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7화
자르파라가 준비한 모임은 무려 황도에서 가장 큰 건물인 아룬델 티하우스에서 개최되었다.
질 좋은 상아로 빚어 올린 지붕과 기둥은 황도 바하무스의 자랑인 백색의 궁전과 견주어도 좋았다. 이 눈부신 티하우스의 꽃은 다름 아닌 건물 구석구석을 장식한 보석들이었다.
장신구로 활용해도 충분할 만큼 섬세하게 컷팅된 루비와 사파이어, 각양각색의 토파즈와 투어멀린까지.
“선별된 고객들만 드나들 수 있다는 곳 아니었나요? 은행장이 돈을 좀 썼나 보네요.”
장미 덩굴처럼 기둥을 휘감고 있는 루비에 시선을 빼앗긴 귀부인이 작게 중얼거리자 그녀의 남편이 콧김을 쒸익 내뿜으며 인상을 찌푸린다.
“우리같이 바쁜 사람들을 불러 모았으면 그 정도는 했어야지!”
그들은 노스 은행에서 사업 자금을 대출한 마샬 백작 부부였다.
“우리는 이제 귀족이란 말이오! 어디 근본도 없는 은행가 나부랭이가 사람을 왔다 갔다 하라고 해?!”
마샬 백작은 본디 작위가 없는 상인이었지만, 아이네스가 소수 민족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귀족들은 전부 다 솎아내 내쫓았기에 어부지리로 작위를 얻은 사람이었다.
불쾌감을 드러내는 남편을 달래듯 손을 뻗은 백작 부인이 시종이 건네준 양피지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한다.
“이것 봐요, 여보. 노스 은행의 은행장이 직접 주최한 모임이라더니 게스트 명단이 화려하긴 하네요.”
그러나 부인의 말을 대강 흘려들은 남자는 기름이 번지르르한 콧수염을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봤자 돈 많은 평민이겠지. 여태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것을 보면 모르겠소?”
씩씩거리며 티하우스의 가장 위층에 마련된 모임 장소에 도착한 백작은 동의를 구하듯 이미 앉아 있는 사람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다들 얌전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은행장의 무례한 요구에 기분이 상하지도 않으신 모양이오.”
‘나보다 더 작위가 높은 자는 없어 보이니, 이 정도 말은 해도 되겠지. 귀족이라면서 자존심도 없는 것들이구먼.’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며 이죽이는 마샬 백작의 말에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젊은 여자가 헛웃음을 친다.
“은행장이 직접 오라는데 어쩌겠어요? 돈 빌린 사람이 약자인 법이죠.”
살랑살랑, 어디선가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여자가 입술을 벌릴 때마다 그녀의 물빛 머리칼이 나붓하게 흔들렸다.
“허! 나는 딱히 은행장에게 큰돈을 빌린 기억이 없소!”
“큰돈이든 작은 돈이든 빌린 건 빌리신 거잖아요, 백작님.”
마샬 백작은 웃으면서 말하고는 있지만 결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여자를 노려보며 윗입술을 비틀었다.
“아르델 백작 영애, 그대는 아직 부친의 사업을 물려받지 못해 잘 모르는 모양이오.”
물려받은 지 이미 오래였지만, 로렐라인 아르델은 구태여 마샬 백작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무지한 영애는 모르겠지만 돈은 원래 돌고 도는 것이란 말이오. 즉, 은행에 돈을 빌렸다고 딱히 굽신거릴 필요는 없다는 말이지!”
“굽신거리라고는 안 했는데요. 귀가 어두우신 편인가요?”
로렐라인은 백작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 입을 손끝으로 가볍게 가렸다.
“아, 제가 실례했네요. 백작님 나이도 나이시니 더 또박또박 말했어야 했는데.”
“지, 지금 나보고 늙었다는 거요?!”
로렐라인의 말에 울컥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백작을 만류한 이는 다름 아닌 그의 부인이었다.
“자자, 여보! 흥분을 가라앉혀요.”
잔뜩 흥분해 숨을 씨근거리는 남편을 겨우 뜯어말린 백작 부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로렐라인을 돌아보았다.
남편을 말리긴 했지만 은근슬쩍 자신들을 무시하는 로렐라인의 태도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아르델 백작 영애는 평소 노스 왕국의 공주와 교류가 잦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맞아요.”
“왕국은, 지금은 왕국으로 불리고 있긴 하지만 본디 제국에 속한 공작령이었잖아요?”
“그런데요?”
“크흠. 제국을 배신하고 독립해 버린 공작가의 딸과 친하게 지내다니…… 사상이 불순한 건지, 뭔지.”
부인의 혼잣말에 동그랗게 뜬 눈을 느릿느릿 깜빡이던 로렐라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스 왕국과 교류하는 건 백작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노스 은행장은 명백히 노스 왕국의 사람일 텐데요.”
이름부터 알 수 있지 않나.
