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245)화 (480/486)

제245화

“레오노라, 피하거라!”

사나운 비명만 내지르는 나를 끌어안아 뒤로 보낸 가스파르가 단단히 검을 붙든 채 앞을 노려본다.

아이네스가 만들어 낸 거대한 고리 속에서 홀쭉한 인영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안녕.”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인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아, 인사할 분위기가 아니었네.”

인영은 스스로를 소개하지 않았지만, 남자인지 여자인지 애매모호한 이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선구자 에티모스.

여신 알라테이아의 자식이자 여신 루엘라를 배신한 첫 번째 신관.

“다들 싸우는 중인 모양이야. 가만 보자, 루엘라드의 성기사들이 보이지 않는 걸 보아하니 성마대전은 아닌 것 같고…….”

작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 나를 발견한 그가 빙긋 미소짓는다.

“아, 레오노라였구나. 오랜만이다.”

마치 이 진탕의 원인이 나라는 것을 확신한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내게 부드럽게 손을 흔드는 에티모스를 노려보다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난 당신 몰라.”

“모를 만도 하지. 너는 기실 나를 만날 일이 없도록 설정된 인물이니까.”

재수 없을 정도로 방글방글 웃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가셨다.

백색 머리칼, 마주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샛노란 금안을 번뜩이며 내게 저벅저벅 다가온 에티모스가 내 턱 끝을 들어 올린다.

“넌 내가 강림하기 전에 죽어야 마땅했다, 레오노라 에스트렐라 드 하차니아.”

“……뭐?”

“네 이야기는 진즉 끝났어야 했다고.”

나는 에티모스가 지척에 다가오고 나서야 그가 품에 안고 있는 물건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이네스가 수많은 회귀를 반복하며 얻어 낸 ‘원작’들.

에티모스가 들고 있는 책은 그중에서도 가장 낡아 겉표지가 뜯겨나가기 직전이었다.

‘너무 낡아서 책에게 지친 느낌을 받을 줄이야.’

“그래, 눈치챘구나. 이 책이 너와 아이네스가 말하는 모든 원작의 원본이자 시발점이지.”

내가 자신의 책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에티모스가 빙긋 웃으며 뒤로 물러난다.

‘책을 공격하면 되는 거구나.’

내가 딱히 공격하려는 의사를 보이지도 않았는데도 책을 보호하려는 자세에서 나는 그 낡은 원본이 그의 약점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모여라, 적랑의 기사들이여!”

그 사실을 눈치챈 이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내 뒤에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여념이 없던 에녹이 높이 검을 치켜 든다.

“내 기사들을 마치 제 수족 부리듯 부리는군.”

언제 우리 진영에 돌아왔는지 모를 트리스탄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에녹을 따라 검을 들었다.

“전원, 자세를 바로 갖춘다!”

트리스탄의 명령에 흩어졌던 기사와 병사들이 황군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황성에 들어설 때만 해도 압도적인 수로 우리를 압박했던 황군은 이제 반의반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오빠들이 얼마나 대단한 기사인지 새삼 느끼게 되네.’

고작 엑스트라 악당의 설정값을 쥐고 태어난 이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발군의 성장이었다.

‘그게 다 내 덕분이지만. 움후후.’

오빠들 몰래 옆구리에 손을 얹은 채 음흉하게 웃음 지은 나는 든든한 가스파르와 루카스를 양옆에 낀 채 에티모스를 올려다보았다.

“그 책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라고.”

“그래.”

몰려드는 기사의 물결과 이지를 잃은 것처럼 비명만 내지르는 아이네스를 번갈아 바라본 에티모스가 짧게 한숨을 내쉰다.

그는 자신에게 불리해보이는 현 상황에도 전혀 위축된 모습이 아니었다.

“성마대전 직후였나, 아, 나의 사랑하는 알레테이아는 악(惡)이 아니었으니 내게는 성마대전이 아니었지만, 후세에서 그리 부르더군. 감히 나의 알레테이아를 악신이라 칭해.”

나는 이를 바득 가는 에티모스의 말에 케케묵은 이 세계의 신화를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제국의 건국 신화는 여신 루엘라의 도움을 받아 대륙 전쟁에서 승리한 초대 황제의 이야기였다.

그의 가장 악독한 적이었던 왕제는 악신의 아들이라고 불리었는데, 그 이야기 속 악신이 알레테이아였던 모양이다.

물론 알레테이아가 악신이라 불린 것은 성마대전에서 패배했기 때문이겠지만.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황제에게 패배했다. 병사들을 잃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도망쳤지.”

성서에 등장하는, 알레테이아의 모든 교인들을 이끄는 상징적인 존재일 에티모스가 초대 황제와 대적했던 자라니.

