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229)화 (464/486)

제229화

똑똑.

정갈한 노크 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히스 도련님, 부탁한 티아라 가져오셨나요?”

뚜왈렛룸으로 들어서는 소년을 발견한 룰루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이라고 부르면서 잘도 부려먹네.’

내가 히스를 주운 지도 어언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다행히 하차니아의 사용인들은 세월이 빗겨 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라지 않는 소년을 무서워하기보다는 안쓰러워했고, 히스는 자신을 막무가내로 귀여워하는 사람들에게 적응한 듯싶었다.

“아크레아의 왕비가 쓰던 티아라입니다.”

여전히 아크레아의 유물 발굴에 열을 올리는 자르파라가 최근 발굴한 유적지에서 건져 낸 유일한 보물이라고 들었다.

나는 푹신한 벨벳 쿠션 위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티아라를 바라보다 느릿느릿 눈을 깜빡였다.

“봄을 부른다고 해서 신록이라고 부릅니다.”

과연.

그 찬란한 이름에 어울리는 티아라였다.

매끈한 백은의 관을 촘촘히 장식한 에메랄드와 사파이어, 그리고 파라이바의 영롱한 빛에 홀린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티아라에 손을 뻗었다.

“아크레아의 왕비님이 쓰던 티아라를 내가 사용해도 될까?”

아크레아의 소년왕을 호위로 부려먹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 들어 히스의 눈치를 보자 소년은 피식 웃으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네. 괜찮습니다.”

망설이는 나를 눈치챘는지 히스는 직접 티아라를 들어 올려 내 머리에 씌워 주었다.

티아라를 부드럽게 감싼 내 머리칼에 짧게 입을 맞춘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이제 사라진 왕국이고, 아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묘하게 뒷말을 흘리는 히스의 눈은 신록과 비견될 만큼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응?”

“아닙니다. 무척 잘 어울리십니다.”

말을 끝맺지 않는 히스를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내게 들릴 듯 말 듯 입술을 움직인다.

“제가 이 티아라처럼 당신에게 어울리는 존재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 순간 내가 그의 말을 못 들은 체하지 않았다면, 무언가 바뀌었을까.

* * *

‘정말 오랜만이네.’

5년 만에 거대한 상아성을 마주한 나는 한층 더 화려해진 황성의 내부에 입을 벌렸다.

‘평민의 반 정도를 제국 밖으로 내쫓은 상태라 세금을 걷기도 힘들 텐데 이런 사치를 부린다고?’

나는 순금으로 이루어진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 액자를 흘깃하며 안내를 맡은 시종을 종종걸음으로 따라나섰다.

“연회홀을 새로 짓기라도 했나 보네요.”

시종이 안내한 연회홀은 내가 기억하는 본성의 중앙홀이 아니었다.

눈을 어디에 둘지 곤혹스러울 정도로 번쩍번쩍한 대리석 바닥을 가리키자, 시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연회는 아이네스 황제 폐하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새로 지은 글로리아홀에서 열린답니다.”

짧게 설명한 그는 사치스러운 석조 건물만큼이나 비싸 보이는 황금 사자 손잡이를 잡아 들었다.

쿵. 쿵. 쿵.

세 번의 노크 소리와 함께 거대한 연회홀의 문이 매끄럽게 열린다.

“노스 왕국에서 오신, 레오노라 에스트렐라 드 하차니아 공주님 드십니다!”

안쪽에서 들려오던 오케스트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나는 호명관이 내 이름을 입에 담자마자 뚝 끊긴 음악 소리에 머쓱한 뺨을 긁었다.

쏴아아.

누군가 물이라도 끼얹은 듯 연회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노스 왕국? 제국을 배신하고 독립한 비열한 북부가 세운 나라 말인가요?”

싸늘한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회홀에 발을 디딘 나를 발견한 귀부인 한 명이 세차게 쥘부채를 흔들며 인상을 찌푸린다.

“레오노라라면, 프란츠 황제 폐하를 시해하고 도망친 범죄자잖아요!”

“뻔뻔하기도 하지, 여기가 어디라고?”

나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라도 치듯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불만의 소리에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역시 반응이 안 좋네.’

“저열한 벨네르니 민족을 전부 받아들인 덕에 왕국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고 하던데 미개한 야만인들로만 이루어진 왕국이 오래가면 얼마나 가겠는가? 그냥 무시하게!”

내가 노스 왕국까지 이죽이며 비웃는 나이 지긋한 귀족의 말에 입을 삐죽이자 히스가 서늘하게 눈을 빛낸다.

“당신에 대해 함부로 놀리는 저 입을 잘라 오겠습니다.”

나는 히스의 말에 다급하게 소년을 붙잡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러지 마!”

