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248)화 (483/486)

제248화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마나의 소용돌이는 순식간에 에티모스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가 반항할 새도 없이 에티모스를 꿀꺽한 마나구가 서서히 가라앉는 순간,

“끄, 끝났다!”

쥐 죽은 듯 상황만을 살피던 병사들 사이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온다.

“우와아아-!!!”

에티모스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병사가 앞으로 달려 나와 검을 높이 치켜든다.

“우리 공주님께서 승리하셨다!”

“공주님 만세!!”

나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드높았지만, 나는 그들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내가 승리한 게 아니야.’

내가 에티모스를 소멸시킨 게 아니라 에티모스가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에티모스의 육체는 분명 내 마나구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찢겨 나갔지만, 나는 그의 영혼이 자카리가 사라진 문 너머로 숨어들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허공에 부상한 검은 문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일렁인다.

‘에티모스는 저 안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자카리까지 삼켜 버린 심연이 무엇을 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만만하게 여길 공간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문밖에서도 느껴질 만큼 거대한 마나의 기운이 안쪽에서 넘실거렸으니까.

‘하지만 에티모스를 저지하려면 나도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해.’

그리고 자카리를 구하기 위해서도 심연을 탐색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사라진 에티모스를 따라가지 못하고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원작을 주워 들었다.

내가 이 세계에 빙의했을 때부터 늘 몸에 지니고 다녔던 책의 낡은 표지가 바람에 팔랑인다.

‘이건 언젠가 죽은 레오노라의 유산이었겠지.’

아이네스만큼이나 끝없는 삶을 반복했을 원작의 레오노라가 무슨 심정으로 이 책을 내게 넘겼을지 모르겠다.

“……내가 반드시 모든 걸 끝내 줄게.”

먼지가 부옇게 쌓인 책의 표지를 쓸어내린 나는 장미꽃이 얼기설기 얽힌 금박 부분을 매만지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러니 조금만 힘을 빌려줘.”

파아앗.

내 부탁에 감응하기라도 하듯 표지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가 문과 이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승리에 도취된 사람들을 지나쳐 자카리와 에티모스가 사라진 문을 향해 서서히 나아갔다.

‘문인지 무언가의 입인지 모르겠네.’

입을 쩍 벌린 마물처럼 보이는 검은 허공이 나를 반긴다.

치이익.

문 안으로 손을 뻗자 문의 그림자와 닿은 손끝이 새빨갛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만.”

망설임 없이 문에 발을 디디려는 나를 멈춰 세운 건 내가 이 세계에서 가장 사랑했던, 아니, 사랑하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리니야.”

어김없이 다정하다.

“위험한 짓 하지 말거라.”

그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따뜻했다.

아.

그 다감한 부름이 내게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

가족을 원하던 내게 아빠가 안겨 준 조건 없는 사랑이 무슨 의미였는지 알까.

‘생각해 보니 제대로 말해 준 적이 없는 것 같네.’

“아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꾸며내며 뒤를 돌았다.

“저 괜찮아요. 책을 통해 제겐 위험하지 않은 공간이란 걸 알 수 있어요.”

새빨간 거짓말이었고, 가스파르는 역시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가겠다.”

나를 만류하며 걸어 나오는 가스파르보다 먼저 튀어나온 에녹이 인상을 찌푸린다.

“리니, 그 문에 손대지 마. 수상해.”

“걱정하지 말라니까. 나 믿지?”

믿지 않으면 실망할 거야.

경고하듯 덧붙인 내 말에 움찔하는 에녹의 어깨 위로 작은 솜뭉치가 모습을 드러낸다.

“레오노라.”

우습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유리알로 만들어진 검은 두 눈 속에서 나를 향한 걱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이 심연의 정체를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건 여기선 루카스뿐이겠지.’

그는 레오노라처럼 원작의 흐름에 반항하다 에티모스에게 밉보인 아스테르이자 위대한 술자였으니까.

“그러지 마라.”

“…….”

“부탁이다.”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황위에 오른 제 형제에게도 고개를 숙인 적이 없을 오만한 황족이 내게 고개를 숙인다.

나는 루카스가 내게 처음 하는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 입안이 썼다.

[루카스, 이게 내 숙명이야.]

루카스는 그에게만 들릴 내 대답을 거부하고 싶다는 듯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원작이 내게 힘을 빌려준 이유가 있을 거야.]

내 말에 설득되진 않았지만, 루카스는 차마 나를 말릴 수 없다는 듯 애꿎은 에녹의 어깨만 팡팡 때릴 뿐이었다.

“나 정말 괜찮으니까, 다들 너무 걱정하지마.”

