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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217)화 (452/486)

제217화

갑자기 튀어나온 노엘에게 뺨을 얻어맞은 아빠가 천천히 제 얼굴을 쓰다듬는다.

‘세게도 때렸네!’

나는 붉게 달아오른 아빠의 얼굴에 입술을 질끈 깨물며 발을 동동 굴렀다.

“……뭐 하는 거지?”

노엘에게 얻어맞은 얼굴이 아프지도 않은지 아빠는 기분 상한 기색이 조금도 없이 무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나쁜놈!”

차분한 아빠와 달리 잔뜩 흥분한 노엘이 숨을 씨근거리며 목소리를 높인다.

“파렴치한! 바람둥이!!”

나는 연회홀 구석구석 울려 퍼지는 우렁찬 노엘의 호통에 난감한 뒷머리를 긁었다.

‘그래. 노엘 입장에서는 아빠가 바람둥이처럼 보이긴 할 거야…….’

문제는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뭐죠? 왜 난데없이 튀어나온 여자가 공작 각하를 추궁하는 걸까요?”

나는 내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귀부인의 의아한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나이 차이가 꽤 나 보이는데 정부인 것 같아요.”

“세상에! 저는 각하를 점잖게만 봤었는데 의외네요.”

“으음. 저 여자, 황녀 전하의 배동 선발전에 참가했었던 영애와 닮지 않았나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 나는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숙인 채 아빠와 노엘을 향해 나아갔다.

‘사람들이 노엘을 알아보기 전에 빼내야 해.’

가까이 다가선 나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빠가 한숨을 푹 내쉬며 흥분한 노엘을 달래기 시작한다.

“내가 무례를 범했다면 사과하겠다.”

“그래요! 사과하세요!”

“하지만 무슨 무례였는지 설명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빠의 느긋한 물음에 붉그락푸르락 얼굴을 붉히던 노엘이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듯 뒤로 반보 물러난다.

“그, 그건…….”

“그건?”

“모릅니다.”

노엘의 대답에 무표정했던 아빠의 얼굴이 그제야 일그러진다.

“그럼 영애는 지금 이유도 없이 내 뺨을 때렸다는 말인가.”

기가 막힌 헛웃음이 섞인 아빠의 목소리에 노엘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꿋꿋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당신이 지금 내게 엄청난 결례를 저질렀다는 건 알아요! 당신은 날 배신했습니다.”

“영애, 당신과 나는 배신을 논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아닌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건 그렇지만! 어쨌든!”

“노엘!”

나는 계속해서 아빠에게 반박하려고 드는 노엘의 앞을 재빨리 가로막았다.

“자, 잠깐 나랑 정원에 나가서 머리 좀 식히고 와요!”

나는 내 말에 입술만 꾹 깨물고 있는 노엘을 이끌고 허둥지둥 걸음을 옮겼다.

* * *

정원의 찬 바람을 맞고 나서야 이성을 찾았는지, 노엘은 자괴감에 빠져 의자에서 한참이나 일어나지 못했다.

“……내가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무슨 짓을 저지르긴요.”

나는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을 힐끔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이 보는 연회장 한복판에서 공작 각하인 아빠의 뺨을 내려친 것밖에 더했나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아는 아빠는 여자에게-비록 아무런 친분도 없는 사이였지만- 뺨 한 대-이유 없이 맞은 거지만- 맞았다고 걸고넘어질 사람은 아니었다.

“아빠에겐 제가 잘 말해 볼게요. 노엘이, 으음,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처벌의 문제가 아니다. 내 행동을 믿을 수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지.”

탄식하듯 말을 토해 낸 노엘이 후우, 깊은 숨을 삼키며 나를 올려다본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원래 이토록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아뇨, 저는 노엘의 말을 믿어요. 그런데 무슨 말에 그렇게 화가 난 거예요?”

노엘은 내 물음에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나는 부끄럽다는 듯 붉어지는 그녀의 흰 뺨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설마 아빠가 새로운 공작 부인을 맞이하겠다고 나섰다는 소문 때문에?”

“……그래.”

나는 느릿느릿 흔들리는 노엘의 정수리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째서요?”

“나도 모르겠다.”

‘설마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걸까?’

헛된 희망을 품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들뜨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입을 열었다.

“그럼 왜 제국을 떠나지 않고 다시 내게 돌아왔는지는 말해 줄 수 있어요?”

“……글쎄.”

내가 어려운 질문만 한다는 듯 미간을 좁힌 노엘의 입술이 느릿느릿 움직인다.

“공녀가 눈에 밟혀서, 인 것 같은데.”

쿵.

나는 노엘의 말에 심장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제가 눈에 밟혀요? 왜요?”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를 배웅하는 네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려 도무지 배를 출항시킬 수가 없더군.”