나는 언젠가 알레테이아의 성전에서 목도했던 초상화 속 에티모스의 자애로운 얼굴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패배한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인간들은 죽고 말았고, 나는 쉽게 고립되었다. 알레테이아를 위해 루엘라를 배신했기에 돌아갈 자애로운 여신의 품도 잃어버리고 만 상태였지.”

에티모스가 초대 황제의 동생인 왕제였다면, 그는 본디 여신 루엘라를 섬기는 사람이었어야 했다.

나는 제국의 국교가 루엘라드교임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떠는 에티모스를 바라보았다.

“알레테이아는 나를 사랑했으니까 내 외로움을 잊게 해 주고 싶어 했어.”

“그래서?”

뒷이야기를 묻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느릿느릿 말을 잇는 에티모스를 추궁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에티모스.”

교단의 현자이자 에티모스의 부활을 완성시킨 장본인인 아이네스조차 처음 듣는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그녀가 두 눈을 희번득 뜨며 추궁하자 에티모스는 조금 머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만약에’를 전제하에 이야기를 만들었고, 알레테이아는 자신의 모든 권능을 쏟아부어 그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어 주었지.”

톡톡.

에티모스의 기다란 손가락이 너덜너덜한 책의 표지를 두드린다.

“만약에 내가 형에게 지지 않았더라면… 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금방 끝났어.”

초대 황제를 언급한 에티모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경악한 얼굴의 아이네스를 바라보았다.

“사실 내 이야기는 쓸 게 많이 없었거든. 내 인생이 워낙 단조로웠어서 말이지.”

“그래서, 누구 이야기를 썼는데?”

“내 딸의 딸, 그리고 그 아들의 아들, 그리고 그 딸과 친구의 이야기였지.”

에티모스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지만 아이네스는 그가 자신에게 고함이라도 지른 것처럼 이를 깍 깨문 채 몸을 떨었다.

“아이네스의 이야기를 쓴 인간이 너라고.”

“그래.”

순순히 나오는 에티모스의 시인에 아이네스는 오러구를 생성한 채 에티모스에게 달려들었다.

검붉게 타오르는 그녀의 마나는 그의 지척에 닿는 순간 전부 사그라들고 말았지만.

“왜 말하지 않았지? 네가 이 빌어먹을 원작을 써 낸 장본인이라고,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아이네스는 에티모스 앞에 몸을 옹송그린 채 발악했다. 귀를 찢을 것 같은 그녀의 날카로운 외침에도 무심하게 턱을 짚은 에티모스가 천천히 입술을 벌린다.

“원망하리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뭐?”

“날 원망해서 세계의 시간선을 꼬아 버린 대가로 차원에 갇혀 버린 나를 부활시키지 않을 수도 있잖아.”

에티모스는 절규하는 아이네스를 힐끔하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이 걸어 나온 문을 가리켰다.

“나도 저 안에서 무척 지겨웠거든. 알레테이아 말고는 그 누구와도 교류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는 무구한 얼굴로 무너진 아이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수많은 회귀를 반복해 미치고 말았으니까. 가여운 나의 주인공아.”

“……미친놈.”

그들의 대화를 듣던 나는 아이네스가 그의 발등이라도 찍어 버리길 바랐지만, 그녀는 무너진 채 파도에 침잠한 불순물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순전히 제 불행을 견디지 못하고 신의 힘을 빌려 세계의 질서를 꼬아 버린 죄를 자백하는 건가?”

나는 말이 없는 아이네스를 대신해 에티모스를 노려보다 코웃음을 쳤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그래. 하지만 그 대가로 차원의 감옥에서 정말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에티모스는 아이네스를 지나쳐 내게 다가오며 손을 번쩍 들었다.

“수많은 아이네스가 나를 꺼내기 위해 노력했지. 하지만 번번이 그녀를 가로막은 건 너였다, 레오노라.”

“네가 이런 끔찍한 인간이라는 걸 과거의 나도 알았던 모양이지.”

나는 허리춤에서 반짝이는 바주카포를 꺼내 들며 짜증스러운 신음을 삼켰다.

“이딴 걸 선구자라고 믿고 있는 교단원들이 가여울 지경이야.”

“믿어 달라고 한 적 없다. 멋대로 나를 추앙한 건 인간들이야.”

에티모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제 등 뒤로 비치는 빛을 한 손에 모으기 시작했다.

“너는 원래 죽었어야 했어. 네가 지금 소멸하는 건 이 세상의 순리이자 이치다, 레오노라.”

쿠쿠쿵-.

그의 손안에 그 어떤 신관과도 비교할 수 없을 성력이 모여들기 시작했지만, 나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바주카포의 방향을 조정했다.

“그딴 순리, 너나 지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