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화
그걸 지금에 와서야 의문이라고 품다니.
“글쎄요.”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프란츠를 탓하는 대신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제게 묻지 말고 눈으로 확인하시는 건 어떨까요?”
나는 내 물음에 우물우물 대답을 망설이는 황제를 이끌고 벨네르니 민족이 배정된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독 집시들이 많은 그들의 구역에서는 늘 그렇듯 활기찬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폐하가 보시기엔 저들이 정말 모든 나쁜 일의 원흉이며 악(惡)인가요?”
나는 한 발을 든 채 서로 팔짱을 끼고 모닥불 근처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프란츠를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춤을 추고 있긴 하군.”
“집시들의 춤이에요. 쉬워서 누구나 따라 하며 섞여 들 수 있어요.”
“오, 옷은 저게 입은 건가 만 건가? 짐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문란함이네.”
나는 활기 넘치는 벨네르니인들의 모습을 애써 부정하는 프란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술을 벌렸다.
“황실에서 알레테이아의 교리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아요.”
‘아마 지금 프란츠의 지지율은 10퍼센트가 채 되지 못하겠지.’
여신 루엘라를 믿는 사람들과 발레리를 따르는 수많은 신도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을 테니까.
프란츠는 국교를 저버린 최초의 황제로 등극하고 말았다.
“그래. 아이네스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황족들과 궁인들에게 교리를 전파했다.”
“폐하께서는 알레테이아의 교리가 처음부터 이해가 가시던가요?”
여신 루엘라는 만인에게 자애롭길 원하는 신이었지만, 알레테이아는 아니었다.
그녀를 따르는 교단원들은 그녀가 특별하게 선택받은 사람들만 새로운 세상에 데려갈 거라고 믿었으니까.
“……아니, 아니었다.”
“그럼 폐하께서 이해하지 못하는 건 전부 나쁘던가요?”
“그건 아니겠지.”
나는 느릿느릿한 프란츠의 목소리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폐하, 사람은 스스로 사고하지 않는 순간 죽은 시체와 다름없다는 말이 있어요.”
내 말에 멍하니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가 움찔 몸을 떤다.
“제국을 이끄는 폐하께서 부디 시체는 아니길 바랄게요.”
나는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그를 두고 자리를 떠났다.
* * *
프란츠는 공작령-이제는 하차니아 특별 자치령이지만-을 다녀간 얼마 뒤 나를 황성으로 초대했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네.’
윌레탄 민족이 아닌 시녀와 시종들을 전부 내쫓았기 때문인지, 질릴 만큼 화려했던 황성은 전처럼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오랜만이야, 레오노라.”
나는 중앙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는 아이네스의 목소리에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내 말에 비뚜름히 입꼬리를 올린 아이네스가 내 어깨를 누르는 손에 힘을 주며 입을 연다.
“작은 태양이라니. 나는 이 제국을 비추는 유일한 태양이야.”
“폐하가 엄연히 살아 계시는데 위험한 발언을 하시네요.”
아이네스는 짧게 혀를 차며 자신을 노려보는 나를 뿌리쳤다.
“……나는 공녀가 주제를 아는 아스테르이길 바랐어.”
“저도 전하께서 진정으로 제국민을 생각할 줄 아는 황족이길 바랐어요.”
진심으로.
‘그럼 나도 편하게 놀고먹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안온한 부자 엑스트라의 생활을 떠올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차니아 주제에 제국에서 분리되어 독립을 하겠다고 나설 줄 몰랐어.”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아이네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잇는다.
“너무 망상에 가까운 생각이라 딱히 대처할 생각도 안 했는데, 공녀가 예전 제국법을 들고 나올 줄이야.”
“법이라는데 어쩌겠어요.”
“잊었어? 공녀가 사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고리타분한 법령을 황제에게 들이밀 수 있었던 건 전부 내 덕분이라는 걸!”
아이네스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는 나를 노려보다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였다.
“내 배동 자격으로 거머쥔 거라고. 일개 공녀인 네게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어!”
“잊지 않았어요. 늘 감사하고 있어요, 전하.”
아이네스는 비꼬는 기미 없이 예의 바른 내 말투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 나를 초대한 황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제국의 유일한 태양을 뵙습니다.”
“공녀, 어서 오게.”
프란츠는 단정하게 성장한 내 모습을 살피더니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그대는 언제 봐도, 참.”
“네?”
“아니, 아니다. 내 곧 정원으로 나갈 테니 가 있게.”
쑥스럽다는 듯 팔을 내저은 프란츠가 내가 아닌 아이네스를 돌아본다.
“아이네스, 네게 할 말이 있으니 잠시 시간을 내줘.”
