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244)화 (479/486)

제244화

‘모든 회차의 아이네스라고?’

회귀를 반복하며 그녀의 영혼이 쪼개지기라도 했다는 걸까.

“레오노라, 피해야 해!”

에티모스 부활을 위한 연성진 감시를 맡겼던 에녹이 공중에 떠오른 아이네스를 멍하니 지켜보는 나를 끌어안았다.

“연성진 구축이 시작됐어. 여기 있다간 너도 휘말릴 거야.”

나는 초조한 듯 입술을 짓씹는 에녹을 올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도망갈 수는 없어. 아이네스를 막아야 하니까.”

“저런 괴물을 어떻게 막겠다는 거야.”

내 단호한 말에 아이네스를 힐끔한 에녹이 제 앞머리를 쓸어 올린다.

그의 말마따나 폭풍의 눈처럼 마나 속에 갇힌 아이네스의 고요한 얼굴은 인간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연성진의 제물로 희생될 사람들을 모른 척하고 도망갈 수는 없어.”

에티모스가 부활하게 되면 이 거대한 제국에 발을 디딘 모든 사람의 영혼이 제물로 쓰이게 될 터였다.

에녹은 고개를 젓는 내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내리쳤다.

“……너만, 너라도 피하라는 말이야.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게.”

그의 덧없는 약속에 내가 입꼬리를 비틀자, 그는 어릴 때처럼 호언장담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 못 믿어?”

“응. 못 믿겠어, 에녹.”

내 말에 입술을 삐죽인 에녹이 손을 휘둘러 적랑을 소환했다.

“나와 적랑이 감시하던 마나는 이 정도 규모의 연성진을 발동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어.”

짧게 설명하는 그의 뒤로 붉은 검을 든 기사들이 도열한다.

“준비되지도 않은 진을 움직였으니 어차피 부활 의식은 실패할 거라고. 막는 것 정도는 적랑에게 맡겨.”

나는 어떻게든 나를 위험에서 떨어뜨리려는 에녹을 바라보다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내 시선을 따라 아이네스를 향해 고개를 돌린 에녹이 흠칫 몸을 떤다.

허공을 밟고 선 아이네스 주위를 책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으니까.

‘아이네스는 분명 모든 회차의 자신을 소환하겠다고 했지.’

그 말은 그녀가 반복한 서른세 번의 삶에 존재하는 모든 아이네스의 힘을 모으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싶었지만, 같은 삶을 반복한 아이네스는 대마법사인 루카스에 필적하는 방대한 지식이 있는 게 분명했다.

“에녹, 내가 아이네스를 막아야 해. 내버려 두면 정말 위험해질지도 몰라.”

지금 이 상황에 아이네스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에녹이 아닌 나였다.

“내가, 희생을 해서라도-”

결연하게 중얼거리는 순간,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가볍게 툭 건드린다.

“어린애가 희생처럼 무거운 단어를 입에 담는 게 아니다.”

쓰다듬는 것처럼 느껴지는 다정한 손길에 몸을 틀자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

“위험하니 애들은 물러나 있어.”

루카스를 어깨에 얹은 아빠는 에녹과 나를 한 손으로 물리며 검을 빼 들었다.

카캉-!

그림자로 이루어진 아빠의 검신이 아이네스를 둘러싼 보호막을 조각내기 시작했다.

쩌적- 쩍.

에녹 휘하의 기사들은 접근할 엄두도 못 내던 보호막이 갈라지자 그 틈 사이에 끼어든 루카스의 손에 대마법사다운 무시무시한 마나가 모여든다.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아이네스.”

루카스의 건조한 목소리에 아이네스가 천천히 눈을 뜬다.

“오랜만이에요, 공작님. 그리고 선황자님.”

아이네스는 그제야 루카스와 가스파르를 발견했다는 듯 빙그레 웃어 보였다.

“선황자님은 특히 아주 우스운 꼴을 하고 계시네요.”

루카스는 아이네스의 비꼬는 말을 듣지 못한 척하며 그녀를 감싸고 있는 책들을 가리켰다.

“다른 차원의 세계에 간섭하는 마법이겠지. 이런 짓을 감행했다간 네 영혼이 가루조차 남지 않고 파괴될 거다. 너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구축하는 마나 전부가 사위어들 테니까.”

“여태 아이네스의 말을 어떻게 들으신 거예요?”

아이네스는 루카스의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 세상이 먼지가 되어 버리는 게, 아이네스가 바라는 거예요.”

루카스와의 대화를 끝낸 아이네스가 다시금 영창을 시작하자 책들의 수가 곱절로 늘어나 버렸다.

“…경고를 해도 듣지를 않는군.”

쾅!

콰쾅, 쾅!!

루카스의 마나로 이루어진 빛무리가 아이네스를 공격했지만, 그녀는 그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책을 소환하는 짓을 그만두지 않았다.

“……에녹, 혹시.”

대지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기운에 에녹을 돌아보자, 그가 어두워진 얼굴로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 제국 전체에 깔린 연성진이 요동치고 있어. 에티모스라는 초월자의 부활이 정말로 시작될지도 몰라.”

