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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226)화 (461/486)

제226화

‘아빠와 오빠들이 이미 깽판을 쳐 버렸는데, 내가 그냥 떠날 수는 없지.’

얌전히 도망가는 플랜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나는 실비와 에녹이 일으킨 얼음과 불의 기둥이 우뚝 솟은 황성을 돌아보며 콧김을 쒸익 내뿜었다.

‘감히 내 책을 찢어?!’

원작 책은 내가 전생을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장치이자 이번 생에서의 추억이 깃든 소중한 물건이었다.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고.’

나는 아이네스가 북북 찢어 버린 원작 책의 조각들을 끌어안은 채 마나를 끌어모았다.

그러자 헤진 원작 책이 공중에 떠오른 채 번쩍 빛을 내더니 진동하며 무기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다행히 여전히 바주카포로 변하게 할 수는 있네.’

군데군데 부품이 없어진 탓에 전과 달리 볼품없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황성을 향해 웅웅거리는 바주카포의 몸통을 꼭 끌어안았다.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진 못하겠지만…….’

이미 황성은 아빠와 오빠들의 깽판으로 반쯤 무너진 채였다.

“루카스, 여기 붙어.”

내 허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루카스가 바주카포에 안착하자,

부우웅.

마나의 주인을 알아본 듯 바주카포의 주둥이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레오노라?”

나는 당황한 에녹의 부름을 한 귀로 흘린 채 루카스와 나의 마나를 바주카포에 집중시켰다. 팽그르르- 무기를 장식하는 보석들이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며 돌아가는 순간,

우우우우웅.

나는 바주카포의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콰쾅, 콰콰쾅-!!!!

바주카포가 뿜어낸 보라색 오러구가 황성 지붕 정중앙을 가격한다.

“후우.”

나는 열기가 남아 있는 바주카포의 주둥이를 후후 불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 누가 나한테 까불래?’

우르르 무너지는 황성의 모습에 만족한 미소를 만면에 띄운 나는 황망한 얼굴의 가족들을 돌아보았다.

“자, 됐어요. 이제 출항해요!”

“……리니, 지금 본성을 무너뜨린 거야? 아주 폭삭 무너진 것 같은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에녹의 뒤로 실비가 허탈한 미소를 흘린다.

“전쟁 선포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엄한 실비의 목소리에 괜히 양심이 찔린 나는 울컥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날 멋대로 범죄자 취급했는데 그냥 떠날 수는 없잖아!”

시체 조작이라니, 범죄로 따지면 아이네스의 질이 훨씬 안 좋았다.

“그리고 전부 무너뜨린 거 아니야. 아까 사람들이 본궁을 비우는 걸 봤단 말이야.”

나는 실비의 날카로운 눈빛에 우물우물 변명하며 손가락을 옴질거렸다.

“으휴. 내 동생은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그러자 나를 옹호하듯 감싼 에녹이 내 이마를 툭 건드리며 씨익 웃는다.

“천사야, 천사.”

이 기회에 실비보다 더 좋은 오빠 노릇을 하려는 건 알겠지만, 나는 에녹의 말에 떨떠름히 뺨을 긁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 인명 피해는 막았지만 건물 한 채를 날린 건 사실이었으니까.

“천사라니, 에녹. 이상한 말 하지 마.”

“왜? 황군놈들 보고 쳐들어오려면 쳐들어오라고 해. 넌 내가-”

에녹이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든 순간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널 지켜 줄 테니까.”

에녹에게서 나를 달랑 들어 올린 실비가 삼남을 밀어내며 어깨를 으쓱한다.

“형, 말 가로채는 거 진짜 짜증 나는 거 알아?”

선수를 빼앗긴 에녹이 사납게 으르렁거렸지만, 실비는 여상히 동생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차군. 들어가자.”

* * *

노엘의 함선을 타고 북부에 무사히 입성한 나는 공작성-이제는 왕성이라고 불러야겠지만-에 당도하자마자 아빠를 이끌고 집무실에 들어섰다.

“아빠,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에게 대비책이 있으리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내 태도에 피식 웃은 아빠가 기다렸다는 듯 서랍 속에서 두툼한 서류뭉치를 꺼내 든다.

“프란츠 황제가 하차니아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서류다.”

절차가 제법 복잡했지만, 결국 북부는 자유를 얻어 냈다.

나는 황가의 문장이 명료하게 찍힌 서류를 빠르게 훑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와의 단교를 결정하는 건 온전히 수장의 선택이지.”

나는 아주 어려운 일을 해냈으면서 별것 아닌 듯 무심히 말하는 아빠의 목을 덥석 껴안았다.

“역시 아빠는 다 준비해 놓을 줄 알았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막무가내로 황성에 쳐들어오지 못했을 테니까.

사람 좋아 보이지만 은근히 철두철미한 구석이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우리 아빠 엄청 멋있네.’

