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화
나는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히스의 고요한 눈가에 손을 얹었다. 언뜻 차분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파도가 결코 얕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말았으니까.
“제가 갑자기 왜 모습이 바뀌었는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하셨습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죄라도 고해하듯 절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인님을 안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를 만지고 싶다고 생각한 게 무척 끔찍한 일이라는 것처럼.
절망하듯 제 두 손에 작은 얼굴을 파묻은 히스가 느릿느릿 말을 잇는다.
“솔로아 공작처럼, 주인님께 주저 없이 구혼서를 내미는 버러지 새, 아니, 영식들처럼. 감히.”
나는 그런 히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벙긋했다.
“저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 감히 그런 욕망을 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 때문에 어른이 되었다는 소년에게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 * *
결국 트리스탄에게서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자카리도 트리스탄도 아이네스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 같은데…….’
“원작 책이 아티팩트라면 도대체 무슨 원리로 작동하는 걸까?”
초조한 입술을 짓씹으며 방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나를 루카스가 한숨과 함께 붙잡는다.
“설명해 줄 테니 좀 앉아.”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소파에 주저앉은 나는 얌전히 귀를 쫑긋 세웠다.
“이 세계에 속한 마도구라면 마나의 영향을 벗어날 수 있을 리 없다.”
“그건 알아.”
“황녀, 아니, 이제 황제인 그 여자의 마나에 더 많이 노출된 인간일수록, 그리고 네가 말하는 그 책이라는 것과 크게 연관이 있을수록 정신 지배가 쉬웠을 거다.”
나는 루카스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엘릭서를 찾기 위해 행방불명되었던 자카리와 남자주인공인 트리스탄을 조종할 수 있게 된 거야.’
자카리는 원작의 흐름대로 엘릭서를 찾는 중이었고, 트리스탄은 말 그대로 원작의 주연이었으니까.
“그래서, 루카스는 구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해?”
잔뜩 긴장한 내 물음에 루카스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진다.
“네가 추측한 대로라면 황제가 휘두르는 마도구는 흑주술에 가까울 테니까. 트리스탄과 자카리는 일종의 저주에 걸린 상태라고 보는 게 맞을 거다.”
나는 루카스의 대답에 반쯤은 희망에 차고 반쯤은 희망을 잃은 애매모호한 얼굴을 했다.
“그럼 푸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시전자인 아이네스가 직접 저주를 풀어야 한단 뜻이잖아.”
“그래.”
나는 루카스의 무심한 대답에 인상을 찡그렸다.
‘대마법사라더니 도움이 하나도 안 되네.’
그런 내 얼굴을 흘깃한 그가 기가 막히다는 듯 작게 헛웃음을 짓는다.
“내가 쓸모없다는 눈빛이군.”
짧게 혀를 찬 루카스는 성격 안 좋은 미남 티를 팍팍 내며 내 이마를 꾹 눌렀다.
“아예 방법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는데.”
“그럼 있어?”
루카스가 그제야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피식 웃는다.
“잘 들어. 네 역할이 중요하니까.”
* * *
“네가 무슨 일이야? 아이네스를 먼저 찾아오고.”
나는 내 방문이 놀랍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이네스를 향해 단호히 입을 열었다.
“자카리 오라버니를 돌려줘.”
고집스러운 내 입술을 흘깃한 아이네스가 어깨를 으쓱한다.
“싫어. 그는 아이네스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야.”
단상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아이네스를 마주한 나는 바싹 메마른 입안을 감추기 위해 꿀꺽 침을 삼켰다.
“자카리 오라버니가 너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그래. 그는 애초부터 네 것이 아니었는데 어째서 욕심을 부리는 건지, 아이네스는 이해를 못 하겠어.”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말투를 버리지 못한 아이네스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몸이 자라지 않던 히스와 조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이쪽은 몸이 아니라 정신이 자라지 않는다는 게 다르겠지만.’
“미안하지만, 나는 자카리 오라버니를 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
“그럼 왜 아이네스를 방해하는데?”
나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는 아이네스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카리 오라버니가 네 것이 되는 건 아니니까.”
내 말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입술만 달싹이던 아이네스는 결국 말을 돌려 버렸다.
“……저번부터 말이 짧네.”
내 앞에 바짝 얼굴을 들이민 아이네스가 언짢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내 이마를 툭 밀었다.