나는 가스파르에게 밀려 입술만 달싹이는 실비를 마지막으로 흘깃한 채 등을 돌렸다.

“다녀올게요.”

태연하게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무서워죽겠다.

그런 내 심정을 반영하듯 심연의 문을 붙잡은 손끝이 덜덜 떨려 왔다.

이 문을 여는 순간 영혼이 산산조각 날 거라는 예감이 들었으니까.

흩어진 아스테르의 마나가 내게 공명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심연의 문을 여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었다.

‘열자마자 고도의 마나가 쏟아져 나와 내 영혼 자체가 뭉개질 수도 있겠는걸.’

심장이 쿵쿵 뛰며 건네는 경고를 애써 무시한 채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는 나를 누군가가 속삭이듯 불렀다.

“공녀.”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주인님 소리 듣기 싫어서 질색했더니 공녀라고 불렀었지.’

하나 내 직위가 바뀐 이후로는 들어 본 적 없는 호칭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뒤를 돈 나는 사람인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게 잘생긴 얼굴을 흘깃했다.

“히스.”

“그 문에 손대지 마십시오.”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빠르게 다가온 히스는 나와 문 사이에 끼어든 채 거리를 벌렸다.

“마땅히 제가 할 일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리 히스가 마도 왕국이라고 불렸던 아크레아의 왕이었다지만, 아스테르의 마나로 보호받고 있지도 않은 그의 몸이 심연의 에테르를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레이디인 당신이 드나드는 장소의 문은 제가 열어 드려야 합니다.”

나는 고리타분한 옛날 예법을 핑계로 삼는 히스의 태도가 우스워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웃든 말든, 진지하게 얼굴을 굳힌 히스가 단호하게 말을 덧붙인다.

“귀한 분께서 문을 열게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당신을 보살피는 게 제 의무니까요.”

나는 고집스레 내 앞에서 비키지 않는 히스를 향해 눈을 흘겼다.

“아냐, 내가 네게 준 의무는 들판에 핀 꽃잎이 바람 따라 날아가듯 자유롭게 사는 것밖에 없어.”

“바람 따라 흩날려서 이미 오래전에 당신에게 정착했다는 것은 모르셨나 봅니다.”

히스는 자신을 붙잡으려는 내 양 손목을 한 손에 붙잡은 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제가 날아갈 곳도, 흘러들 곳도 전부 당신입니다.”

그가 정말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안다.

평생 속박당했던 그를 놓아주고 싶어 애써 외면했던 마음이지만, 지금은 고개를 돌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제자리에 붙박인 듯 움직이지 못했다.

“……공녀는, 늘 가족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히스의 흰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그가 천천히 심연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 것을 바라보다 그를 거칠게 붙잡았다.

내가 가족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그 말이, 마치 저보다는 자카리가 내 곁에 있는 게 행복할 거라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히스, 그러지 마.”

힘으로 그를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나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히스를 말렸다.

“내겐 너도 소중해. 알잖아.”

히스는 내 말이 고맙다는 듯 옅게 웃었다.

마치 곧 시들 꽃처럼 부서지는 미소라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제가 공녀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은 못 될 겁니다. 죽어 버린 신의 이름 앞에 맹세하건대 같은 마음을 바란 적도 없습니다.”

“내 허락 없이 움직이지 말라고 했어. 명령이야.”

히스는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말하는 나를 바라보다 내게 천천히 얼굴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제 첫 번째 불손입니다.”

꽃잎이 짓무르는 소리와 함께 내 입술에 미지근한 체온이 가볍게 내려앉는다.

“……!!”

“이게 두 번째 불손이고.”

그는 둥그렇게 커진 내 눈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레오노라.”

내 이름을 입에 담은 히스의 손이 이내 심연의 문손잡이를 붙들었다.

“불경하게도 당신의 이름을 입에 담은 게 세 번째 불손입니다.”

“……이름 같은 거 얼마든지 불러도 됐어.”

“네. 시도해 보지 않은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히스는 담담히 제 잘못을 시인하며 딸깍, 문손잡이를 돌렸다.

“당신은 제게 어둠 속의 별과 같았습니다.”

“히스-”

“저는, 늘 술래가 없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문안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가 히스를 휘어감듯 껴안는다.

“누군가 어둠 속에서 저를 꺼내 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믿었습니다.”

나는 뜨문뜨문 이어지는 히스의 목소리가 흩어지는 게 싫어서 손을 뻗었다.

“그럼에도 당신이 나를 찾아 줬을 때,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문을 여는 대가로 사라지는 히스가 애석했다.

“……해.”

마지막 고백의 말은 기어코 전해지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