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231)화 (466/486)

제231화

5년 만에 마주한 아이네스는 창백한 뺨이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있었다.

소설 속 여자 주인공에 보다 더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성장했지만, 그녀는 전보다 배는 초조해 보였다.

“나, 나는 너와 다시 잘 지내 보고 싶어서, 왕국까지 설립해 나를 배신한 너를 황성에 초대한 거야!”

이제 와서 나와 잘 지내 보겠다니.

지나가는 개도 비웃을 소리였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황녀 전하, 아니, 황제 폐하와 잘 지내 볼 생각이 전혀 없어.”

어렸을 때부터 내 마나를 호시탐탐 노리며 빼앗으려고 들었던 아이네스다.

제 오빠를 죽이려고 든 건 본인이었으면서 내게 살인죄를 덮어씌우려고 했던 것도, 다름 아닌 그녀였다.

‘원작의 레오노라를 속이고 기만한 잘못도 잊을 수 없지.’

레오노라는 아이네스를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의심 없이 자신의 마나를 나눠 줬지만 결국 배신당해 죽어 버리고 만다.

한 번도 아니고 수십 번을, 결국 레오노라의 영혼이 닳고 닳아 소멸해 버릴 때까지.

‘살려 달라고 비는 레오노라를 짓밟는 아이네스의 모습이 묘사되는 외전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정도로 봤어.’

레오노라의 몸을 차지한 내게는 그녀의 복수를 대신할 의무가 있었다.

이미 손쓸 수 없이 뒤틀린 우리 관계를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아이네스가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는 분명했다.

‘계획대로 일이 풀리지 않고 있거나 병 때문에 내 마나가 필요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는 내 친구였잖아! 늘 내 친구 역할밖에 못 맡는-!”

“레오노라, 여기 있었구나.”

악에 받친 듯 목소리를 높이는 아이네스의 말을 끊은 사람은 다름 아닌 노엘이었다.

저벅저벅 내게 다가온 그녀가 다정하지만 단단하게 내 어깨를 움켜쥔다.

“폐하, 제 딸이 피곤해 보이니 저희는 이만 물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노엘과 함께 우리를 발견한 사람들이 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노엘의 정중한 부탁에 사람들의 눈치를 본 아이네스가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어.”

“폐하께서 몸소 초대해 주셨는데 일찍 물러가게 되어 유감입니다. 대신 선물을 준비했으니 너무 저어하지 마십시오.”

주눅이 든 아이네스를 힐끔한 노엘이 가볍게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부우우-!

그녀의 왼편에 서 있던 보좌관이 뿔고동을 울리자 아까 내게 선물을 쏟아 냈던 하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다른 선물을 꺼내 든다.

“폐하의 것부터.”

노엘의 짧은 명령에 보좌관은 가득 쌓인 상자들 중 가장 호화로워 보이는 흑단함을 대령했다.

“열어 보십시오.”

여전히 가라앉아 보였지만, 늘 진귀하고 뛰어난 가치를 자랑하는 보물만 대령하는 아트로페 백작의 선물에 아이네스는 주춤하며 상자를 열었다.

“이토록 화려한 잔이라니…… 예술품에 가깝군요!”

“제국 황실에 대대로 내려오는 황금잔보다 보석이 세 배는 세공된 것 같네요. 아까워서 쓰실 수는 있을까요?”

아이네스와 가까운 곳에서 상자 안을 힐긋한 귀족들이 호들갑을 떨며 귓속말을 속삭인다.

노엘은 1캐럿짜리 다이아와 루비가 무려 100개나 박힌 화려한 잔의 가치가 우습다는 듯 여상한 얼굴로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제 딸이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황성 무도회에 발을 들인 날입니다.”

성인이 된 내가 자랑스럽다는 듯 꽃과 깃털로 장식된 내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은 노엘이 느릿느릿 말을 잇는다.

“제겐 무척 뜻깊은 날이라, 기념품을 준비해 봤습니다. 다른 귀족분들을 위해서도 넉넉히 마련했으니 사양하지 말아 주십시오.”

노엘이 거절은 거절하겠다는 듯 다시금 빠르게 오른손을 치켜들자 하인들은 일제히 상자를 열어 황금잔을 연회홀 중앙에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아이네스에게 진상한 잔보다는 화려함이 조금 떨어졌지만 그래도 각양각색의 보석이 중앙을 장식한, 입이 쩍 벌어질 만큼 비싸 보이는 황금 잔 수백 개가 산을 이룬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불릴 만한 풍경이었다.

“저, 정말 가져가도 되는 건가요? 잔 하나가 웬만한 고급드레스 수십 벌 가격은 할 것 같은데요.”

평소 아트로페 백작을 선망해 온 듯 잔뜩 뺨을 붉힌 여자의 말에 노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귀족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과연 아트로페 백작이네요. 이 정도 재력이라니 무서울 정도예요.”

“노, 노스 왕국이 이토록 풍족한 나라였나요? 폐하께서는 분명 왕족조차 입에 풀칠하기가 힘든 상태라고 하셨잖아요.”

“아트로페 백작만 부자인 거 아닐까요?”