나는 아직 왕국의 이름이 공란인 독립선언문을 손끝으로 짚었다.

“제국의 영향력 안에 존재하는 공국이 아닌 온전한 왕국으로 인정받은 거네요?”

내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아빠가 잘생긴 입매를 쓰다듬는다.

“아직 이름은 정하지 않았지만, 그대로 하차니아-”

“그건 안 돼요!”

하차니아 왕국이라니, 세워지자마자 부실 공사로 망할 것 같은 이름 아닌가.

“그럼 조금 더 생각해 보마. 일단 북문부터 닫아야겠다.”

“맞아요! 제국군이 함부로 북부에 쳐들어올 수 없도록 얼음 벽을 세워요!”

나는 아빠의 말에 팔을 붕붕방방 흔든 다음 창문을 열었다.

“북문을 닫아!”

북문을 닫는다.

이 말은 하차니아에서는 일종의 시동어나 마찬가지였다.

북부를 지키는 고대 마법을 사용하겠다는 뜻이니까.

“북문을 닫으라신다!”

내 명령을 들은 문지기가 도개교와 연결된 장치에 손을 얹으며 목청을 높인다.

“북문을 닫아라!!”

끼익. 끼이익.

도개교가 전부 올라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공작성에 상주하는 술자들을 불러모았다.

“부탁했던 보호 마법은 준비된 건가요?”

“제랄드가 만든 아티팩트와 자르파라 상단의 도움으로 완벽히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나는 술자들 중 가장 노련한 마법사의 대답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북문을 폐쇄할 생각이에요. 제국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봐야 하니까요.”

내 말에 술자들과 함께 집무실에 모여든 원로 중 한 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문을 연다.

“제국이 외교적인 압박을 넣지는 않겠습니까? 물자를 끊는다든지.”

“북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급자족이 가능해졌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공녀님이 얼음탑과 제랄드 공방을 이용해 쌓아 놓은 막대한 부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결정적인 히든카드가 존재한답니다.”

나는 원로들의 걱정을 사그라뜨리기 위해 씨익 웃으며 아빠의 집무실에 숨겨 놓았던 장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여태 물밑에서만 운영되었던 하차니아 은행의 고객 목록이에요. 확인해 보세요, 백작님.”

“이, 이건……!”

내 손에서 장부를 받아 든 원로회의 의장, 가르덴 백작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아난지타 왕제의 이름이 아닙니까?”

“더 자세히 살펴보셔도 좋아요.”

나는 화들짝 놀란 백작의 반응에 만족하며 움후후 웃었다.

‘내가 아주 힘겹게 모은 고객들이니까, 열심히 놀라라고.’

“칼리시만 황제의 이름도 있군요. 아, 이건 아스텔리우의 왕족들이 아닙니까!”

나는 타국의 황족이나 왕족에게만 집중하는 원로들의 이목을 사로잡기 위해 직접 장부를 펼쳐 보였다.

“제국민도 없지 않아요.”

“교황인 발레리아누스까지 공녀님의 고객이었군요!”

“네. 그들 모두 하차니아 은행에 비자금을 맡겨 놨어요.”

나는 황금 장부에 놀라면서도 장부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원로들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인 즉슨, 북부가 무너져 은행에 타격이 가면 그들의 숨은 자금이 위험에 처한다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제국이 하차니아를 공격하는 일을 꺼리는 권력자들이 이만큼이나 된다는 뜻…… 아닙니까?”

어안이 벙벙한 사람들 사이에서 내 말을 가장 먼저 이해한 헨리가 헛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나선다.

“전 세계의 보호를 받는 유일한 왕국이 될 수도 있겠는걸요.”

나는 헨리의 말에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단순히 북부의 문만 폐쇄하는 게 아니라, 아빠는 한시라도 빨리 윌레닌과 평화 조약을 맺으셔야 해요.”

북부에는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이주민들이 많았다.

‘불필요한 전쟁을 벌여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면 안 되니까.’

“서로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불가침조약을 맺자고 하면, 윌레닌도 거절하지 못할 거예요.”

“과연 황녀가 우리의 뜻을 따라 줄지 모르겠군.”

“따라 줄 수밖에 없을걸요.”

‘내가 시간을 벌어야 하는 만큼, 아이네스도 벌어야만 할 테니까.’

회의적인 아빠의 말에 단호히 대답한 나는 묘한 기시감에 서둘러 방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잠깐만 실례할게요.”

“어디 가시는 겁니까?”

“화, 화장실이요.”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는 나를 위해 사람들이 허둥지둥 물러나 준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후두둑.

그들의 배려로 집무실 맞은편 화장실에 들어선 나는 검붉게 물든 세면대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레오노라.”

입가에 묻은 피를 씻어 낸 나는 마른기침을 토해 내며 손등에 핏줄이 돋을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니까.’

내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5년 남짓.

그 안에 결판을 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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