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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238)화 (473/486)

제238화

“빚잔치를 위해 마련한 자리예요.”

느긋하게 이어지는 내 말에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진다.

“……빚잔치? 그게 뭐지?”

윌레닌 제국은 기본적으로 평민이 재산을 축적하기 힘들게 만들어진 철저한 중앙 집권제로 운영되는 나라였다.

평민뿐이랴, 귀족도 자신의 사유 재산을 스스로 관리할 뿐 금융에 대해서는 얄팍한 지식조차 전무했다.

‘내가 노스 은행을 설립하기 전까지 제국에 존재하는 제1은행, 제2은행이 전부 황실에서 운영하는 은행이었으니 말 다 했지.’

“채무자가 빚을 갚을 능력이 없을 때, 돈을 받을 사람, 그러니까 여기선 저겠죠?”

나는 내 말을 쉬이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친절히 종이에 그림까지 그려 주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채권자인 제게 여러분의 남아 있는 재산을 빚 대신 내놓고 빚을 청산하는 자리라는 뜻이랍니다.”

내 명랑한 목소리에 아까부터 내게 시비를 걸던 마샬 백작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진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니! 난 폐하께 친히 백작위를 하사받은 고위 귀족이네!”

아이네스의 집권 이후 제국에 신흥 귀족이 늘어났다더니, 그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하긴, 대대로 유서 깊은 명문가 귀족들은 노스 은행까지 찾아와서 자금을 융통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아르델 백작가의 고명딸인 로렐라인을 제외하면 전부 신흥 귀족으로 보이는 듯한 무리를 흘깃한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당장 제 돈 돌려주실 수 있나요?”

“지, 지금 당장?”

“네. 갚을 능력이 충분하시다면요.”

차분한 목소리로 채근하자 그제야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던 얼굴을 가라앉힌 마샬 백작이 헛웃음을 짓는다.

“허어. 노스 은행의 이름값만 믿고 돈을 빌렸더니 이거 은행장이 순 사기꾼이었구먼!”

“이놈! 지금 너와 대화를 나누는 분은 노스 왕국의 공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었느냐!!”

호통에 가까운 백작의 말에 내 옆에 시립하고 있던 자르파라는 예리하게 벼려진 검을 빼 들었다.

“혓바닥을 잘라 버리기 전에 말조심하거라!”

자르파라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에 놀란 백작은 허둥지둥 손을 내저으며 제 부인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 하지만 분명 돈을 빌려줄 때는 이렇게 급하게 갚으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지 않았소! 그렇지 않소, 부인?”

“맞아요! 노스 은행은 자금력이 충분하니 펴, 편히 돈을 쓰라고 했었어요!!”

나는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백작 내외의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헨리가 아주 철저하게 교육시켰을 우리 은행원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했을 리 없는데…….’

물론 말보다 중요한 건 계약서였다.

나는 채무자별로 정리된 서류뭉치 속에서 마샬 백작 부부의 계약서를 찾아 꺼내 들었다.

“자, 여기 이 계약서를 보시면 이자를 최저 한도로 받는 대신 노스 은행은 언제든 채무를 갚으라고 요구할 수 있다고 되어 있네요.”

내게 종이를 건네받은 마샬 백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러게 계약서를 꼼꼼히 읽었어야지.’

눈을 씻고 봐도 마샬 백작의 이름 옆에 찍힌 문장은 마샬 백작가의 것이었다.

“백작님은 최근 일곱 분이나 되는 따님들의 지참금을 마련하시느라 전재산을 탕진하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정말 지금 당장 돈을 갚으실 수 있는 건가요?”

내 물음에 여태 큰소리를 땅땅 치기만 하던 백작이 조개처럼 입을 다문다.

나는 아집이 다닥다닥 달라붙은 그의 얼굴을 흘깃하며 로렐라인을 돌아보았다.

“아르델 백작님은 최근 황제 폐하가 남부의 무역로를 틀어막아 막대한 손실을 감당하셔야 하는 상황이고요.”

물론 아르델 백작가의 빚은 어느 정도 탕감해 줄 계획이었다.

로렐라인의 설득으로 아르델 백작은 솔로아 공작가와 마찬가지로 건국부터 노스 왕국의 힘이 되어 주고 있었으니까.

“은혜는 이렇게 갚는 거예요, 공녀. 아니, 공주님.”

건국 당시 타국과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던 노스 왕국을 위해 아르델 백작가가 직접 무역을 진행하던 타국의 왕가들을 연결해 주면서도 로렐라인은 내게 생색 한 번 내지 않았다.

나는 그때처럼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흘깃하며 말을 이었다.

“다른 분들도 각기 다른 이유로 당장 자금을 융통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조사를 끝내 알아 본 사실이랍니다.”

“그럼 뭐야! 우리를 협박하기 위해 불러 모았다는 말이오!”