나는 에녹의 대답에 루카스와 대적하는 아이네스에게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에티모스가 부활하면 모든 게 끝이야.’

알레테이아의 성서에 따르면 신의 사랑을 받는 선구자인 그를 부활시킨 사람에게는 단 한 번의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절대자의 무조건적인 호의.

그 막강한 소원의 힘을 아이네스는 이 세계를 없애 버리는데 사용할 테니까.

카캉-!

아빠와 루카스가 벌린 틈 사이로 바주카포의 마탄을 쏟아붓자 아이네스가 발악하듯 목소리를 높인다.

“왜 방해하는 거야? 레오노라, 넌 내 친구였어! 그게 정해진 네 역할이라고!!”

“당연하잖아. 더는 네게 이용당하고 싶지도, 죽고 싶지 않으니까.”

짧게 대꾸한 나는 마탄으로 책 한 권을 박살 내며 연기가 폴폴 나는 바주카포의 방아쇠를 다시금 잡아당겼다.

“네가 이 삶을 죽어도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을 알아?”

그러자 아이네스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분에 찬 얼굴로 나를 노려본다.

“나 혼자만! 나 혼자만 미래를 알고 있는 세상을 견뎌야 하는 고독감을 아느냐고!!”

나는 절망으로 얼룩진 아이네스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없애지 않고 네 회귀를 끊어 낼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어.”

루카스와 나, 아이네스가 힘을 합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였다.

‘물론 루카스를 설득해야겠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나와 아이네스의 사이를 벌리기 위해 마구잡이로 마법을 영창하는 그를 힐끔했다.

“가능성은 충분해. 지금이라도 모든 걸 그만둔다면 내가 널 도울게.”

그러나 아이네스는 내 제안에 입꼬리를 비죽 올릴 뿐이었다.

“……아이네스가 왜 그래야 해?”

“뭐?”

“여태 아이네스만 괴로웠는데, 마지막까지 아이네스만 괴로운 사람으로 남는 건 싫어.”

어린아이처럼 도리도리 고갯짓을 친 아이네스가 두 팔을 번쩍 올리며 내 마탄에 찢어진 책들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너희도 겪어 봐야 해. 레오노라, 이젠 네 차례야.”

나는 책들 사이사이를 꿰어 내기 시작한 금색 밧줄에 미간을 좁혔다.

당장 정체를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한눈에 봐도 위험한 고리라는 건 느낄 수 있었으니까.

“에티모스가 나를 위해 열어 줄 새로운 세계는, 네가 반복할 삶이 끝없이 이어진 세계야.”

막을 새도 없이 공중을 밟고 도약한 아이네스가 내 팔뚝을 우악스레 붙잡는다.

“영혼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쇠약해진 정신에 누군가의 발이라도 핥으며 이 모든 걸 끝내고 싶어질 때까지.”

귓가에 속삭이는 아이네스의 목소리가 점점이 흩어졌다.

“잘 견뎌 봐, 레오노라.”

아이네스의 힘에 의해 부웅 뜬 내 몸이 원을 그리는 책들 속에 던져진 순간이었다.

“레오노라!!!”

나는 나와 검은 허공 사이를 막아선 자카리의 행동에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라버니?”

“그렇게 부르지 마라. 난 너와-”

‘여전히 기억을 못 찾았구나.’

나는 나를 몰라보는 자카리를 노려보며 새초롬히 입을 삐죽였다.

“가족 맞아요.”

그러자 내 얼굴이 귀엽다는 듯 피식 웃은 자카리가 내 볼을 툭툭, 건조한 손길로 쓰다듬는다.

“그래, 넌 내 가족이지. 하지만 난 네 가족이 될 자격이 없다.”

나는 자카리의 무덤덤한 목소리에 허공을 꿰고 있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널 외면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자신을 붙잡는 나를 뿌리친 자카리가 천천히 입술을 벌린다.

“나는 네겐 늘 부족한 오빠였지. 이번에도, 수없이 반복한 어리석은 삶 속에서도.”

나는 어쩐지 마지막 인사처럼 들리는 그의 말에 허둥지둥 고개를 저었다.

“부족한 적 없어요.”

“나를 전쟁터로 내몬 아버지를 원망해 왔다. 내가 내 오러를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강행한 결정인 것을 이해하면서도, 그랬어.”

서둘러 부정하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카리의 몸이 서서히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내가 그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는 요령 좋게 내 손길을 피하며 허공을 뒤로 물렸다.

“그래서 죽어 가는 너를 외면하고 아이네스를 선택했었다. 복수하고 싶었으니까.”

이미 반쯤 허공에 잠긴 자카리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잠겨 온다.

“지금의 이 결정은 내 모든 잘못된 선택의 책임일 뿐이니…….”

나는 그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심장이 쿵 가라앉아 입을 벌렸다.

“울지 마.”

사아아-.

나는 자카리를 집어삼킨 거대한 어둠이 흩어지는 소리에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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