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227)화 (462/486)

제227화

내 예상대로 아이네스는 북문을 닫은 하차니아를 건드리지 못했다.

‘뭐, 본인도 황위에 오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테니까.’

해서 하차니아는 북문을 봉쇄한 채로 평화로운 5년의 시간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도 무사히 성년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아가씨,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룰루나 랄라의 도움이 없으면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긴 했지만.’

나는 부산스러운 룰루의 목소리에 커다란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을 웅얼거렸다.

“으응. 조금만 더 잘래…….”

“어휴. 아직도 어리광 부리시긴!”

내 말에 나를 타박하는 룰루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아주 다정한 손길로 이마 위로 흐트러진 내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아가씨도 이제 다 큰 성인이잖아요. 혼자서 일어날 줄 아셔야죠.”

‘하지만 내가 혼자 일어나는 날이면 섭섭해하면서.’

나는 속으로만 반박하며 이불을 거두려는 룰루의 손을 붙잡았다.

“파티는 늦은 저녁이잖아. 벌써 일어나야 해?”

“하지만 오늘 성장은 아가씨의 성년을 맞아 굉장히 화려하게 할 생각인걸요. 마담 티에리께서도 벼르고 계시니까요.”

“할머니까지 왔어?”

“네.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단단히 각오하세요.”

나는 룰루의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미는 랄라의 말에 인상을 찡그리며 하품했다.

“파티, 귀찮은데. 지겨워.”

“5년 동안 왕국 개회식 말고는 단 한 번도 안 가셨잖아요! 지겹긴 무슨!”

“하지만 어릴 때 많이 갔잖아.”

황실에 드나들며 아이네스의 행보를 알아낼 필요가 없어진 나는 아빠를 졸라 모든 무도회에서 발길을 끊어 버렸다.

‘물론 타국의 영향력 있는 권세가들과 티타임 정도는 자주 가졌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일어난 나는 창가에 앉아 이제 완연한 왕국으로 자리 잡은 북부의 모습을 한눈에 살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바람에 마구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묶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룰루가 한숨처럼 입을 연다.

“설마 이 정도 왈가닥으로 자라실 줄-”

“몰랐어? 정말?”

어릴 때부터 바주카포 들고 들과 산을 뛰어다녔는데 몰랐을 리 있나.

“당연히 알긴 알았지만……!”

씨익 웃는 내가 얄밉다는 듯 눈을 흘긴 룰루가 내 머리를 다시 묶어주겠다며 손을 든다.

“그래도 건강하게 자라주셨잖아, 룰루.”

창가에 걸터앉은 내게 세숫물을 가져다준 랄라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룰루에게 반박한다.

“게다가 얼마나 어여쁘게 자라셨는데. 오늘도 구혼서가 이만큼이나 들어왔는걸.”

랄라가 내 편을 들어주는 건 고마웠지만, 그녀 손에 팔랑이는 편지들은 딱히 달갑지 않았다.

“아가씨, 오늘도 안 열어 보실 거죠?”

“응. 그냥 전부 태워 줘.”

왕국으로 독립한 북부의 유일한 독녀인 내가 데뷔탕트를 치를 나이가 되자마자 대륙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칼리시만 황제의 막내아들부터 론트 공국의 공왕, 대륙의 서쪽과 동쪽을 가로지르는 넓은 초원을 다스리는 공화국의 원수까지.

물론 대부분의 구혼서는 아빠나 오빠들에 의해서 내게 닿기도 전에 찢겼지만.

“마음에 드는 구혼자가 여태 단 한 명도 없으셨던 거예요?”

불쏘시개로 사라지는 구혼서들이 아깝다는 듯 룰루가 짧게 혀를 찬다.

“마음에 들고 말고를 떠나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랑 어떻게 결혼 이야기를 나눠?”

게다가 아이네스가 언제 세상을 멸망시킬 줄 모르는 지금, 내게 결혼은 너무 먼 이야기였다.

‘연애는커녕 짝사랑도 안 해 봤는데, 뭐.’

“하지만 아가씨, 요즘 너무 일만 하시잖아요. 데이트 핑계로 놀러 나가시는 것도 괜찮을 텐데.”

“필요하면 쉴게.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룰루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 바로 옆에 서 있는 거대한 전신 거울이 찬란한 블론드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호리호리한 여자를 비춘다.

“뭘 또 그렇게 모르는 사람처럼 보세요? 아가씨잖아요.”

“으응, 알긴 아는데.”

거울을 매일 봐도 가끔 이 미모에 적응이 안 될 때가 있었다.

아무리 책 속 인물이라지만, 사람 같지 않게 아름다웠으니까.

‘전형적인 악녀상인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하여간 엄청 예쁘네.’

어릴 적 내 염려대로 살짝 삐죽했던 내 눈꼬리는 그대로 남아 요염한 미인의 분위기를 연출해 주고 있었다.

북부에서 나만 한 미인은 없을 거라고 자화자찬하며 거울을 들여다보던 나는 부드럽게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응, 들어와.”

