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흥분한 티에리를 간신히 노엘과 떼어 놓은 나는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그녀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공녀는 내가 공녀의 사라진 어머니라고 생각한단 말이지.”
모호하게 얼굴을 굳힌 노엘이 내가 안쓰럽다는 듯 짧게 혀를 찬다.
“아무리 기억이 없다지만, 공녀의 어머니라고 하기엔 내가 너무 젊은 것 같은데.”
“완전히 확신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개발한 아티팩트니까 성능만큼은 믿을 수 있어요.”
나는 자신이 내 엄마일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노엘의 태도에 울컥해 아티팩트를 꺼내 들었다.
신전에서만 할 수 있던 친자 검사를 누구나 할 수 있도록 개발한 아티팩트였다.
‘이걸 내가 쓰게 될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
노엘 가까이에 대자마자 내 피를 머금은 아티팩트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확인했지만, 나는 그녀와 아티팩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마도구를 치워 버렸다.
“하지만 노엘은 기억을 찾고 싶지 않다면서요.”
“난 지금 내 삶에 만족하니까.”
“그래요, 그럼. 지금 제 상황은 잊어도 좋아요.”
노엘이 행복하면 됐다.
어깨를 으쓱한 내가 그녀에게서 물러나는데, 언제 또 쫓아왔는지 모를 티에리가 지팡이를 번쩍 들며 노엘의 등을 내려친다.
퍼억-!
“이 고얀 것!”
티에리의 목소리에는 울분이 가득했다.
“너를 잃고 이 조그만 것이 혼자 살아 보겠다고 얼마나 아둥바둥했는데, 이 망할 것…!”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벌게진 티에리의 얼굴에 나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막아설 수 없어 머쓱한 뒤통수만 긁었다.
‘아니, 아빠도 있고 오빠들도 있어서 딱히 혼자 살진 않았는데.’
게다가 난 엄마에 대한 기억도 없으니까.
“아무래도 이 노망난 노인네가 없는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군.”
티에리의 지팡이를 휙, 휙 얄밉게 피한 노엘이 나를 돌아봤지만,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방긋 웃으며 손을 들었다.
“아뇨. 노엘이 기억을 되찾고 싶지 않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노엘을 포기하려니 목소리가 조금 떨려 온다.
“그냥, 노엘이 잘 지내고 있는 걸 확인했으니 됐어요.”
‘하지만 노엘 이아론이 살아 있다는 게 알려지면 위험해질 뿐이니까.’
“제이크, 이놈아!!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깔끔하게 포기하는 순간, 조금 떨어진 갑판대 위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노엘을 따라간 나는 곧 누군가를 향해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이는 노년의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다신의 저주가 틀림없소. 여자를 선장으로 세워 바다신의 노여움을 산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소!!”
노엘을 발견한 노인이 다짜고짜 그녀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원망한다.
“노엘, 당신이 진정으로 선원들을 생각하는 선장이라면 함선에서 내려 주시오.”
나는 노인이 완장에 찬 표식을 보고 그가 이 배의 1등 항해사라는 사실을 유추하며 혀를 짧게 찼다.
‘1등 항해사가 선장보고 배에서 내리라니.’
“선장은 배와 운명을 함께한다, 올랜도.”
올랜도라고 불린 노인의 손을 가볍게 떼어 낸 노엘은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대신 아프거나 나를 따르고 싶지 않은 선원들은 이 항구에서 내려도 좋다. 보수를 넉넉히 챙겨 줄 테니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모두에게 하는 말 같았지만, 그녀는 갑판에 기댄 채 피를 토하고 있는 소년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 싫습니다!”
노엘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걸 눈치챈 소년이 피범벅이 된 입가를 닦으며 외친다.
“저는 이 배와 운명을 함께하기에 바다로 나온 사람입니다! 죽어도 배 위에서 죽겠습니다!!”
“미친놈! 선장이 허락하시지 않느냐! 네놈은 당장 내려서 치료부터 받아야 한다!”
“그래. 올랜도와 함께 하선해라.”
소년과 노인을 돌아본 노엘은 언뜻 차갑게 느껴질 만큼 무심하게 명령하며 뒤를 돌았다.
“저 올랜도라는 노인, 배에 꼭 필요한 인재인 거죠?”
그녀를 종종걸음으로 따르며 내가 묻자, 노엘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운다.
“어떻게 알았지?”
“노엘이 그 사람이 내린다고 했을 때만 움찔했으니까요.”
