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철컥.
아이네스는 결국 기를 쓰고 문을 열고 말았다.
“무슨 일이지.”
당황한 나를 밀치고 앞으로 튀어나간 프란츠는 온몸으로 열린 문틈 사이를 가리며 사납게 아이네스를 추궁했다.
“네가 나를 찾다니, 희한하군.”
“동생이 오라버니 얼굴 보고 싶어 찾는데에도 이유가 필요해?”
프란츠의 비딱한 말에 코웃음을 친 아이네스가 벌어진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다.
나는 그녀가 나를 발견하기 전에 후다닥 몸을 움직였다.
“네가 날 오라버니로 생각한다고? 나를 가둔 것으로는 모자라 놀리고 싶은 건가?”
프란츠가 화가 난 척 시간을 벌어 둔 덕에 나는 무사히 창문을 통해 침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금 바로 아래로 떨어지면 큰 소리가 날 테니까 어떻게든 버텨야 해.’
나는 끙끙거리는 신음 소리가 입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며 창문턱에 매달렸다.
“그래, 인정할게. 프란츠를 내 오라버니라고 생각하진 않지.”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프란츠를 비웃는 아이네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운 채 주머니를 뒤져 손거울을 꺼내 들고 방 안을 비췄다.
“급이 맞아야 가족이라고 생각할 거 아니야? 감히 너 따위가 뭐라고.”
“조롱하기 위해 온 거라면 나가.”
프란츠의 단호한 말에도 아이네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침실에 들어섰다.
“흐음. 향수라도 바꿨어?”
킁킁거리며 콧잔등을 찌푸린 아이네스가 의아한 얼굴로 프란츠를 돌아본다.
“라일락 향기 같은 게 나는데. 프란츠, 원래 꽃향기가 나는 향수는 잘 안 썼잖아.”
아이네스의 예리한 말에 프란츠는 애써 당황을 숨긴 채 이를 악물었다.
“바, 방에서 나갈 수가 없으니 심심해서 바꿔 봤다.”
“레오노라 공녀와 북부를 완전히 포기하겠다고 해 놓고 뒤에서 밀서를 작성하지만 않았어도 나도 이렇게 안 나왔어.”
다행히 허둥대는 프란츠의 반응을 자신에 대한 불만으로 해석했는지, 아이네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프란츠에 팔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이제 아버지도 없는데 우리끼리 서로를 잘 보살펴야지, 오빠.”
아버지.
그레고르를 언급하는 아이네스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프란츠가 주먹을 움켜쥔다.
우드득.
나는 내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하게 핏줄이 돋은 프란츠의 손등을 발견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는 널 무척 귀애하셨지. 기억하나?”
“당연히 기억해.”
“너는 그런 아버지를!”
프란츠는 악에 받친 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곧 상황을 인지하고 애써 분을 참아 냈다.
“아버지를, 뭐?”
“……사랑하긴 했었나?”
프란츠의 물음이 뜬금없다는 듯 아이네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웃음을 흘렸다.
“아빠와 나는 서로를 사랑할 만큼만 했다고 생각해.”
“사랑할 만큼만이라니?”
“필요한 만큼, 사랑했지.”
필요하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가족조차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아이네스의 말에 프란츠는 허탈한 입을 벌렸다.
“어쩌다 이렇게 망가져 버린 거냐, 아이네스.”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
비난에 가까운 프란츠의 말에도 아이네스는 천진하게 웃을 뿐이었다.
“아이네스는 원래 이랬어.”
“…….”
“결국 네 애정이란 것도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란 걸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의 애정이었던 거잖아.”
푸드덕.
“꺅!”
아이네스와 프란츠의 대화에 집중하던 내 앞으로 갑자기 새가 날아든 탓에 나는 깜짝 놀라 새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일 났네.’
그냥 흘려들으면 듣지 못했을 정도로 작은 비명이었지만, 아이네스는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였다.
“……방 안에 누가 있는 거야?”
나는 뒤늦은 아이네스의 물음에 두눈을 질끈 감은 채 창턱 아래로 몸을 기울였다.
‘버티기 더 힘든 자세지만, 이렇게 있으면 몸을 완전히 밖으로 빼지 않는 이상 날 발견하기 어렵겠지.’
“아니, 아무도 없다.”
아이네스는 프란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휙!
커튼과 이불 자락이 밀쳐지는 소리와
“아무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아이네스를 말리는 프란츠의 목소리,
드르륵- 탁!
서랍이나 옷장 따위를 여는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들어 온다.
“……정말 아무도 없는 건가?”
나는 창가 앞에 선 채 작게 중얼거리는 아이네스의 목소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은 몸을 애써 진정시켰다.
‘제발, 제발 그냥 가라.’
마나의 기운까지 전부 감췄으니 눈으로 날 보지만 않는다면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 이만 가 볼게, 프란츠.”
아이네스의 인사와 함께 그녀의 기척이 조금씩 멀어진다.
“하아. 살았다.”
