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화
“히스-!!!”
뒤늦게 뻗은 손은 닿지 못했다.
아니, 비겁한 나는 지금 그가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 내가 에티모스를 절단 낼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랑할게.”
“널 사랑하도록 노력할게.”
내가 그에게 했던 말뿐인 맹세가 맥없이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쿵.
사라진 히스의 영혼을 대가로 결국 ‘문’이 열리고 말았다.
나는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을 노려보다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문이 나를 부르는 기분이 들었다.
“들어와.”
문안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나는 빛 사이를 유영하는 흰 인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히스나 자카리처럼 나까지 삼켜 버릴 생각이야?”
내 의심이 우습다는듯 인영이 작게 조소한다.
“아니. 문을 연 대가는 이미 받았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나는 인영의 대답에도 안심하지 못했다.
문을 연 대가, 그러니까 히스를 이미 받았다는 말에 신경이 쓰여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나는 나를 위로하는 듯한 인영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누군데 걱정하지 말라는 거야.”
“날 알잖아, 레오노라.”
레오노라.
자신이 레오노라라는 건지, 나를 부르는 말인지 헷갈리는 어조였다.
의아해 고개를 기울이는 나를 향해 인영이 손을 뻗는다.
망설이던 내가 그 손을 붙잡는 순간,
“……!”
익숙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
이 세계는 글러먹었다.
자신이 발을 디딘 땅이 아이네스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토대로 재구성된 대지라는 걸 깨달은 순간, 레오노라는 결심했다.
“나는 이 빌어먹을 원작을 벗어나고 말거야.”
사랑하는 가족의 배신으로 병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 삶을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그녀를 아무리 사랑해도 종국엔 외면하고 마는 자카리가 원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가여웠다.
아이네스, 아니, 이 세계가 그들을 조종하고 있었으니까.
연인을 위해 사랑하는 동생을 배신하는 고통을, 이 진부한 이야기를 써 내려간 인간이 이해는 하는 걸까.
“반드시. 어떻게 해서든 내 손으로.”
교단을 습격해 모은 정보로 에티모스의 정체를 파악한 레오노라는 세계의 구조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죽고,
살아나고,
이어지는 죽음 속에서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자카리는 변함없이 가족을 떠났으며 아이네스는 빈번히 레오노라를 농락했다.
레오노라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회귀의 기억 속에서 이 기괴한 굴레를 멈출 단서를 기어코 발견했다.
“……완전한 이물질이 필요해.”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완벽히 이질적인 존재.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것처럼, 이곳에 섞여들지 못하는 영혼이 결국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
이어지는 묘사는 복잡한 술식으로 가득했지만, 나타내는 바는 명확했다.
‘레오노라’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이 세계를 떠도는 영혼이었던 ‘나’를 불러들인 거다.
세계에는 갖춰야 하는 영혼의 수가 정해져 있고, 그녀가 존재하는 이상 다른 세계의 영혼을 소환할 수 없었을 테니까.
“……레오노라.”
나는 원작의 그녀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책을 안은 채 몸을 수그렸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이네스처럼 미치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었을 그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견뎌 낸 걸까.
◈
마탑의 현자 수준을 벗어나 대마법사의 반열에 오른 레오노라는 소멸이 다가오는 그 순간에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술식이 완성된 날,
“사실은 죽고 싶지 않아.”
레오노라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제 속마음을 처음으로 고백했다.
“늘 그랬어. 죽고 싶었던 적, 없어.”
성인이 되기도 전에 병으로 죽는 시한부의 역할을 맡았으니 죽음이 익숙해질 만도 했건만, 그녀는 늘 죽는 게 무서웠다.
‘아빠가 슬퍼하니까.’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가스파르는 매번 자신의 죽음을 처음 겪는 것처럼 아파했다.
한결같이 무뚝뚝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가스파르의 모습에 레오노라는 늘 심장이 옥죄여 오는 기분을 느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게 가장 극심한 불효라는데.”
자신은 그런 불효를 지금까지 몇 번이나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미안해요, 아빠.”