내가 마음에 걸렸다는 노엘의 말에 나는 자각도 없이 그녀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니지만, 노엘의 몸이 우리를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어.’

그래서 아빠의 배신에는 화가 나고, 슬퍼 보이는 내 얼굴은 외면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가 않아 다시 공녀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노엘은 내게 붙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내 뺨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노엘.”

엄마.

내가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 말을 겨우 웅얼거리려는 순간,

채캉!

“공녀에게서 떨어지십시오.”

깡-!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가 옆을 파고든다.

노엘은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놀랄 만큼 능숙하게 대응하며 검을 꺼내 들어 제 목을 겨누는 칼을 쳐냈다.

“넌 뭐지.”

“공녀의 옆에 설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노엘의 물음에 소년이 짧게 대답한다.

“나는 네 정체를 물었다.”

‘그러게, 누구지?’

시린 검 끝을 따라 달빛이 휘황하게 비추는 소년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공녀가 준 소중한 이름을 당신에게 밝히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소년의 담담한 대답에 그제야 그를 알아보고 입을 벌렸다.

“……히스?”

“네.”

“정말 히스야?”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리는 내 목소리에 히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큰 거야!’’

나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던 히스를 떠올리며 거의 에녹 또래처럼 보이는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결 좋은 회색 머리칼, 여름 바다처럼 맑은 하늘색 눈.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섬세한 이목구비는 분명 히스의 것이었다.

“공녀를 에스코트하러 왔습니다.”

“응?”

“제가 자라면 공녀 옆에 서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히스의 간절한 목소리에 내가 언젠가 소년에게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히스, 성장이 멈춘 너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거야. 그러니까 오늘이 너와 내가 함께 가는 마지막 파티가 될 거야.”

“제가 자라면 다시 공녀 옆에 서도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내 옆자리는 히스를 위해 비워 둘게.”

‘지금 설마 내 에스코트 때문에 성장을 했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겠지?’

싶어 입을 벌리는데, 히스가 내 손목을 부드럽게 잡은 채 홀에 들어선다.

“어머, 공녀님께서 처음 보는 공자님을 에스코트로 데려오셨네요.”

나를 가장 먼저 발견한 아르델 백작 부인이 쥘부채로 가리지 못한 입에 흐뭇한 미소를 건다.

“정말 잘생긴 소년이군요. 공자들 못지 않은, 아니, 공자들보다도 미모는 한 수 위인 것 같은데요?”

늘 예쁘고 귀엽다는 평가를 받던 히스가 ‘잘생겼다.’는 소리를 듣는 게 신기해서 멈칫하는 사이 나는 홀 중앙으로 끌려 나오고 말았다.

“히스, 춤바람이라도 들었어?”

춤에 미치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파티에 목을 매다니.

나는 묻는 말에는 대답도 없이 길쭉하게 뻗은 흰 손을 내미는 히스를 바라보다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다.

난 얼굴에 약하니까.

내가 히스가 내민 손을 잡는 것과 동시에 악단이 부드러운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춤은 또 왜 이렇게 잘 춰?’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히스를 데리고 파티에 다니기도 했지만, 청소년이 추는 왈츠는 성인의 것과 다르지 않아 아이들의 사교댄스보다 많이 복잡했다.

“히스, 왈츠는 언제 배웠어?”

능숙하게 스텝을 밟는 히스가 신기해 토끼눈을 뜨자 내 허리를 짚으며 옅은 미소를 지은 히스가 천천히 입을 연다.

“왕자일 적에 배웠습니다.”

‘아, 히스는 왕족이었지.’

“하지만 연회장에서 누군가와 춤을 추는 건 처음입니다.”

나는 히스가 덧붙이는 말에 그의 어깨를 팡 내려쳤다.

“이렇게 멋지게 꾸미고 왔으면 아까 인사해 주지, 왜 정원에 숨어 있었어?”

“……제가 지금 멋있습니까?”

나는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히스를 향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응. 멋있어.”

솔직히 히스가 에녹보다 아주 조금 더 잘생긴 것 같았다.

“솔로아의 공작보다 멋있습니까?”

덩치는 컸어도 히스는 여전히 히스였다.

나는 소년의 유치한 질문에 피식 웃으며 그의 뺨을 잡아당겼다.

“그럼, 당연하지. 누구 히스인데?”

내 능청스러운 대꾸에 얼굴을 굳힌 히스가 제 뺨을 주무르고 있는 내 손을 휙 가져간다.

“나는 당신에게 귀여움을 받고 싶은 게 아닙니다.”

서서히 끝나가는 왈츠에 맞춰 허리를 숙인 히스는 아주 가볍게 내 손등에 키스했다.

“그걸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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