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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213)화 (448/486)

제213화

눈을 떠도 감은 것만 같은 밤의 장막이 찾아온다니, 누가 봐도 세상이 멸망할 거라는 예언 아닌가.

“세상이 멸망해도 자신들만 구원받으면 된다고 생각하긴 하겠지만.”

성전에 드나들면서 교단원들의 생태계를 대강 파악한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쓸었다.

‘구성서에 따르면 아이네스의 역할은 에티모스를 부활시킬 힘을 모을 구심축이었지.’

어둠이 찾아들 수 있을 만한 ‘오망성’을 구축하는 태양.

연금술에서 오망성은 에너지를 뜻했고, 이 세계에서 에너지란 에테르나 마나였다.

태양이 하늘 정중앙에 떠올랐을 때.

‘이건 아이네스가 성년이 되는 날을 의미하는 것일 테고.’

내가 직접 해석한 성서를 펼쳐 든 나는 마음에 걸리는 문장 하나를 손끝으로 짚으며 미간을 좁혔다.

지금 내가 열두 살, 그러니까 아이네스는 열한 살이었다.

‘7년이란 시간이 주어진 셈이지만, 성서만 믿고 있을 순 없어.’

나는 그 안에 아이네스의 계획을 완전히 저지해야 했다.

하지만 아이네스가 성년이 되는 것보다는 내 몸이 루에르병을 견디지 못하고 못 쓰게 되는 게 먼저일 것 같은 예감에 뒷목이 오싹해진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지만, 내게 남은 시간은 절대 7년이 아닐 거야.’

발병 초기처럼 갑작스러운 현기증이나 두통은 사라졌지만, 몸 안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게 확연하게 느껴졌으니까.

셀레네와 아이네스의 동태를 살핀 후 성전을 무사히 빠져나온 나는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룰루를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룰루, 자카리 오라버니에게선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어?”

“아무래도 연락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신 것 같아요.”

내 물음에 난처한 기색을 보인 룰루가 미적미적 고개를 끄덕인다.

“자르파라 님이 용병을 파견했다고 하셨으니, 너무 염려 마세요.”

룰루는 내가 장남인 자카리를 걱정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자카리의 신변은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외전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전부 기록되고 있는걸.’

위치가 묘사되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자카리는 차근차근 서브 남주의 루트를 밟으며 남주인 트리스탄과 경쟁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고 있었다.

‘최근에는 요정왕을 만난 것 같던데…….’

트리스탄의 기본 능력치가 높아져서인지, 자카리도 원작보다 더 빠르게 성장 중이었다.

“나보다는 룰루가 더 심하게 걱정하는 것 같은데.”

나는 내 안색을 살피는 룰루에게 농담처럼 웃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 마. 자카리는 무려 흑랑을 이끌던 기사잖아.”

“알겠어요, 아가씨. 참! 미르탄 라일에게서 서신이 도착했어요.”

나는 발랄한 룰루의 목소리에 그녀가 내민 파란색 봉투를 주욱 뜯어 냈다.

[ 보름 후 자정, 아멜론 항구로 와 주십시오. ]

‘아멜론 항구?’

아멜론 항구는 북부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항구 중 하나로 아리나 해협과 맞닿은 곳이자 노엘이 제독으로서 마지막 항해를 떠났던 곳이었다.

노엘을 잃은 이후 가스파르가 분명 폐쇄시켰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 하필이면 아멜론 항구로 오라는 걸까.

‘뭐, 가 보면 알겠지.’

* * *

미르탄이 부탁한 대로 아멜론 항구를 찾은 나는 망자의 무덤처럼 보이는 쓸쓸한 항구에 정박된 유일한 함선을 발견하고 두 눈을 가늘였다.

‘깃발은 없고, 정면을 장식한 조각상은 세이렌이네.’

전형적인 해적의 함선이었다.

노엘을 찾아오라니까 웬 해적인가 싶어 함선 근처를 기웃거리는데, 뱃머리에서 익숙한 인영이 툭 튀어나와 내게 손을 흔든다.

“오랜만이군, 공녀.”

“……노엘?!”

검은 선장 모자를 쓴 여자는 분명 노엘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조금 더 나이 든 얼굴의 여인이 빠르게 뛰어내려 내 앞에 착지한다.

“날 찾았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지?”

나는 적당한 호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나를 향한 애틋함이나 그리움은 전혀 느낄 수 없는 그녀의 담백한 목소리에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기억을 되찾지는 못한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아예 잘못 추측한 걸 수도 있었다.

“일단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그녀가 정말로 내 잃어버린 엄마이든 아니든, 나는 사지 멀쩡한 노엘의 모습에 한숨처럼 웃었다.

“해적이 되었을 줄은 몰랐는데요.”