내 말에 분개한 마샬 백작이 탁자를 탕!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이 자리는 빚잔치를 위한 연회장이라고.”

나는 왼쪽 홀스터에 얌전히 걸려 있던 권총을 빼 들며 생긋 웃어 보였다.

“가만히 좀 앉아 계세요. 아까처럼 계속 저를 놀라게 하시면 이번에는 검끝이 아니라 총알이 백작님 목숨을 노릴 수도 있으니까요.”

법보다 주먹이 빠르게 와닿는 사람인지, 백작이 흥분한 숨을 씨근거리며 반보 물러선다.

나는 아까 내게 이미 땅으로 대신 빚을 갚았다고 주장한 여자를 총구 끝으로 가리켰다.

“여기 이분처럼 여러분이 갖고 계신 땅을 빚 대신 받을 생각이에요.”

탁자 위에 제국 지도를 넓게 펼친 나는 당황한 귀족들을 설득하기 위해 차분히 말을 덧붙였다.

“농작을 하지 못하는 불모지라도 상관없어요.”

내게 중요한 건 땅으로 얻을 수 있는 당장의 이익이 아니었다.

“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땅이라도 괜찮은 것이오?”

“제국 내에 위치한 땅이라면, 네.”

내 말에 화색을 띤 마샬 백작이 첼시강 하류의 땅이라면 얼마든지 주겠다며 호언장담한다.

첼시강의 하류라면 백작위와 함께 아이네스에게 하사받은 영지였지만, 농사는커녕 광물조차 나지 않아 영민들이 근근이 입에 풀칠만 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황도와 제법 가까이 붙어 있어.’

그렇다면 아이네스가 곧 행사할 부활 의식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은 땅이라는 뜻이었다.

“따, 땅이 없는 저희는 어떡하나요?”

개운한 얼굴로 손뼉을 치는 마샬 백작과 달리, 아이네스에게 따로 영지를 하사받지 못한 귀족 몇몇이 울상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흐음. 빚을 진 개인에 대한 제국법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법대로 해야죠.”

나는 울망울망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서기관인 양 서류만 정리하던 헨리를 돌아보았다.

“기억해, 헨리?”

“예. 세습 귀족이 아닌 제국의 단승 귀족이 빚을 졌는데 갚을 능력이 없을 경우, 작위를 반납하고 노동으로 갚아야 합니다.”

헨리의 말이 청천벽력이라도 되는 양 놀란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내게 우악스레 달라붙어 무릎을 꿇었다.

“자, 작위를 반납하라뇨! 너무하십니다!”

“미안하지만 내가 제정한 법이 아니라서요.”

“아, 아주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주시면 갚을 수 있어요! 어떻게 얻어 낸 신분인데, 빚을 갚지 못했다고 다시 평민이 되어야 한다뇨!”

나는 너무 억울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인상을 찡그린 남자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요. 제가 생각해도 조금 너무한 처사 같긴 하네요.”

내 말에 희망을 품은 남자의 눈빛이 또랑또랑하게 맑아진다.

“노스 왕국은 개인 회생 제도라는 게 있는데…….”

“개, 개인 회생 제도요? 제국도 그런 제도가 있나요?”

“아뇨. 아쉽게 됐네요, 경.”

나는 남자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드는 것을 흘깃한 다음 헨리를 시켜 사람들에게 개인 회생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개인 회생제 도란 사정에 따라 개인의 채무를 어느 정도 면책해 주는 제도,

즉 어느 정도 자금력이 충분하며 인권을 존중하는 국가만이 시행할 수 있는 제도였다.

‘물론 남용하면 큰일이라 헨리가 철저하게 감시해야겠지만.’

“저, 저는 개인 회생인지 뭔지 신청하고 싶은데요!”

조곤조곤 설명하는 헨리에게 귀를 기울이던 여자가 국가가 빚을 대신 탕감해 준다는 말에 손을 번쩍 든다.

“저도요!”

여자를 선두로 솔깃한 사람 몇몇이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안타깝지만 왕국민만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내 눈빛을 읽은 헨리가 여자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찬다.

“아, 물론 망명을 하시면 가능합니다.”

“모국인 윌레닌을 버리라는 말씀이신가요?”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죠.”

사람 좋게 웃어 보인 헨리가 ‘현재 노스 왕국은 새로 국적을 얻는 사람들에게 이주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라며 배급한 전단지를 훑은 여자가 침을 꿀꺽 삼킨다.

“이, 이주금까지 준다고요? 세상에! 빚을 다 갚고도 남는 금액이잖아?”

나는 여자가 든 전단지를 향해 우루루 몰려드는 사람들을 확인하며 내 앞에 놓인 홍차를 홀짝했다.

‘땅도 빼앗고 사람들도 빼앗았는데 이제 어떻게 에티모스를 부활시킬 거야, 아이네스?’

원작 책만 멀쩡했어도 부르르 떠는 아이네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나로서는 조금 아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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