노스 은행은 이제 여러 나라에 지점을 낸 거대 은행이었지만, 본점은 엄연히 북부에 세워진 노스 왕국의 기업이었다.
“어허. 사업적인 교류와 사사로운 친분을 어디 비교할 수나 있겠어요?”
“그래요? 아쉽네요.”
로렐라인의 지적을 코웃음을 치며 흘려듣는 백작 부인의 뒤로 가녀린 인영이 들어선다.
“저는 사사로이 친분을 나눈 분들과만 거래를 이어 가고 싶은데요.”
장난치는 것처럼 경쾌한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노스 왕국의 공주 레오노라였다.
“왕국의 가장 사랑스러운 태양을 뵙습니다!”
“레오노라 공주님을 뵙습니다!”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공주?”
그제야 레오노라의 신분을 깨달은 백작 내외가 벌떡 일어나 깊숙이 허리를 숙인다.
“고, 공주님을 뵙습니다.”
“처음 뵙소. 마샬 백작이라 하오.”
레오노라는 자신의 신분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건방진 태도로 삐딱하게 손을 내미는 마샬 백작을 무시한 채 상석에 앉았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전 사사로운 친분을 사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랍니다. 오늘 이 자리도 그래서 만든 것이고요.”
레오노라의 말에 마샬 백작은 제 인사가 무시당한 것에 기분이 상했는지 눈썹을 비딱하게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요. 오늘 모임은 노스 은행장이 주최한다고 들었는데.”
“네.”
레오노라는 백작의 추궁에 여상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 채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당신 눈앞에 있잖아, 그 은행장.
따위의 말이 들려오는 듯해 백작은 저도 모르게 제 귀를 매만졌다.
타악.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패를 찾아낸 레오노라가 작은 도장을 원탁 위에 올려놓는다.
티하우스의 상아 기둥보다도 더 섬세한 꽃줄기가 인각된 인장에는 선명한 노스 은행장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이, 이건 노스 왕국의 은행장만 사용할 수 있는 인감 아니오?”
백작은 눈앞에 증거를 두고도 눈이 멀기라도 한 것처럼 헤매며 더듬더듬 입술을 움직였다.
“로렐라인 말대로 머리가 조금 안 좋으신가 봐요. 벌써 노화가 심화되셨거나.”
“뭐라?!”
레오노라는 백작의 트집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며 준비한 서류를 펼치기 시작했다.
“방금 제가 이 자리를 만들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오늘 모임은, 후작님이 아시는 대로 노스 은행의 은행장이 주최하는 모임이고요.”
탁탁.
서류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작이 우물쭈물 입술을 움직인다.
“그, 그럼 공주가 은행장이란 말이오?”
“님.”
레오노라는 제 앞에서 알짱거리는 백작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서늘하게 입을 열었다.
“공주님, 이라고 부르세요. 그게 불편하시면 적어도 은행장님이라곤 불러 주셔야…….”
레오노라의 손에서 착착 펼쳐진 건 모임에 모인 사람들의 채권증이었다.
“저도 돈 빌려줄 맛이 나지 않겠어요?”
노스 은행이 얼마만큼의 금액을 융통해 주었는지가 정확히 계산된 종이를 사람들에게 나눠 준 레오노라는 방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사실 오늘 제가 주최한 이 모임은 채무자 모임이랍니다.”
“채, 채무자?!”
“네. 참석자 전원 노스 은행에서 자금을 융통한 기록이 있는 분들이세요. 당연히 빚은 아직 갚지 않으셨고요.”
“지금 빚 독촉이라도 하고 싶어 우리들을 불러 모았다, 이 소리요?!”
레오노라는 당황한 듯 얼굴을 붉히는 백작을 힐긋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노스 은행은 은행이지, 자선 사업 기관은 아니니까요.”
“그럼 저는 상관없는 거 아닌가요?”
레오노라의 말에 구석에 얌전히 수그리고 있던 여자 한 명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저는 노스 은행의 채무를 반환하지 못해 대신 담보로 잡았던 땅을 잃었는데요.”
여자의 말에 레오노라는 빠르게 서류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실례지만, 어느 지역을 말씀하시는 거죠?”
“제국 동부를 가로지르는 아젠탄 평야였어요.”
“아, 제가 거기에도 땅이 있었는지 몰랐네요.”
“…….”
레오노라의 느긋한 말에 테이블 주위로 모여들었던 사람들의 낯빛이 슬며시 굳는다.
‘뭐야, 땅이 얼마나 많으면 저딴 소리를 하는 거야!’
레오노라는 사람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개의치 않은 채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래도 일단 앉아 계세요. 여러분들이 오해하고 계시는 것처럼 순전히 빚 독촉을 하려고 귀한 걸음을 하시게 한 건 아니니까.”
레오노라의 설명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반짝반짝해진다.
서른 명 남짓한 귀족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얼굴을 익힌 레오노라는 원작의 등장인물 리스트를 떠올리며 입술을 벌렸다.
“오늘 이 자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