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7화
파아앗.
내가 쥔 검을 감싼 연녹색 오러가 강한 빛을 발하며 일렁인다.
“마나?”
“아뇨, 이건 분명 소울나이츠의 오러입니다.”
내가 검에 두른 카렌의 오러를 발견한 기사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와 검을 요목조목 뜯어보기 시작했다.
“공주님! 언제 검술로 이런 경지에까지 이르셨단 말입니까?!”
그들이 놀랄 만도 했다.
소울나이츠는 노력한다고 해서 쉬이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고,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라고 해도 피나는 노력 없이는 밟을 수 없는 단계였으니까.
‘그래서 에녹과 실비가 소울나이츠의 경지에 올랐을 때 그만큼 주목을 받았던 거였지.’
오빠들이 소울나이츠의 자격을 획득했을 때 세간의 관심을 받긴 했지만, 사람들은 감탄을 했던 거지 놀란 건 아니었다.
흑랑의 기사단장이었던 아빠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들, 그것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검술을 조기교육 받았던 공자들이 오러를 마스터한 건 기대할 수 있는 결과물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다르지.’
내가 술자로서 뛰어난 자질을 보인다는 건 이미 내가 얼음 마탑의 주인이라는 게 밝혀진 순간부터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보통 술자의 재능이 있는 사람은 검을 다루지 못했다.
“세, 세기의 천재……. 아니, 이런 걸 단순히 천재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요?”
내가 오러를 다룬다는 사실에 기함한 기사들이 새하얗게 질려 목소리를 높인다.
“기본적으로 마나 운용력이 뛰어난 술자이시니 공자님들, 아니, 왕자님들을 뛰어넘는 수준의 기사로 성장할 수도 있겠군요.”
나는 왕국의 기사단을 이끄는 역할을 맡은 로베르의 평가에 머쓱한 뒤통수를 긁었다.
‘아니, 이건 단순히 원작에서 청금의 기사로 활약했던 카렌의 능력을 빌린 것뿐인데.’
하지만 지금은 내 능력의 비밀을 그들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내가 기사들의 감탄을 한 귀로 흘리며 검을 잡은 자세를 바로하는 순간, 에녹이 휘파람을 불며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리니, 언제 우리 몰래 검술을 단련한 거야?”
“검을 배우고 싶었으면 내게 말하면 좋았을 텐데.”
나는 내심 섭섭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실비를 힐끔하며 더듬더듬 입술을 움직였다.
“따, 딱히 배운 건 아니야.”
지금도 원작의 카렌의 행동 양식을 그대로 복제해서 자세를 취했을 뿐, 원작 없이 내가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건 불가능했다.
“……배운 게 아니라고? 네가 지금 얼마나 정석적인 자세로 검을 잡고 있는지 알고 하는 말인가?”
기가 막히다는 실비의 중얼거림을 엿들은 로베르가 손뼉을 치며 입을 벌린다.
“역시 단순히 천재라는 표현은 부족했습니다. 우리 공주님은 만재, 아니, 억재…!”
“다들 그만해!”
나는 흥분한 기사단장이 또 무슨 헛소리를 할까 두려워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부끄러우신 모양이네요.”
내 경고를 알아들은 그가 씨익 웃으며 자신의 부하를 돌아본다.
“자아, 어쨌든 공주님을 위해 에티모스 저놈, 우리가 혼쭐을 내 주자고!”
기사단장의 외침에 나를 위시해 모여든 기사들은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공주님, 저놈 이름이 에티모스였습니까? 에티모스라면…… 알레테이아 교단이 믿는 선지자의 이름이 아닙니까?”
“아까 궁시렁궁시렁거리던데 무슨 소리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 말입니다.”
그들에게 에티모스와 나의 악연을 설명해야 하나 싶어 입술을 달싹이는데, 로베르가 불쑥 튀어나와 사납게 인상을 찌푸린다.
“어허! 그게 무슨 상관이냐! 우리 공주님의 적이라는 게 중요한 것 아닌가, 기사들이여!!”
“그, 그건 그렇죠!”
우렁찬 로베르의 목소리는 벨루치의 능력으로 우리쪽 진영에 흡수된 황군에게까지 닿은 모양이었다.
“영광된 왕국을 위하여!”
“위하여!!”
황군은 ‘제국의 광영’대신 ‘왕국의 영광’을 노래하며 에티모스 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황군과 카렌의 기사들이 물꼬를 튼 길을 따라 도약한 나는 마나로 가짜 병사들을 만들기 시작한 에티모스를 향해 검을 들이밀었다.
채캉-!
분명 빈손인 것 같았는데, 언제 꺼내 들었을지 모를 롱소드로 내 레이피어를 맞받아친다.
끼이익-!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 손잡이가 달그락거리는 금속성의 소리가 허공을 울린다.
캉!
다시 한번 짧게 에티모스를 공격한 나는 내 검, 그러니까 소울마스터인 카렌의 검을 막아 내는 에티모스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황족이었다더니 교양으로 검이라도 배웠나봐. 신관은 검을 들지 않는 게 루엘라드의 교리였을 텐데.”
에티모스는 내 검을 막아 내기 버거운 듯 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서툰 검으로나마 제 몸을 방어하고 있었다.
