만, 나는 그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었다.

가스파르는 내가 자신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도록 나를 기르지 않았다.

“피료하지 아나두 대. 쓸모 업서두 대.”

“니니는 그래두 너를 사랑할 꼬야.”

가스파르의 목소리 위로 아직 발음이 부정확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겹친다.

차마 나를 따라 공작성으로 들어올 결심을 하지 못했던 히스를 앞에 두고 내가 다짐했던 말이었다.

‘못 지켰는데, 그 약속.’

끝까지 사랑해 주겠다고 했고, 이제 ‘끝’이었으니 지킨 거라고 우겨 볼까.

히스를 떠올리자 다시 가슴이 욱신거린다.

하지만 나는 그를 자유롭게 해 주겠다고도 맹세했다.

‘원작에 얽매인 세상에서 히스는 절대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거야.’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내 눈앞으로 뚱하니 나를 바라보는 루카스의 얼굴이나 활짝 웃는 에녹, 그리고 무뚝뚝한 실비와 자카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룰루와 랄라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모두 엄청 보고싶을 거야.’

회상이 끝나자 꿈도 옅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서서히 돌아오는 의식을 느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 모든 게 끝날 것이다.

이제 아빠도, 히스도 보지 못한다.

‘아쉽지 않아. 후회하지 않아.’

이미 결정한 일을 돌아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흐으.”

나는 새어 나오는 흐느낌을 막기 위해 애써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에도 터져 나온 눈물이 볼을 적시기 시작했다.

아니, 역시 아쉬웠다.

아쉬움에 미어진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프다.

“……보고 싶어.”

그들을 자유롭게 해 주고 싶은 내 마음도 진심이었지만, 다시 그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내 마음도 역시 진심이었으니까.

“안녕.”

까무룩.

마침내 빛이 명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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