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0화
“트리스탄, 오늘은 예감이 좋지 않구나. 집에서 쉬는 게 좋겠다.”
상아로 쌓아 올린 백색의 성.
윌레닌 제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찬란함 앞에 멈춰 선 트리스탄은 자신의 입궁을 만류하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황명이라 어쩔 수 없다는 걸 아시지 않으십니까.”
트리스탄의 말에 그의 어머니는 몸이 안 좋은 것 같다, 날씨가 흐리다 등 이유를 덧붙였지만 그를 더 막아 서진 못했다.
“폐하의 명을 이유 없이 거부했다가는 영민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습니다.”
트리스탄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는 솔로아의 사람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왜 이토록 갑작스레 입궁을 명하신 걸까.’
물론 트리스탄으로서도 딱히 입궁하라는 명이 기꺼운 것은 아니었다.
트리스탄은 아이네스와 딱히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아이네스는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는 트리스탄을 기이하게 바라보곤 했었다.
마치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꼭두각시 인형을 보는 듯한 시선이라 트리스탄은 아이네스를 마주하는 일이 늘 불쾌했다.
하나 남몰래 노스 왕국과 교류한 탓에 현재 솔로아 공작가는 5대 귀족을 대표하는 명문가이면서도 중앙 귀족들의 눈 밖에 나고 만 상황이었다.
‘황제의 눈 밖에 나는 건 최대한 피해야겠지.’
시종의 안내를 따라 알현실에 들어선 트리스탄은 아이네스를 발견하고 그녀의 발아래 무릎 꿇었다.
“격조했습니다, 폐하.”
무뚝뚝하면서도 정중함이 묻어 나오는 트리스탄의 중저음에 아이네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
그녀가 앉은 채로 턱을 까닥인다.
“정말 격조하긴 했어, 트리스탄.”
제국의 공작을 마치 친구 대하듯 이름으로 부르는 태도가 여전했다. 기다랗게 내려온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휘휘 돌린 아이네스가 발랄하게 입을 연다.
“너무 오랜만이라 아이네스, 트리스탄 얼굴 전부 까먹을 뻔했거든.”
묘하게 비꼬는 투였다.
“트리스탄은 아이네스가 보고 싶지도 않았어?”
아이네스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표정을 굳힌 트리스탄을 흘깃한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조소를 흘린다.
“왜. 공작이라고 불러 주지 않아서 불쾌한가?”
“아닙니다.”
아이네스는 단호한 트리스탄의 대답을 한 귀로 흘리며 그의 잘생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스윽.
아이네스의 손끝에 걸린 트리스탄의 날카로운 턱이 위로 들린다.
“그래. 아이네스가 기억하는 얼굴과 다르지 않아.”
“……네?”
“틀림없이 트리스탄 솔로아-굴렘이지, 너는. 솔로아 공작가의 젊은 가주이자 사계절의 검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소울나이츠.”
자신의 이름과 유명세 정도는 트리스탄도 알고 있었지만, 아이네스는 설명조로 말을 이었다.
“무뚝뚝하지만 제 사람에게는 헌신적인,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의 남자주인공이랄까.”
어쩐지 조금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들어 올린 그녀는 내팽개치듯 트리스탄을 놓아주었다.
“나는 여자주인공이면서 어떻게 남자주인공을 빼앗겼담.”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이라니.
마치 자신들이 어느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도 된다는 듯한 말투에 트리스탄이 의아한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야.”
그러나 트리스탄의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아이네스는 발랄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돌렸다.
“요즘 아이네스는 트리스탄 얼굴만 봐도 화가 나지만, 오늘까지만 봐줄게. 트리스탄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고.”
휘익, 아이네스가 허공에 손을 휘두르자 허공에 작은 워프가 생성되었다.
“인물들은 아무렇게나 움직여도 이런 설정은 변하지 않는 것 같거든.”
“이건…….”
트리스탄은 빨려 들어갈 것처럼 깊고 어두운 구멍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나무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엘릭서입니까?”
엘릭서를 찾기 위해 에녹이나 실비처럼 사방팔방, 대륙 곳곳 안 뒤진 곳이 없는 트리스탄이었다. 진짜 엘릭서를 단번에 알아보는 그의 눈썰미에 아이네스는 재미있다는 듯 비식 웃었다.
“맞아. 엘릭서는 원래 거대한 엘리아 나무의 수액으로 만들어진 보석이거든. 무슨 병이듯 낫게 해 주는 영약이라 사람들이 멋대로 액체나 환일 거라고 상상할 뿐이지.”
이공간에서 엘리아 나무 밑동을 꺼낸 아이네스는 그녀가 자신에게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하듯 잘생긴 미간을 찌푸린 트리스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 성목(聖木), 엘리아를 벨 수 있는 건 솔로아 공작가에서 대대로 지키고 있는 보검뿐이야.”
아이네스의 예쁜 입술이 조근조근 제게 설명을 늘어놓는다. 트리스탄은 제 허리춤에 걸린 보검을 무심코 매만지며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누가 가져온 겁니까.”
