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234)화 (469/486)

제234화

“히스, 너 따위의 도움은 필요 없어.”

실제보다 조금 더 냉랭하게 기억되는 레오노라의 목소리가 멍한 히스의 머릿속을 웅웅 울렸다.

‘……내가, 필요 없다고.’

레오노라는 분명 그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을 뿐이지만, 히스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루가 다르게 아름다워지는 레오노라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온몸을 잠식했다.

나를 두고 가지 말라는 유치한 애원이 목 끝까지 치솟다가도 그녀에게 걸림돌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차갑게 식는 것을 반복했다.

그는 레오노라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먼지 한 톨만큼도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남자들과 달랐으니까.

‘나는 절대 주인님을 방해하지 않을 거다.’

“히스, 할 일 없어?”

굳게 다짐하는 히스를 발견한 룰루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소년에게 부들부들한 실크로 만들어진 드레스를 건넨다.

“그럼 부탁 좀 할게. 공주님께 갈아입을 옷 좀 가져다드려 줄래?”

“뚜왈렛룸으로 가져가면 됩니까?”

“응. 오늘은 호수가 내다보이는 욕실을 사용하고 싶어하셔서.”

레오노라가 좋아하는 욕실이 딸린 뚜왈렛룸의 위치는 히스도 잘 알고 있었다.

한겨울이면 눈이 소복하게 쌓여 하얀 도화지처럼 보이는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욕실은 히스가 이 저택에 처음 발을 디딘 날 사용한 곳이었으니까.

“따뜻한 물로 뽀득뽀득 씻어.”

“저는 찬물로 씻는 게 익숙합니다.”

“안 돼! 감기들어. 북부의 바람은 차단 말이야.”

처음에 히스는 레오노라가 무엇을 걱정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크레아의 왕이었던 시절에도 히스의 건강 따위를 살펴 준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는 늘 인간보다는 기계에 가까운 병기로 취급받았고, 레오노라는 그런 소년을 처음으로 병에 걸릴 수도 있는 ‘사람’ 취급을 해 준 이였다.

‘좋은 냄새…….’

분명 세탁을 마친 옷이었건만 룰루가 건넨 레오노라의 드레스에서는 그녀 특유의 라일락 향기가 묻어 나왔다.

무의식중에 레오노라의 옷에 코를 박았던 히스는 제 모습을 들켰을까 주변을 살피며 빠르게 뚜왈렛룸 문 앞에 당도했다.

똑똑.

“들어와.”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청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들어오라니까. 부탁할 게 있어서 그래.”

레오노라의 말에 망설이는 히스에게 다시 한번 명료한 명령이 떨어졌다.

달칵.

잘 기름칠 된 뚜왈렛룸의 문은 히스의 의도보다도 활짝 열렸다.

“룰루, 온도를 조절하는 아티팩트가 고장인가 봐. 마정석 문제인 것 같으니까 이거 가져가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을 이끈 채 문 앞까지 다가왔던 레오노라의 입이 조개처럼 딱 다물어진다.

“…….”

투욱.

히스의 손에서 처연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드레스는 바닥에 철푸덕 달라붙었다.

“…….”

“…….”

둘 사이에 칼바람에 얼어 버린 호수보다도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목욕을 하던 레오노라의 몸에는 여전히 비누 거품이 묻어 있었다.

퐁. 퐁퐁.

맑은 소리를 내며 공중에 터지는 비눗방울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히스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 히스였네. 룰루인 줄 알고 들어오라고 한 건데.”

귓불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소년의 얼굴을 흘깃한 레오노라는 민망한 웃음을 흘렸지만, 그녀는 소년만큼 당황한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온도 조절기가 고장 나서. 추우니까 고쳐 달라고 하려고 했어.”

“……여기 갈아입으실 옷입니다.”

레오노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삐끄덕거리는 몸을 움직인 히스는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드레스를 주워 들었다.

제게 손을 뻗는 레오노라를 보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부자연스럽게 휙 꺾은 소년은 불안정하게 깜박이는 아티팩트에 손을 얹었다.

“아티팩트의 마나를 채워 넣었으니 이제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랄드 아티팩트 공방에서 개발한 수온 조절기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판매한 고급 아티팩트로, 들어가는 마나의 양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마정석이 서너 개쯤 들어가는 양을 손짓 한 번에 채워 넣는 히스의 마력에 감탄하면서도 레오노라는 티 내지 못하고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고마워.”

상대가 너무 부끄러워하니 그제야 그녀도 이 상황이 민망해진 모양이었다.

“이만 나가 봐도 되겠습니까?”

히스의 물음에 레오노라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은 평소처럼 공손히 인사하지 않고 빠르게 뚜왈렛룸을 빠져나왔다.

‘나는 주인님을 탐내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다.’

복도를 껑충껑충 뛰어 저택을 벗어나면서도 히스는 제 머릿속을 지배한 단 한 가지 생각에 몰두했다.