프란츠를 조용히 따라나서는 아이네스를 잠시 지켜보던 나는 주머니에 숨겨놨던 원작 책을 꺼내 들었다.
◈
“어떻게 공녀가 황성에 있는 거지?”
“오늘 연회에 내가 초대했다.”
“왜? 퀴리, 아니, 달리아 성녀님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라고 했잖아!”
프란츠와 함께 자리를 피한 아이네스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그를 탓하며 뒤를 돌았다.
‘그레고르보다도 말을 안 듣잖아.’
도무지 그녀 뜻에 제대로 따라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네스는 쓸모없는 사람들의 가치를 찾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인데!’
아무도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
‘아무 의미 없는 목숨을 에티모스 님의 부활을 위해 바칠 수 있는 걸 영광으로 알아야지!’
새로운 세상의 밑거름이 된다는 게 얼마나 뜻깊은 일인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내려치는 아이네스를 바라보던 프란츠가 답지 않게 단호히 입을 연다.
“나는 성녀를 황후로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했다.”
아이네스는 프란츠의 반항이 우습다는 듯 비뚜름히 입꼬리를 올린 채 대답했다.
“네 마음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어.”
“아이네스, 나는 네가 멋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인형이 아니다.”
“프란츠, 널 황제로 만들어 준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빠가 죽고, 우리 가족은 귀족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뻔했어!”
“그래, 네가 분명 그렇게 말했지.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북부에서 가장 먼저 우리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거라고.”
한숨을 푹 내쉰 프란츠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그에게 놀라 입을 벌린 아이네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하차니아 공작은 내가 황위에 앉는 순간까지 아주 작은 탐욕조차 보이지 않았다. 네가 늘 나를 겁주는 데 사용했던 루카스 선황자도 마찬가지고.”
“그, 그건! 프란츠 네가 멍청해서 눈치채지 못한 거야!”
“하지만 네가 예상했던 것처럼, 그가 군대를 모아 황성에 들이닥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내가 막았으니까!”
아이네스는 이제 와서 자신의 계획에 의문을 품는 프란츠를 밀쳐 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아이네스, 넌 어릴 때부터 나보다 영특했지. 그래서 선황께서도 널 더 예뻐하셨고.”
“당연하잖아, 프란츠. 넌 검도 학문도 북부의 공자들보다 한참이나 뒤떨어지는 멍청한 황자였으니까.”
“그래. 내가 부족해 네게 제대로 된 오라버니 노릇을 못 했다는 걸 인정한다.”
“뭐라는 거야? 지금에 와서 오라버니인 척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이네스는 그녀의 말을 인정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프란츠를 향해 날카롭게 조소했다.
“그래. 동생이 잘못된 길로 빠져들면 바로잡아 주는 게 내 역할이겠지.”
“잘못된 길?”
“넌 편향된 가치관에 사로잡혀 죄 없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너와 내가.”
프란츠는 그 사실이 씁쓸하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나와 선조가 다르다는 이유로 제국민을 탄압하는 짓을 그만두겠다, 아이네스.”
하.
그런 프란츠의 위로 아이네스의 헛웃음이 떨어진다.
“폐하께서 상태가 안 좋으신 모양이야.”
아이네스는 괴로워하는 프란츠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근위대장을 불렀다.
“열이 나시는지 자꾸 헛소리를 하시니까 침실 밖으로 못 나오게 잘 감시하렴.”
“존명.”
이미 황실은 그녀의 손바닥 안이었으니까.
◈
‘어떡하지? 황제를 구해야 하나?’
“일단 아빠부터 찾아야겠어.”
그래야 군사를 움직이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원작을 탁 소리 나게 덮은 나는 발을 동동 구르다 연회장에 들어섰다.
상당한 장신인 아빠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저 멀리, 구름떼처럼 몰려든 인파 속에 곤란한 얼굴이 우뚝 솟아 있었으니까.
“각하께서 드디어 아내를 맞이할 결심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 소식을 듣고 저희가 얼마나 안도했는지 몰라요. 드디어 새 출발을 하실 결심을 세우셨군요.”
내가 새로 공작 부인을 들일 생각이 없냐고 물은 걸 사용인들이 들었는지, 아빠는 요즘 루머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차니아 공작이 새로운 공작 부인을 맞이하겠다고 나섰다-
는 문장이 가십지 헤드라인에 대문짝만 하게 실리고 말았으니까.
“아니, 나는 그런 결심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빠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정중하게 밀어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황제가 아니라 아빠부터 구해야겠는데.”
그런 생각에 오도도 그에게 달려 나가려는 순간,
짜악-!
누군가가 아빠의 뺨을 내려쳤다.
‘……노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