내가 안심하며 창턱을 조금 더 단단히 그러쥔 순간이었다.
끼이익.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뻑뻑한 침실 창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린다.
“안녕, 공녀.”
나는 뱀처럼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는 아이네스의 얼굴을 마주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오랜만이야.”
“커억!”
아이네스가 경고도 없이 내 목을 움켜잡아 창턱 위로 끌어올린다.
“고, 공녀를 놔줘! 이 무슨 무도한 짓이냐, 아이네스!”
숨이 막힌 내가 버둥거리는 것을 발견한 프란츠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아이네스는 내 목을 조르는 손아귀 힘을 풀지 않았다.
‘무슨 어린애가 이렇게 힘이 세?!’
오빠들과 매일같이 훈련한 나조차도 비교할 수 없을 악력이었다.
‘마나로 신체를 강화한 기미도 없는데!’
“그러다 공녀가 죽을 수도 있다, 아이네스!”
새하얗게 질린 프란츠가 아이네스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프란츠의 팔을 우습게 피해냈다.
“황성에 무단으로 침입한 범죄자를 잡은 거야. 공녀가 아니라.”
“내 손님이다! 무단으로 침입하지 않았다고!”
아이네스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프란츠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자꾸 아이네스의 신경을 거스르지 마, 프란츠.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죽고 싶다면 말이야.”
타악!
짧게 경고한 아이네스가 나를 바닥에 내팽개친다.
거꾸로 들린 탓에 주머니에 넣어 놨던 물건들이 우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이건 뭐야?”
나는 아이네스가 집어 든 책을 발견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책을 계속 들고 다녔어? 위험하게.”
나는 딱히 놀라운 기색을 보이지 않는 아이네스의 반응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치 원작을 아는 것처럼 태연했으니까.
“뭘 그렇게 놀라?”
내 놀란 얼굴이 우습다는 듯 비죽 입꼬리를 올린 아이네스가 말을 잇는다.
“설마 너만 이 세계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거야?”
“……!”
“아이네스는 명색이 주인공인데 모를 리 없잖아.”
아이네스는 자신의 발언에 내가 눈을 홉뜨든 말든 느릿느릿 책장을 넘기며 조소했다.
“아가 황녀님의 인생은 장밋빛이라…….”
작게 중얼거리는 아이네스의 손가락 끝에 피가 맺힌다.
책이 마치 그녀를 거부하듯 자신을 붙잡은 그녀에게 생채기를 남기고 있었으니까.
사악.
사아악.
하지만 아이네스는 자신의 손이 피범벅이 될 때까지도 오망성이 새겨진 책을 놓지 않았다.
“하, 웃기지도 않지. 이런 인생을 보통 장밋빛이라고 부르나?”
내용을 전부 훑은 아이네스는 느긋하게 책을 덮으며 주저앉은 나를 돌아봤다.
“흐음. 이 책을 통해 내 행동을 읽고 방해했던 거구나.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작게 웃은 그녀가 내 눈앞에서 책을 북북 찢기 시작한다.
그녀의 손에서 흩어진 종이들이 나풀나풀 춤을 추며 바닥에 떨어졌다.
“벌레가 꿈틀대 봤자 벌레일 뿐이야.”
걸레짝이 된 책을 바닥에 집어던진 아이네스는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와 내 손을 즈려밟았다.
“너도 이 책을 읽었다면 네 주제를 알 것 아냐.”
“…….”
“넌 하찮은 엑스트라에 불과해.”
아이네스에게 밟힌 손 따위는 아프지 않았다.
나는 가슴에 꽂히는 듯한 그녀의 날카로운 말에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주인공을 돋보이기 위해 희생당하는 게 당연한 역할이라고.”
나는 내 머리를 움켜잡은 아이네스의 손을 떨쳐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나는 원작대로 이 세계가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아이네스는 내가 자신을 떨쳐 낸 게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본성은 이능을 발휘할 수 없게 설계되었는데, 희한하네.”
‘그래서 힘이 자꾸 빠졌던 거구나.’
나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열리지 않던 포탈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아스테르라서 특별하다며.”
“그래, 맞아.”
아이네스는 내 말에 순순히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넌 이 책의 결말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아이네스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똑같았거든.”
아이네스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어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똑같았어. 끔찍할 정도로 말이야.”
수북하게 쌓인 종잇장 사이에 선 그녀가 손을 들어 프란츠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아이네스는 황제위에 오른 적이 없어. 책의 결말까지 아이네스는 황제가 되지 못하거든.”
아이네스는 마치 희극 무대라도 지켜보는 듯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레고르가 죽으면 프란츠가 끝까지 살아남고, 프란츠를 죽이면 그레고르가 죽지 않더라고.”
곧 검붉은 마나로 꽁꽁 감긴 프란츠가 내 앞에 물건처럼 놓였다.
“하지만 너는 가능할 거야, 레오노라.”
“……뭐?”
“프란츠를 죽여. 안 그러면 네가 죽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