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집으로 돌아온 나는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불이 켜져 있는 집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빠, 아직 안 주무셨어요?”
짧게 문을 두드린 후 빼꼼 고개를 내밀자, 거대한 서류더미에 파묻힌 아빠와 오빠들이 눈에 들어온다.
“리니, 너야말로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하고 있는 거야.”
조르르 문 앞까지 달려온 에녹이 나를 번쩍 안아 들며 내 등을 토닥인다.
‘말도 없이 밖에 나갔다 온 걸 들키면 쓸데없이 걱정하겠지.’
“그냥. 잠이 안 와서.”
대충 둘러댄 나는 피곤에 짓눌린 눈가를 애써 감추며 내게 팔을 뻗는 아빠를 향해 웃어 보였다.
‘노엘에 대해서 말해 주는 게 맞는 걸까.’
아빠는 원래도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엄마에 관해서라면 자식들 앞에서는 절대로 감정을 표출하지 않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는 게 힘들었다.
“아빠.”
내 부름에 에녹에게서 나를 빼앗듯 안아 들었던 아빠가 고요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혹시 엄마가 아닌 사람을 아내를 맞이할 생각은 전혀 없으세요?”
“푸웁!”
내 물음에 아빠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실베스테르가 먹던 홍차를 뿜는다.
늘 단정한 실비가 그런 실수를 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 말이 그렇게 놀랄 말인가, 싶어 에녹을 돌아보자 그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다.
“리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징그럽게!”
나는 소름이 돋는다는 듯 닭살이 오소소 돋은 팔을 쓸어내리는 에녹에게 눈을 흘겼다.
“징그럽긴 뭐가 징그러워. 아빠도 새 인생 살아야지.”
아빠의 팔을 꼭 껴안으며 내 고개 위로 침중한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리니 네가 엄마가 없어서 외로운 거라면, 부족한 내 잘못이다.”
나는 언뜻 슬프게 들려오는 아빠의 말에 화들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빠랑 오빠들이 있는데 리니가 왜 외롭겠어요!”
황급히 아빠의 뺨에 손을 얹었지만, 그는 이미 잔뜩 주눅이 든 채 어두운 얼굴로 노엘의 초상화를 꺼내 들고 있었다.
‘……아빠 달래려면 오늘은 같이 자 줘야겠네.’
아휴, 혼자 잠 한번 자기 힘들다.
* * *
달그락 달그락.
어색한 식탁 위로 식기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작게 울린다.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각하.”
침묵을 더는 견딜 수 없었는지 아빠의 눈치를 보며 양파 수프만 홀짝이던 헤렌 자작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인다.
“고맙다는 인사는 내 딸에게 하면 되겠군.”
그러자 헤렌의 인사를 받은 가스파르가 그의 옆에서 커다란 바게트를 한 웅큼 베어 문 나를 가리켰다.
“그대를 초대하자고 한 사람이 공녀니까.”
“그, 그러셨습니까? 공녀님께서 어찌 저를……?”
헤렌은 가스파르의 말에 당황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긴, 그와 나는 접점이 별로 없었으니까.’
원로들 중에서도 나와 교류가 활발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헤렌은 늘 내 관심 밖의 사람이었다.
‘교활한데 딱히 머리가 좋지도 않고, 공작 가문을 위한 충성심도 깊지 않지.’
나는 의외라는 듯 두 눈을 크게 뜨는 헤렌을 마주한 채 생긋 눈을 접으며 웃었다.
“한 번 가까이에서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네가 황제와 아이네스 쪽에 붙은 유일한 원로니까.’
나는 속마음을 숨긴 채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공작가의 원로들 중 가장 젊고 유능한 분이시잖아요. 평소 존경하고 있었어요.”
“허어, 공녀님도 참! 과찬이십니다.”
내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헤렌 자작이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는다.
“어머. 옷깃에 먼지가 붙어 있네요.”
“감사합니다, 공녀님.”
나는 그런 헤렌의 옷깃에 도청기 아티팩트를 붙이며 움후후 웃었다.
* * *
“성녀님을 뵙습니다.”
헤렌이 저택을 빠져나가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침대에 걸터앉은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대가 북부에서 유일하게 황실의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라고 들었네. 공작가의 소식도 전해준다지.”