“리니, 일어났어?”

나는 에녹의 느긋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다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저리 가, 에녹.”

“응? 왜?”

“눈부셔서 짜증 나.”

오늘도 내가 사랑스럽다는 듯 환히 웃는 에녹이 나보다 조금 더 예쁜 것도 같았으니까.

* * *

햇빛이 찬란했던 오전과 달리 오후가 되자마자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토독. 톡.

나는 유리 창문에 몸을 부딪히고 흩어지는 빗방울들을 바라보다 윌레닌 황가의 문장이 찍힌 초대장을 힐끔했다.

‘아이네스가 나를 황성으로 초대한 이유가 뭘까?’

에티모스의 부활 의식을 완성했으니 구경 오라는 건 아니지 않겠나.

나는 5년 전 아이네스의 손에 의해 갈갈이 찢겨진 원작들을 퍼즐 조각 맞추듯 꿰어 맞추며 한숨을 내쉬었다.

[ 레오노라를……. ]

[ 에티모스 님은, 아직. ]

[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냐고! ]

단편적인 문장들이 떠오르다 흩어지고 말뿐이다. 전처럼 원작으로 아이네스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셀레네의 도움을 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나는 알레테이아 교단의 검은 십자가가 그려진 마차를 힐끔한 뒤 응접실에 당도한 손님을 돌아보았다.

“오랜만이에요, 셀레네.”

“헬리오스- 아니, 아이네스 황제는 드디어 황도뿐만 아니라 윌레닌 전역에 윌레탄 민족만 남기는 데 성공했더군.”

내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은발의 남자가 초조하다는 듯 입술을 깨문다.

“반격의 준비는 되었나, 공녀?”

말문을 연 셀레네는 실수했다는 듯 아차 싶은 얼굴로 나와 눈을 마주했다.

“아니, 이제는 공주라고 불러야 하나. 너는 노스 왕국의 공주님이 되었으니까.”

“그냥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은데요.”

공주든 공녀든, 공주 할머니든 상관없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아이네스의 미친 계획을 저지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아이네스는 에티모스를 부활시킬 준비를 끝내 가고 있다. 우리도 준비를 끝마쳐야겠지.”

나는 좀처럼 초조함을 보이지 않던 셀레네가 발을 구르는 모습에 의아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이네스가 에티모스 부활 의식을 지내기 위해선 반드시 성년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지. 성년이 되어야만 헬리오스로서의 진정한 힘을 각성하게 될 테니까. 지금의 아이네스에게는 마나가 현저히 부족해. 하지만.”

“하지만?”

“아스테르의 마나를 흡수할 수만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셀레네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내 마나를 흡수해요?”

아이네스가 만약 아직도 나를 마나통 따위로 취급한다면, 자신의 생각이 단단히 틀렸다는 걸 확인시켜 주고 싶었으니까.

“아이네스가, 내 마나를? 무슨 수로?”

내 등 뒤로 떠오른 거대한 마나의 구(球)를 흘깃한 셀레네가 움찔하며 고개를 내젓는다.

“힘들긴 하겠지. 너처럼 강대한 대마법사로 성장한 아스테르는 처음이니까.”

“말은 바로 해요. 아스테르뿐만 아니라 인구를 통틀어서도 없을 테니까.”

대마법사였던 루카스의 마나를 흡수한 나는 강대한 마나에 짓눌려 오히려 컨트롤이 힘들 정도로 거대한 힘을 손에 넣었다.

‘에티모스라는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한다면 내가 한 대 쳐 주면 그만이야.’

주먹을 불끈 쥔 나를 힐끔한 셀레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연다.

“그래도 조심하라는 말은 해 두고 싶었다.”

‘아이네스와 대적하기 위해 손은 잡았지만, 여전히 속을 모르겠단 말이야.’

나를 걱정하는 건지, 내 힘에 의해 날아갈 에티모스를 걱정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뭐, 부활 의식 준비가 끝나 간다는 건 알아냈으니까 됐어.’

나는 의미심장한 얼굴의 셀레네를 방 밖으로 내쫓으며 남몰래 문가를 기웃거리는 히스를 안으로 들였다.

“무슨 일이야, 히스?”

“오늘 제국으로 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동행하게 해 주십시오.”

“응? 가고 싶어?”

“네.”

혹시라도 내가 자신을 떼 놓고 갈까 불안한 얼굴의 히스는 5년 전보다는 조금 자라 있었다. 아예 자라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성장이 느린 거지 멈춘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되어 버린 나와 달리 여전히 열두 살 꼬꼬마로 보이긴 하지만.’

“알겠어. 호위도 필요하니까 히스도 데려갈게.”

‘황성에 드나든 지 꽤 시간이 지났으니까 친척 동생이라고 대충 둘러대면 되지 않을까.’

소년의 머리를 건성으로 쓰다듬으며 대답하자 히스가 토라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또 그런 눈으로…….”

나는 히스의 불만을 모른 척하며 복도 끝자락에 걸린 아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으응……?”

저건 뭐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