소문 더 흉흉해질 일 있나!

“지금 황성에 드나드는 사람은 전부 아이네스가 고르고 고른 귀족들뿐일 거야. 나한테 반감이 있는 게 당연해.”

내 설득에 히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났지만, 당장 검이라도 빼 들-그는 마법사였지만- 흉흉한 기세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폐하! 범죄자, 그것도 선대 황제 폐하이시자 폐하의 오라버니이신 프란츠 황제 폐하를 시해한 살인자를 황성에 들이신 이유를 감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 순간, 연회홀의 상석을 차지한 노귀족 한 명이 아이네스를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나는 여전히 화사하고 상냥해 보이는 미모를 자랑하는 아이네스를 발견하고 침을 꿀꺽 삼키며 앞으로 나섰다.

“정확히 말하면 전 범죄자가 아닌데요.”

아이네스의 허락을 받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녀를 향해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든 채 상석에 올라섰다.

나는 아이네스가 함부로 업신여길 만한 위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귀족들에게 똑똑히 각인시키기 위해 움직인 나는 경악하며 나를 노려보는 노귀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 재판을 받지 않았으니까요.”

“그건 그대가 비겁하게 도망을 가서 재판을 받지 않은 것 아닌가!”

“아니죠. 제가 제국의 재판을 받지 않은 건 이미 다른 나라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랍니다.”

‘티아라를 쓰고 오길 잘했네.’

고작 장식에 불과했지만, 내 머리 위에서 빛나는 티아라는 내가 엄연히 다른 나라의 왕족임을 강조해 주고 있었다.

“노스 왕국의 형법은 속인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기가 찬듯 헛웃음을 지은 노귀족이 씩씩거리며 앞으로 나선다.

“그럼 노스 왕국에서는 한 나라의 원수를 죽여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건가?! 프란츠 황제 폐하께서 그대의 손에 죽임당하셨거늘!”

노귀족이 그토록 애타게 찾는 그 프란츠는 지금 내가 어릴 때 사용하던 별채에서 엉덩이 북북 긁으며 자고 있을 터였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무고한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 나라라고 해 두죠.”

“그, 그럼 지금 제국은 그런 나라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내가 생긋 웃으며 내뱉은 말에 분개한 노귀족이 내게 다가오려는 순간이었다.

“그만.”

내가 오른 단상보다도 한층 더 높은 곳에 위치한 황좌에서 아이네스가 셉터로 가볍게 바닥을 내려친다.

“아이네스는 볼썽사나운 말다툼이나 벌이라고 공녀를 황성에 초대한 것이 아니야.”

‘말투는 여전하네.’

아이네스는 나보다 한 살 어렸으니 이제 열일곱이었다.

그러나 붉은 로브를 어깨에 두른 그녀는 여전히 천진한 얼굴로 내게 아이처럼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야, 공녀.”

공녀.

아이네스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는 실로 오랜만에 듣는 것이었다.

“그러게, 오랜만이야.”

내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를 ‘공녀’라 칭하며 하대하는 아이네스의 인사를 맞받아치자 아까부터 나를 노려보던 노귀족이 씩씩거리며 튀어나온다.

“저, 저, 이 미친 자가……! 지금 그대 앞에 서 계신 분은 제국의 황제 폐하시다!”

“어머. 폐하께서 저를 옛친구 부르듯 부르시기에 서로 예의는 잠시 잊자는 뜻인 줄 알았답니다.”

나는 잔뜩 약이 올라 콧김을 뿜는 노귀족을 향해 생긋 웃어 준 뒤 아이네스를 돌아보았다.

“폐하, 설마 불쾌하셨나요?”

“……아니, 아이네스가 실수했네.”

아이네스는 내 질문에 태연하게 대답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명색이 타 왕국의 왕족인데 그에 걸맞는 예우를 갖췄어야 했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이네스는 절대 내게 말을 높이지는 않았다.

“먼 길 오느라 피곤할 텐데 이만 쉬는 게 좋겠어, 레오노라.”

단상에서 내려와 내게 다가온 아이네스가 활짝 웃으며 내 머리에 작은 꽃 한 송이를 꽂아 주었다.

‘……들꽃?’

다 시들어 가는 꽃을 흘깃한 그녀가 내 뺨을 툭툭 건드리며 말을 잇는다.

“오늘 벽을 장식하는 꽃은 그대가 맡아 줘.”

벽의 꽃.

그 누구와도 춤을 추지 못하고 벽에 붙어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을 뜻했다.

‘이런 식으로 날 망신 주겠다는 건가?’

어떻게든 나를 골탕 먹이려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쉽지 않을걸.

나는 아이네스가 내 머리에 꽂아 준 풀꽃 한 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방긋 웃었다.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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