“그래. 선원의 반을 잃은 상태로 무사히 이 항구에 정박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올랜도의 노련함 덕분이니까.”
‘그럼 도와줘야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서둘러 짐을 꾸려라, 이놈아.”
“할아버지! 저는 선장님을 두고 배에서 내리고 싶지 않아요!”
“그럼 배 위에서 죽겠다는 게야? 이 미련한 놈!”
나는 버럭 목소리를 높이는 올랜도와 소년 사이에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방긋 웃었다.
“손자분의 병을 제가 치료해 드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하선은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나를 발견한 올랜도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내가 소년에게 닿지 못하게 팔을 뻗는다.
“너 같은 어린아이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내로라하는 의사들도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병인데 무슨!”
‘옮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겠지. 역시 나쁜 사람은 아니야.’
나는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조금 피곤한 정도였죠? 시간이 지날수록 입맛도 사라졌을 테고, 무릎이나 어깨 같은 곳이 뻐근했을 거고요.”
“어, 으응……. 그랬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피가 잘 멎지 않는 증상이 나타났을 거라는 거예요.”
“……!”
나는 내 말에 휘둥그레 커지는 소년의 눈동자에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그 병이 맞았어.’
군인이었을 적 배워 둔 여러 가지 상식은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이래도 저 같은 어린애 도움은 필요 없으신가요?”
“저 아이가 말한 증상이 정확해요, 할아버지.”
소년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올랜도를 돌아보자, 노인은 미심쩍은 눈을 하긴 했어도 내가 건네는 약병을 뿌리치진 않았다.
“먹여 보세요. 하루 안에 병증에 차도가 없다면, 그때는 하선하셔도 말리지 않을게요.”
“내, 내가 뭘 믿고 아픈 손주놈에게 이런걸-”
“아, 잠깐만요.”
나는 노인의 말을 끊으며 주머니를 뒤졌다.
“제 신분패예요.”
내 신분을 먼저 알아본 사람은 올랜도가 아닌 소년이었다.
“하, 할아버지! 얼른 허리부터 숙이세요!!”
소년은 크게 당황하며 허둥지둥 노인의 등을 팍팍 눌러 댔다.
“하, 하차니아의 막내딸이라면, 그 유명한 레오노라 공녀님이잖아요! 무려 황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나는 허둥대는 소년이 귀여워서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무리 귀족이라도 그저 어린아이일 뿐이지 않느냐!”
“할아버지, 그런 말 하시지 말아요! 레오노라 공녀님은 세 살부터 여러 마도구랑 신통방통한 약 개발에 성공한 천재 중의 천재라고요!!”
나는 소년의 말에 민망해서 뒷머리를 긁은 다음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어쨌든 신분은 믿어 주는 거죠?”
“누가 감히 공작 가문의 신분을 위조할 수 있겠습니까. 믿습니다.”
“만약 병이 더 악화된다면 내 가문에서 책임지고 신관이든 의사든 보내 줄 거고, 효과가 없었다면 낭비한 시간은 돈으로 보상할게요.”
아픈 손주를 조금이라도 빨리 하선시켜 의사에게 보이고 싶을 터였다.
‘하지만 내가 아는 바로, 아직 이 세계에서는 소년이 아픈 원인을 찾을 수 없을 거야.’
“좋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딱 하루만 지켜보겠습니다.”
나는 나를 믿고 하선을 하루 뒤로 미루겠다는 올랜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를 믿어 줘서 고마워요.”
“제, 제게 고개를 숙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제야 이성을 찾았는지 당황한 노인이 손을 내저었지만, 나는 밀려나지 않고 노인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대신 약속해 주세요. 당신의 손주가 제 약으로 차도가 있었다면 같은 증상을 앓고 있는 선원들에게 약을 배분해 주세요.”
“당연하지요. 치료제가 있는데 뭐하러 감추겠습니까? 공녀님의 공을 사방에 알리겠습니다.”
“아뇨, 제가 줬다는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내뱉는 말에 올랜도의 두터운 눈썹이 휙 올라간다.
“어째서? 선장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나는 올랜도를 향해 생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바다를 향해 나아갈 땐 자유로운 게 제일 좋잖아요.”
“…….”
“항구를 떠날 때 노엘의 어깨가 가벼웠으면 좋겠어요. 다시 육지로 돌아오고 싶지 않을 만큼요.”
내게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면, 그녀의 성정상 반드시 나를 또 찾아오려고 들 테니까.
“엄, 아니, 노엘을 잘 부탁해요.”
올랜도는 내 부탁에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