레오노라는 꿋꿋하게 웃으며 들리지 않을 사과를 중얼거렸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눈치챈 아이네스는 그녀의 방법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이 굴레를 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부탁할게.”
넌 내 이야기를 반드시 들어 줄 테니까.
◈
‘레오노라’는 내가 원작을 발견할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자신만큼이나 그녀의 가족들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미래까지도.
‘그러니 망설임 없이 내게 이런 부탁을 할 수 있었던 거겠지.’
나는 뜨거워진 원작을 쓰다듬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내가 빙의한 이후부터 원작이 비틀리기 시작한 거구나.’
캐릭터가 이탈한 책이라니, 멀쩡할 리 없었으리라.
‘……설마 그래서 노엘의 기억이 돌아온 건가?’
노엘은 알아볼 수 없이 모습이 바뀐 채였지만, 모종의 이유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른 회차의 기억이 지금의 노엘에게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그녀가 기억을 찾은 게 이상하지 않았다.
조각난 영혼이 지금 이 세계에 살아가는 그녀에게 모여들고 있다는 소리였고, 그게 레오노라가 설계한 술식의 목적이었으니까.
‘원작대로라면 죽어서 다른 누군가로 태어났어야 할 노엘이 내가 다른 세계에서 빙의하는 바람에 내용이 비틀려 살아남아 버린 거야.’
그래서 그녀의 기억들이 공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너와 레오노라가 벌인 짓이 어떤 건지 깨달았나?”
상황을 곱씹으며 정리하는 내 머리 위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에티모스.”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그는 나를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레오노라가 도망가는 바람에 시간선이 꼬여 버렸다. 책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주인공인 아이네스부터 미쳐 버렸고, 그다음은 남자주인공인 트리스탄 차례겠지.”
나는 에티모스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미 다른 기억이 섞여들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아이네스를 사랑한 기억, 레오노라를 싫어했던 기억, 그리고 지금의 너를 좋아하는 기억을 한꺼번에 품으려니 얼마나 괴롭겠어?”
에티모스는 트리스탄이 처한 상황을 자세히 알려 주며 재미있다는 듯 손뼉을 짝짝 치기 시작했다.
“축하해. 이 세계는 레오노라의 계획대로 너 때문에 붕괴하고 말 거다.”
그의 입은 축하의 말을 머금었지만, 독사 같은 눈빛은 나를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희번득거렸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 가스파르, 에녹, 실비, 자카리, 그리고 루카스까지.”
내 품에서 툭 떨어진 원작을 발끝으로 짓누르며 말을 잇는다.
“네가 원작을 벗어나려고 아둥바둥 노력한 덕에 미쳐 버릴 거라고.”
에티모스의 발아래에 깔린 원작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입안이 썼다.
“슬픈 얼굴이군.”
그런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에티모스가 손끝으로 내 턱을 들어 올린다.
“난 내가 창조한 인물들을 사랑하는 자애로운 신이 될 예정이니, 네게 마지막 기회를 주지.”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그가 내민 물약은 맑은 청록빛이었다.
“……이게 뭔데?”
“암네시아의 열매로 만든 망각의 비약이지.”
살짝 열린 뚜껑 사이로 흘러나오는 향기가 달콤하다.
“이 약을 삼켜. 모든 걸 잊고 네가 맡은 역할에 충실해라. 그리한다면 내가 자비를 베풀어 네 역할을 조금 손봐줄 생각도 있으니까.”
“시한부 역할을 맡기지 않겠다는 뜻이야?”
“그래. 아주 평범하고 안온한 삶을 살게 해 주지.”
나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약을 내미는 에티모스를 바라보며 환히 웃었다.
“커억!”
발등에 단검을 꽂자 신이라고 자칭하는 이도 고통을 느끼긴 하는 모양이었다.
“개소리하지 마.”
나는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마주한 채 입술을 비틀었다.
“난 살아 있는 인간이지, 활자 위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니까.”
“넌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레오노라.”
에티모스가 나를 저주하듯 외쳤지만, 나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피 묻은 단검을 그대로 책에 꽂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