‘나는 타락한 그놈들과는 다르다.’

그러지 않으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니, 떠올려서는 안 되는 인영이 제 숨결까지 장악할 것만 같았으니까.

목구멍이 뜨거웠다.

히스는 단 한 번도 레오노라를 안고 싶다거나, 볼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내가 이런 더러운 마음을 품을 리 없다.’

제 방으로 돌아온 히스는 거대한 거위 털 베개 위에 제 작은 얼굴을 묻었다.

명치 끝이 따끔따끔해서 잠이 오지 않았는데도.

* * *

아이네스가 노엘이 진짜 아트로페 백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 버렸겠다, 슬슬 교단을 뒤집을 때가 도래했다는 생각에 나는 공작성-이제는 왕성이라고 불렸지만- 근처 숲속에 지어진 작은 오두막을 찾았다.

“고, 공주님!”

집 앞에서 뚱땅뚱땅 장작을 패던 아트로페가 나를 발견하고 헐레벌떡 뛰어 나온다.

“아트로페, 곧 교단이 당신을 찾으러 올 거야.”

나는 나를 덥석 껴안으려는 그녀의 손길을 빠르게 피하며 입을 열었다.

“왜요?!”

“노엘이 가짜라는 게 밝혀졌거든.”

“네?! 제가 아크레아에 대해 아는 정보란 정보는 전부 다 말씀드렸는데 어떻게 들키신 건가요!”

‘들켰다기보단 사람들 시선에 성이 난 엄마가 그냥 밝혀 버린 거지만.’

나는 당황한 아트로페의 말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교단이 당신을 추적한다 싶으면 그냥 순순히 잡혀.”

내 말에 아트로페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진다.

“교, 교단이 저를 고문이라도 하면…….”

“그럴 리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고민하는 듯한 아트로페를 향해 산뜻하게 말을 덧붙였다.

“교단이나 아이네스에게 당신은 꽤 귀한 인재거든. 내게 아주 혹독하게 괴롭혀진 척하면 제 편으로 받아 줄 거야.”

“척이 아니라, 이 정도면 혹독하게 괴롭혀진 거 아닌가요…….”

아트로페는 오두막 뒤에 산처럼 쌓인 아크레아의 유물과 관련 서적들을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쓰읍. 괴롭힘이라니 말 함부로 하네.”

자르파라처럼 아크레아의 마지막 왕이었던 히스를 보게 해 주겠다고 꼬셔서 데려온 아트로페는, 제랄드 아티팩트 공방에 강제로 취직당해 아주 알차게 굴려지긴 했다.

꽤 고강도의 노동에 시달렸기에 후한 보수를 지급해 주었지만, 아트로페의 동기는 돈이 아니었다.

“하아, 황홀해. 계속 그렇게 노려봐 주세요!”

나는 들뜬 아트로페의 눈빛을 피하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아아, 어디 가세요?”

“용건 끝났으니 이만 가 보려고.”

“그럼 조금만 더 노려보고 가 주세요…!”

내 말에 아트로페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신다.

“공주님이 새초롬하게 저를 노려봐 주실 때마다 영감이 떠오른단 말이에요! 새로운 유물 발굴을 원하신다면, 제 옆에 붙어서 째려봐 주세요!!”

퍼억!

남다른 아트로페의 입을 주먹으로 틀어막은 이는 내가 아니었다.

“저리 꺼져라.”

언제 따라왔는지 모를 자르파라가 우악스레 인상을 찡그린 채 나무 밑동에 엎어진 아트로페의 등을 즈려밟았다.

“공주님은 본좌만의 태양이시다! 웃어 주시는 것도, 노려봐 주시는 것도 온전히 내 몫이거늘!”

“공주님이 왜 자르파라 님만의 태양입니까? 우리 공주님은 북부의 냉랭함을 담은 한기 서린 눈빛이 돋보이는 야생 승냥이 같은 분입니다! 그 누구도 독점할 수 없어요!!”

야생 승냥이라니.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아트로페의 말에 내가 반박하기도 전에,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온 자르파라가 아트로페를 들이받을 것처럼 노려보며 입을 연다.

“아니! 봄날의 햇살 같은 공주님의 따뜻함을 모르는 너는 공주님을 모실 자격이 없다!”

“승냥이! 고양이! 시라소니!”

“태양! 봄! 햇볕!”

목소리의 주인이 아트로페에서 자르파라로 바뀌었을 뿐, 내용은 비슷한 것만 같은 그들의 답 없는 대화에 나는 끼어들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래, 능력만 좋으면 됐지.’

자르파라는 저래 보여도 제국과 왕국을 통틀어 가장 거대한 상단을 이끄는 거상이었고, 아트로페는 유물 발굴의 1인자였으니까.

“공주님의 새초롬한 매력을 모르는 당신과는 겸상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몸은 같은 공기조차 마시고 싶지 않다!”

능력만……. 좋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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