“왕국을 세워 공주 자리에 앉았다고 하찮은 네 본질이 바뀌기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
“넌 결국 엑스트라야. 내 발끝이나 핥을 수밖에 없는 하찮은 엑스트라.”
“……그 하찮은 나를 이기지 못해 늘 전전긍긍했던 건 너잖아, 아이네스.”
나는 무감한 얼굴로 아이네스를 바라보다 품 안에 숨기고 있던 ‘원작 책’을 꺼내 들었다.
“여기 다 나와 있던데.”
“그, 그건!”
생각지도 못한 원작 책의 등장에 아이네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그 책은 그때 분명 찢었어! 어떻게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거지?!”
나는 아이네스의 반응에 티 나지 않게 속으로만 쾌재를 불렀다.
‘루카스 말대로 동요하는구나.’
역시 원작 책을 매개로 자카리와 트리스탄을 조종하는 게 분명했다.
“내놔, 이 도둑년.”
파슷.
당황한 아이네스가 내게서 책을 빼앗기 위해 팔을 뻗었지만,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원작 책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그녀를 거부했다.
“돌려받고 싶다면 자카리 오라버니부터 풀어 줘.”
나는 애완동물을 쓰다듬듯 책을 토닥이며 나를 노려보는 아이네스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책을 이용해 에티모스를 부활시킬 계획이었을 테니,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책과 똑같은 원작 책을 내가 가지고 있는 건 무척 곤란한 일일 터였다.
“자카리 오라버니를 돌려주기만 하면 돼. 엘릭서도 네가 가져도 괜찮아.”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입에 담으며 아이네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엘릭서를 가져오는 용도가 아니면 아이네스 네게는 쓸모도 없는 사람이잖아.”
내 차분한 말에 귀를 기울이던 아이네스가 순간적으로 인상을 찡그린다.
“……아니, 쓸모 있어.”
책에 정신이 팔린 듯 이성을 잃었던 그녀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내 뺨에 손을 얹는다.
“네가 이렇게 애달픈 얼굴을 하잖아, 레오노라.”
나는 그녀의 나긋한 목소리에 소름이 끼쳐서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내가 품에 안고 있는 원작 책을 힐끔한 아이네스가 제자리에 붙박인 듯 선 채 징그러울 정도로 크게 웃는다.
“아이네스는 그게 무척 재미있거든. 네가 괴로워하는 거.”
그녀의 말은 마치 내 슬픈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게 무슨-”
아이네스의 속내를 캐묻기 위해 내가 입을 벌린 순간, 번쩍 손을 든 아이네스가 뒤를 돌아본다.
“그렇게 자카리를 돌려받고 싶다면 알아서 한번 가져가 봐, 레오노라.”
장난치는 어린아이처럼 개구지게 웃은 아이네스는 나를 조롱하듯 자카리와 트리스탄을 소환했다.
“자카리, 트리스탄!!”
나는 우리 앞에 소환된 남자 둘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둘 다 눈빛이 어두워.’
이지를 잃은 사람 특유의 흐리멍덩한 눈빛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레오노라가 아이네스의 보물을 훔쳐 갔어. 반드시 탈환해!”
아니, 반드시 탈환해야 하는 건 내 쪽이었다.
보물들을 훔쳐 간 건 내가 아니라 아이네스 쪽이었으니까.
“네, 폐하.”
“알겠습니다.”
아이네스의 명령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자카리와 트리스탄이 각자 제 검을 뽑아 든다.
스릉.
날카롭게 빛나는 검이 내 목 끝을 노리기 시작한다.
바닥을 도약해 튀어나간 나는 자카리의 흑색 검을 피하며 내가 애용하는 총을 꺼내 들었다.
“오라버니, 오랜만이에요.”
내 말에 대답 없이 고개를 돌린 자카리가 휙, 검기를 날렸지만 나는 진즉 방어막으로 내 몸을 에두른 상태였다.
콰카캉-!
오러와 방어막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쟁쟁하게 울렸지만, 나는 자카리처럼 표정 한 번 바꾸지 않고 자카리와 트리스탄에게 번갈아 총구를 겨눴다.
“트리스탄도 황성에서 보니까 느낌이 색다르네.”
내 존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 바주카포의 위력은 기억하는 듯 자카리와 트리스탄이 동시에 몸을 움찔한다.
“자, 그럼 둘 다 머리 조심하세요.”
나는 두 눈을 느릿느릿 깜박이는 남자들을 향해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조종당하고 있다고 봐줄 생각 같은 거 안 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