“그건 말이 안 되죠. 아트로페 백작이 정말 레오노라 공주의 어머니라면 노스 왕국의 왕비나 마찬가지일 텐데.”

나는 자기들끼리 진상을 밝히기라도 하겠다는 듯 쑥덕이는 사람들을 한눈에 훑은 다음 어깨를 으쓱했다.

“어머니, 노스 왕국에는 기둥에 멜리다이아가 촘촘히 박힌 잔이 유행인데 그걸로 준비하시지 그러셨어요.”

나는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노엘을 핀잔 주며 코끝을 찡긋했다.

“이런 건 저희 왕성에서는 사용인들이나 사용하는 잔인데……. 너무 좋아하시니 조금 안쓰럽네요.”

“뭐, 뭐라고?!”

내 말에 귀족들의 얼굴이 일제히 일그러졌지만 나는 그들이 정말 가련하다는 듯 울망울망한 눈망울로 노엘의 손을 붙들었다.

“어머니, 우리가 빈곤한 제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겠어요.”

‘이제 노스 왕국의 형편이 좋지 못하다는 아이네스의 프로파간다를 믿는 사람은 없겠지.’

귀족들은 잔뜩 약이 오른 듯 얼굴을 붉혔지만, 지금 내게 화를 내면 잔을 가져가지 못할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르파라가 제국의 경제가 많이 기울었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사치스러운 건 아이네스가 온 제국민의 고혈을 쥐어짜 꾸며낸 황성뿐인 모양이었다.

멀쩡히 세금을 내고 잘살던 평민 절반을 타국으로 추방했으니 당연한 인과였다.

‘우월하다고 믿는 자기들끼리 모이면 더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겠지.’

나는 황금잔이 탐이 나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을 조소하며 연회홀을 벗어났다.

* * *

“아트로페가 어떻게 레오노라 손에 들어간 거예요! 그런 건 교단이 알아서 처리해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쨍그랑-!

화병 따위가 깨지는 익숙한 소리에 시녀들은 놀라지도 않고 빗자루를 들었다.

퀴리오스 또한 아이네스의 패악에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일 뿐이다.

“아니,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프란츠 황제와 제대로 된 국혼도 올리지 못했지만, 퀴리오스는 교단의 권력으로 황실에서 ‘선황후’로 자리 잡았다.

턱짓 한 번으로 시녀들을 전부 물린 퀴리오스는 잔뜩 흥분해 숨을 씨근거리는 아이네스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헬리오스, 그대가 분명 아스테르가 가지고 있었다던 그 ‘예언서’라는 책을 찢어 버렸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부, 분명 파괴했었어요! 그 예언서만 없어도 레오노라가 내 계획을 알아낼 방법은 없었을 거라고요!”

“하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아스테르가 아트로페의 존재를 알게 된 거죠?”

아트로페는 교단이 꾀어낸 유능한 유물 발굴자였고, 몇십 번의 삶을 반복하는 동안 늘 아이네스만을 숭배하던 여자였다.

아이네스는 그가 가져올 아크레아의 고대 유물을 이용해 에티모스의 부활을 위한 연성진을 완성시킬 계획이었다.

‘자르파라인지 뭔지 하는 거상 또한 유물을 유통한다지만, 아트로페처럼 유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진 못할 텐데!’

부활 의식에 필요한 유물은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왕가의 보물이었다.

이미 예전에 전부 스러진 아크레아의 왕족이 아니고서야 존재 유무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비밀리에 전승된.

‘그래. 아크레아의 왕족이 아니고서야-!’

“……빌헬름 그라프 폰 슈페.”

그제야 레오노라의 곁을 지키는 아크레아인의 진명을 떠올린 아이네스가 와그작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빌헬름 그라프 폰 슈페라면 아크레아의 마지막 왕의 이름이 아니던가요?”

“레오노라 옆에 늘 붙어 다니는 소년의 진짜 이름이에요.”

아이네스는 뒤늦게 제 패인을 깨닫고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크레아의 소년왕 따위가 제 발목을 붙잡은 적은 여태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간과하고 만 것이다.

“소년왕이 아스테르 쪽에 붙었다는 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거죠?”

“딱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는 원래 브리넨 후작이 오러석을 뽑아내기 위해 목숨을 붙여 둔 노예에 불과했으니까.”

이지를 잃고 자아를 상실한 소년왕은 명령만 수행하는 인형에 가까웠다.

감히 인형 따위가, 제 앞길을 방해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네스는 창백하게 질린 퀴리오스를 지나쳐 창가에 다가섰다.

‘정말로 변하고 있잖아.’

원작이 뒤틀리는 건 그녀도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지만, 제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에 발밑이 꺼지는 듯한 불안감이 들었다.

“소년왕이라면 교단이 아크레아의 힘을 모조리 빼돌리지만 않았더라도 전 대륙을 공포로 몰아넣었을 병기 아닌가요!”

차갑게 조소하는 아이네스의 어깨를 움켜쥔 퀴리오스가 그녀를 몰아붙이며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 위험한 병기가 아스테르의 손에 들어갔는데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이유가 뭐냐고 묻잖아요, 헬리오스!”

“레오노라 손에 들어갔으니까.”

레오노라는, 사람을 병기처럼 사용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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