“아니면, 이 서툰 검술조차 이야기를 통해 만들어 낸 능력이야?”
내 비꼬는 말에 에티모스가 열이라도 받은 듯 숨을 씨근거린다.
“하! 너도 만들어 낸 능력이란 건 마찬가지인 거 아닌가? 카렌의 검술을 습득했을 뿐이면서.”
내 도발에 걸려든 에티모스의 자세가 흐트러진다.
나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에티모스와의 간격을 서서히 좁혔다.
“어차피 원작을 이용한 재주일 뿐이다. 네 본연의 능력이 아니라고.”
“그래. 빌렸을 뿐이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카렌의 능력이든 트리스탄의 능력이든, 에티모스가 뒤에 숨긴 원작 책만 박살 내면 끝이었다.
“네가 만든 등장인물에게 당하는 기분이 어때?”
에티모스가 몸으로 잘 감추고 있던 원작 책을 발견한 나는 부러 그를 자극하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뭘 물어봐? 개 같지.”
나와의 대화에 휘말린 에티모스가 조소하며 제 백발을 쓸어 올린다.
“다른 세계의 영혼이라더니, 건방진 건 여전하군.”
“하지만 지금 이 사태는 전부 당신 업보인걸.”
나는 열이 받은 얼굴로 씩씩거리는 에티모스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야기를 토대로 세계를 창조했으면 자유를 주든가, 자유를 주지 않을 거라면 돌보기라도 했어야 해.”
에티모스는 신의 힘을 빌려 엉망진창으로 세계의 이야기를 꼬아 버린 다음, 차원의 뒤에 숨어 이 ‘이야기’를 방치해 버렸다.
“당신이 만약 신이었어도 직무 유기로 파면당했을걸.”
아이를 돌보는 게 부모의 책임인 것처럼, 이야기를 돌보는 건 창조자의 의무였다.
제 입맛대로 이 세계의 사람들을 책 속 등장인물로 만들어 버린 주제에 책임조차 지지 않으려는 태도라니.
“맞아. 난 황족이었을 때도 너무 게을러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던 거라고 생각하거든.”
순순히 제 잘못을 시인한 에티모스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악.
내가 책을 노리고 있었다는 걸 알기라도 했다는 듯 원작 책을 감싸 안은 그가 짝짝 손뼉을 치기 시작한다.
“대단해. 솔직히 감탄했어.”
원작 책의 코앞까지 다가왔던 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나를 칭찬하는 에티모스를 노려보았다.
“당신 감탄 같은 거 사고 싶지 않아.”
“그래도 여전히 감탄스러운걸. 레오노라, 누군가가 이 지경까지 나를 몰아세운 건 처음이거든.”
에티모스는 진심으로 내가 대단하다는 듯 추켜세우며 이를 드러냈다.
“책에 영혼이 얽매인 나를 파괴하려면 책을 노려야 한다는 걸 바로 알아차린 것도 칭찬해 주지.”
그가 영창을 시작했다는 걸 눈치챈 나는 동시에 마나를 운용하며 검을 바로잡았다.
“초대 황제마저도 나를 이토록 압박하진 못했거든.”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영창을 완성하려는 에티모스의 발목을 자카리의 그림자를 이용해 묶었다.
“허. 또 희한한 꾀를 부릴 모양이지.”
에티모스가 자신에게 달라붙는 자카리의 회색 오러가 귀찮다는 듯 휘휘 팔을 휘젓는다.
나는 자카리의 그림자를 이용해 그의 몸을 더 강하게 옥죄였다.
트리스탄, 벨루치, 카렌, 그리고 자카리. <아.황.장>의 남자주인공과 악녀, 주인공의 기사, 그리고 서브남주의 힘까지 전부 빌린 셈이었다.
마지막은 내 힘으로 끝내고 싶다.
아니, 모든 레오노라의 힘으로.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준 나는 검끝에 아스테르의 힘을 끌어모았다.
교단은 나를 ‘아스테르’라고 불렀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알겠어.’
레오노라가, 원작의 인물들 중 가장 에티모스의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는 영혼이었을 테니까.
비틀린 이 세계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영혼들.
윤회의 궤도에 오르지 못해 방황하는 마나들이 점점이 모여들며 보라색의 거대한 마나구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에티모스, 완벽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몇 번이고 이야기를 다시 쓴 당신의 선택은 완전히 글러먹었어.”
레오노라는 그만큼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고통스러웠기에 다른 세계에서 나를 불러오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을 테니까.
“이야기가 그만큼 반복되는 동안 우리도 강해졌거든.”
이야기를 거부하는 동안 레오노라의 영혼은 스러지고 말았지만, 나는 마치 그녀가 내 등 뒤를 단단히 지켜 주고 있으리란 느낌을 받았다.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고, 가족들을 지키려고 아등바등 애를 쓴 우리들이, 네 힘을 넘어설 정도로 커져 버렸다고.”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에티모스가 내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든다.
“우리?”
“그래, 우리.”
나는 에티모스를 향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치켜들었다.
“당신 때문에 이 세계에 버려진 별들이 말이야.”
부우웅.
허공에 떠오른 거대한 마나구가 그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