“마침 공작 각하를 뵙고 오는 길입니다.”
“내가 황후가 되면 그대의 공을 크게 치하하겠어.”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제국민으로서 황가에 충성할 뿐입니다.”
애써 숨기려고 하지만, 나는 보지 않아도 헤렌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빠에게는 뇌물이나 아첨이 통하지 않으니까, 황실로 노선을 바꾼 거겠지.’
“북부인들은 자기들끼리 뭉치는 것을 좋아한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자작은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제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하는 데 힘을 보탤 수만 있다면 출신이 중요하겠습니까? 허허.”
“소속에 의미를 두지 않고 객관적인 눈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건 제국민을 이끌 귀족으로서 중요한 덕목 중 하나지. 훌륭하군.”
“네, 성녀님. 각하께서는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거대한 흐름을 읽지 못하시는 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프란츠 말로는 소수 민족들 간의 화합이 잘되어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없다고 하던데?”
“찰나일 뿐입니다!”
성녀의 미심쩍은 목소리에 헤렌은 자신의 계획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는 걸 숨기기 위해선지 과장된 목소리를 높였다.
“어, 언젠간 저열한 본성을 드러낼 자들입니다, 성녀님! 각하께서 순진하시어 그들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지요. 황제 폐하와 성녀님께서는 야만인들의 본성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네만……. 가스파르 하차니아가 순진하다라, 쉽게 믿기진 않는군.”
“군사를 잘 다룬다고 무조건적으로 정사에 밝지도 않습니다, 성녀님.”
헤렌의 다급한 설명에 성녀라고 불린 여자가 흐응, 작게 신음을 흘린다.
“그래. 뭐, 내게 더 보고할 사안은 없는 건가?”
“공녀님께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보고 싶어하신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각하께 재혼을 하실 생각이 없느냐고 여쭤보셨다고 합니다.”
“죽은 어미를 아이가 그리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내게 보고할 건 아니라고 보는데.”
“아뇨. 저는 이를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녀님.”
“기회?”
“예. 공작 부인께서 실종되신 지도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고, 죽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해서 원로들 중에서도 새로 공작 부인을 들이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호오. 새로운 공작 부인이라, 말이 통하는 자라면 가스파르 하차니아에게 붙여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는 도청기 아티팩트에서 흘러나오는 성녀의 나른한 목소리에 입안을 깨물었다.
“곧 사람을 추려 볼 테니, 그대는 그때까지 공작의 신임을 얻는 데 최선을 다하게.”
“명 받잡습니다!”
“위대한 교단의 영광을 위하여.”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위하여!”
그들의 대화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도청기 아티팩트에서 손을 뗀 나는 두 주먹으로 침대를 내려치고 분에 차 씩씩 숨을 내쉬었다.
‘나쁘지 않기는 무슨!’
아이네스가 너무 얌전해서 대신 자작에게 도청 아티팩트를 붙여놓았던 건데, 천만다행이었다.
‘성녀라는 작자가 나타나 이런 일을 꾸미고 있을 줄이야.’
나는 어딘가 나른하게 느껴지는 성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성녀라는 사람이 바로 퀴리오스겠지.’
원작 책에도 아주 잠깐 묘사되었던 인물이었다.
‘아이네스랑은 에티모스의 부활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 같던데.’
적의 적은 나의 편이라고 했던가.
나는 퀴리오스의 이용 가치를 계산하다 생각에 잠겼다.
‘황실이든 교단이든 분열이 일어나고 있는 건 분명해.’
* * *
무슨 이유에선지 소수민족으로 변장까지 하며 하차니아를 찾아왔던 프란츠 황제는 그 이후에도 종종 영지를 방문했다.
“또 오셨네요, 폐하.”
손님이 왔다는 말에 응접실로 내려갔던 나는 익숙한 얼굴에 어깨를 으쓱했다.
“저와 폐하는 딱히 가까운 사이는 아닐 텐데요.”
“무례한 방문인 것은 알고 있어. 다만 짐이 공녀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우물쭈물 단어를 고르는 프란츠를 기다리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자, 그가 망설이다 입을 벌린다.
“내가 황도 밖으로 내쫓은 벨네르니 민족은 정말로 악마의 피를 이어받은 사특한 인간들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