“왜 ‘되었다’고 생각하지? 원래 해적이었다는 상상은 하지 않는 모양이군.”

나는 진담인지 농담인지 가릴 수 없는 노엘의 말에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제독에서 해적이라, 직종 변경이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닌가.’

“그런데 선원은 몇 명 없나 봐요.”

“해협을 건너는 중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다들 픽픽 쓰러져서 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노엘은 짧게 대꾸하며 내게 손을 뻗었다.

휘릭-!

그새 몸을 더 단련했는지, 나를 인형처럼 안아 든 노엘이 밧줄을 잡고 배에 오른다.

“아픈 선원이 아직도 배에 있는 거라면 제가 상태를 살펴도 될까요?”

원작에 선원이 걸리는 병에 대해서 언급된 적은 없지만, 뱃사람이 앓는 병이라면 몇 종류 되지 않았으니까.

“마침 갑판에 누워 있군.”

나는 노엘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갑판에 누워 있는 소년에게 다가섰다.

“으윽, 선장님. 오셨어요…….”

소년은 기운이 잔뜩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와중에도 노엘에게 인사하기 위해 애써 몸을 움직였다.

‘잇몸에서 피가 나고 있네. 피부도 일어났고.’

“됐으니 누워 있어.”

나는 피멍이 얼룩덜룩한 소년의 몸을 살피다 그에게 다가서는 노엘을 올려다보았다.

무뚝뚝하지만 나를 대할 때보다 훨씬 다정한 목소리였다.

문득 심장이 욱신거려 노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그녀가 나를 돌아본다.

“그나저나 공녀, 나를 찾은 이유는 내게 원하는 바가 있어서인가?”

그렇지 않다면 내가 자신을 찾을 리 없다는 듯한 무심한 목소리에 나는 손가락만 옴질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아뇨, 꼭 그런 건 아니에요.”

“괜찮으니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도 좋아. 공녀는 나와 레이첼의 목숨을 구해 줬으니, 힘이 닿는 데까지는 돕고 싶다.”

정중하지만 감정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무적인 어투에 나는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노엘, 올해로 몇 살이라고 했죠?”

‘나와 아이네스의 배동 선발전에 참가했을 당시에는 열여덟이라고 했었는데.’

“글쎄. 나는 섬에 버려지기 전까지의 기억이 없다. 그래서 정확한 나이는 몰라.”

내 질문이 뜬금없다는 듯 노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한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싶지는 않고요?”

“딱히.”

“어째서요?”

“몇 번이고 떠올리려고 시도해 봤지만, 그때마다 불쾌한 감정만 남더군.”

“……불쾌한, 감정이요.”

“그래서 기억할 만한 과거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악의 없이 내뱉은 말이겠지만, 노엘의 말에 차갑게 얼어붙은 호수에 몸이라도 담근 듯이 발을 움찔하게 된다.

“레오노라, 잠깐 비켜서 보거라.”

나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엄중한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하, 할머니!”

혹시라도 티에리를 보면 노엘이 제 과거를 떠올릴까 싶어서 나는 그녀를 항구로 불러냈었다.

“……노엘?”

티에리라도 노엘을 단박에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가스파르가 알아보지 못했으니까-, 놀랍게도 티에리는 노엘의 정체를 알아본 듯싶었다.

“너는 노엘이 아니냐!”

당황한 얼굴로 입만 벙긋하던 티에리가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며 노엘을 가리켰으니까.

“이 못난 것!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게야!”

나는 티에리의 외침에 두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녀와 노엘을 번갈아 보았다.

‘노엘은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데다 외모까지 다른데 어떻게 알아본 거지?’

“당신은 누구지?”

그러나 발갛게 달아오른 티에리의 얼굴이 노엘의 서늘한 물음에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뭐, 뭐라고?”

“난 당신을 알지 못한다.”

나는 노엘의 단호한 말에 안절부절못하다 앞으로 나섰다.

“잠깐만요, 노엘! 제가 설명할게요!”

‘할머니, 상황 설명도 못 듣고 오셔서 분명 상처받을 텐데!’

당황한 내가 티에리를 가로막는 것도 잠시, 내 어깨를 누른 티에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망한 웃음을 짓는다.

“노엘이 확실하구나, 레오노라.”

“……네?”

“이 버릇없는 말투며, 나를 모른 체하는 태도 하며. 내 딸임이 분명하다. 내가 재혼했을 때, 노엘은 나를 분명…….”

나는 딱히 충격을 받은 것 같지 않은 티에리의 태도에 다른 의미로 몸을 굳혔다.

“내가 제 딸이라니, 노망난 노인네였군.”

“그래, 저렇게 불렀었지.”

“뭐라고요?!”

‘우리 엄마가 이렇게 싸가지가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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