황제의 명을 받들어 엘리아 나무를 베기 전에, 그는 나무의 출처를 먼저 입에 담았다.
“이 엘릭서를 폐하께 대령한 이가 누구입니까.”
“이제 와서 그게 궁금해?”
트리스탄의 물음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네스가 그를 비웃듯 턱을 치켜세웠다.
“자카리.”
그녀의 부름에 알현실 구석에서 남자 한 명이 천천히 걸어 나온다. 젊은 가스파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제 부친을 똑 닮은 사내였다.
“경은 오랜만에 보는 거겠지?”
“……그에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아 허무 그 자체인 자카리의 눈빛에 의구심을 느낀 트리스탄은 눈살을 찌푸렸다.
게다가 자카리는 원래 자신의 동생인 레오노라를 위해 엘릭서를 찾으려고 했었다.
“아이네스가 나쁜 짓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말하네.”
“자카리 경에게 주술이라도 거신 겁니까?”
“그가 순리대로 살 수 있게 했을 뿐이야.”
트리스탄의 비난에 서늘하게 대답한 아이네스가 번쩍 손을 든다.
“이제는 네 차례고, 트리스탄.”
악귀처럼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에 흠칫 놀란 그가 뒤로 물러나는 순간, 그녀는 검은 책을 품에 안은 채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인살라.”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 * *
룰루가 성년을 맞은 나를 위해 내로라하는 정원사를 불러 모아 가꾼 봄의 정원은 거닐기만 해도 피로가 씻길 만큼 아름다웠다.
쿵!
그녀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던 나는 지면이 울리는 기묘한 소리에 뒤를 돌았다.
“룰루, 지금 무슨 소리 안 들렸어?”
쿠구궁-.
“글쎄요. 전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조금 더 선명하게 내리꽂히는 감각에 룰루에게 캐물었지만, 신체를 단련하지 않은 그녀가 느끼기엔 너무 미세한 소리였는지 룰루가 갸우뚱 고개를 기울인다.
“땅이 무너지는 소리 같아. 첨탑을 지키는 경비에게 가 봐야겠어.”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다급히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공주님! 흑랑! 흑랑입니다!!”
왕성 친위대로 선발된 낯익은 기사 한 명이 정원 입구에 허둥지둥 들어서며 목소리를 높인다.
“흑랑의 기사들이 외성을 뚫고 내성에 모여들었습니다!!”
나는 다급한 남자의 말에 눈썹을 모았다.
흑랑이라니.
간만에 듣는 소리가 반가웠지만, 이제는 들을 일이 없는 이름이기도 했다.
“자카리가 실종된 후 흑랑은 자연스럽게 해체됐잖아. 그들이 왕국을 위해 다시 모이기라도 했단 말이야?”
자카리 직속 휘하 기사단이었으니 제국이 아니라 왕국을 위해 힘을 써 줄 거라는 내 기대가 안타깝다는 듯, 기사의 얼굴이 흐려진다.
“그, 그런 게 아닙니다, 공주님.”
“응?”
“흑랑의 전 부대장이었던 우르시 슐레만이 기사들을 이끌고 왕국에 쳐들어왔습니다.”
나는 남자의 설명에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우르시 슐레만…….’
자카리가 흑랑을 이끌 적에 부대장을 맡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왜 왕국을 공격한다는 말인가.
“안내해. 내가 직접 대응할 테니.”
잔뜩 굳은 기사를 따라 내성과 맞닿은 도개교에 당도하자, 나를 발견한 우르시 슐레만이 천천히 투구를 벗는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아니, 이제는 공주님이셨나요?”
“슐레만 경, 이 무슨 무도한 짓인가요.”
“죄송합니다, 공주님.”
내게 꾸벅 고개를 숙인 우르시 슐레만이 거대한 검을 허공에 치켜든다.
“저는 대장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서요.”
나는 우르시의 변명 아닌 변명에 인상을 찌푸렸다.
“대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흑랑의 대장이라면 자카리였고, 그는 현재 실종 상태였으니까.
‘게다가 실종된 그가 돌아온다고 해도 내가 아니라 아이네스의 편에 설 리가 없잖아.’
어안이 벙벙한 내 얼굴이 안쓰럽다는 듯 흘깃한 우르시가 반보 물러난다.
그 뒤로 드러나는 매끈한 얼굴에 나는 기함하듯 입을 벌렸다.
“자카리……?”
실비나 에녹만큼 친숙하진 않았지만, 그만큼은 애타게 그리워했던 얼굴이었다.
“자카리 오라버니, 맞아요?”
턱 끝이 덜덜 떨려 와서 주먹을 꼭 쥐고 묻는 내게 그의 불투명한 시선이 스르륵 내려앉는다.
“레오노라 에스트렐라 드 하차니아.”
쿵.
내 이름을 무심히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모르는 사람을 호명하듯 무감동했다.
“내가 폐하께 가져다 바칠 목의 이름이다. 누군지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