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정말 이 방법으로 미르암 민족을 조종할 수 있는 거 맞아?”
거미줄처럼 얇은 실가닥을 붙든 아이네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그녀에게 공손히 읍한 파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미르탄 라일은 내 뜻대로 완전히 움직여 주지 않았잖아!”
아이네스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파리스는 미르탄 라일이 우악스레 여자의 목을 움켜잡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난 그는 여자에게 사과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배상금을 논할 정도로 깊이 반성해, 상황을 모면했다.
“자신의 몸이 조종당했다는 걸 느꼈을 텐데도 마치 예상한 것처럼 차분하게 대응했다고!”
“그는 정신력이 뛰어난 기사니까요. 끝까지 황녀 전하의 제어를 거부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파리스는 아이네스가 집어 던진 투명한 실뭉치를 집어 들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원래는 실제로 마주한 채 금술을 걸었어야 합니다. 그러질 못해 머리카락으로 영혼의 정보를 읽다 보니 금술의 힘이 미약하게 발휘되는 듯싶습니다.”
아이네스는 파리스의 설명이 탐탁지 않았지만, 율리아도 죽은 마당에 그녀가 믿을 만한 인물이 몇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별 이유 없이 교단원을 처분하면 아무리 내가 헬리오스라도 책망을 받게 되겠지.’
어깨를 으쓱한 아이네스는 스스로를 타이르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어느 수준의 명령까지 시킬 수 있는 건데?”
“미르탄 라일 본연의 도덕성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는 행동을 강제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 행동이나 무의식에 거부감을 느끼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릴 겁니다.”
아이네스는 파리스의 설명에 아쉽다는 듯 입을 벌렸다.
“야만인답게 검이라도 잡고 날뛰게 할 생각이었는데, 그런 건 못 시키겠네.”
마도 왕국 아크레아의 금술이라더니 흑마법을 이용한 저주보다도 위력이 약했다.
‘아니면 파리스가 알아낸 금술이 제대로 된 게 아닐 수도.’
“미르탄 라일을 이용해 북부의 수원에 독을 타는 건 어떻습니까? 이민족들 때문에 물의 공급이 끊긴 것이 알려진다면 북부인들이 크게 반감을 드러낼 것 같은데요.”
아이네스가 자신을 의심하든 말든, 파리스는 대책을 세우기 바빴다.
“교단의 목표는 소수민족의 말살이었지, 그들을 몰아내 북부에 터를 잡게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파리스는 황실보다는 교단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아이네스조차 교단의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황실을 움직이는 도구일 뿐. 헬리오스라는 직책을 방패 삼아 현자인 율리아까지 멋대로 처분한 사람이니 제대로 감시해야겠지.’
그의 말에 기다란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아이네스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북부인들이 아무리 관대한 척한다고 해도, 막상 진짜 피해를 입게 되면 본성을 드러내겠지.”
자애로움, 양심이란 원래 그토록 연약한 것들이었으니.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그들이 한곳에 뭉쳤는데도 별다른 분란이 일어나지 않은 건 그들을 먹이고 재워 주는 레오노라가 있기 때문이질 않겠나.
‘그러니까 결국 레오노라, 그 계집이 문제인 거야.’
아이네스가 탐낼 수밖에 없는 마나를 가졌다는 이유로 그동안 너무 봐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에티모스만 부활하면 레오노라의 마나 따위 필요 없어.’
“우물에 독을 풀고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전부 교단의 단상에 바치도록 해. 에티모스가 돌아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 * *
“꽤나 만반의 준비를 한 모양이군.”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나를 지켜보던 루카스가 뚜하니 한마디를 내뱉는다.
“하차니아를 독립국으로 만드는 건 내 오랜 꿈이었으니까.”
나는 구석에 가만히 앉은 곰인형을 덥석 안아 올리며 대답했다.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섞어 버리는 게 가장 빠른 지름길이긴 하겠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야. 문학과 예술을 통해 교류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게 안전할 거라고 생각해.”
미르암의 문화는 충분히 퍼뜨렸으므로 오늘은 미르암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의 구역에서 교류를 목적으로 한 연회를 열 생각이었다.
“그래도 맞지 않는다며 다투는 사람들은 분명 생길 거다.”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같은 북부인들끼리 모여 있다고 영지 내에서 다툼이 없는 건 아니잖아.”
내 대답이 충분하지 않았는지 보송보송한 곰인형의 이마가 일그러진다.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레오노라.”
“최대한 조심할게. 다음에 더 얘기해.”
원작 책으로 아이네스의 다음 수를 알아낸 내게는 루카스와 입씨름을 할 시간이 없었다.
‘도개교를 에워싼 호수는 전부 감시하라고 말해 놔야겠어.’
쿵!
헨리를 찾기 위해 성을 빠져나온 나는 급하게 걸음을 옮기느라 코너에서 튀어나온 인영을 보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아야!”
넘어진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는지, 나와 부딪쳐 엉덩방아를 찧은 소년이 우악스레 목소리를 높인다.
“뭐야,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나는 소년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얼굴을 돌렸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뭐, 뭐, 뭘 봐!”
내 시선에 당황한 듯한 소년이 화르륵 붉어진 얼굴로 입을 벌린다.
“미안해요. 다친 데는 없어요?”
나는 크게 당황한 듯한 소년에게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내 손길을 거부하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없어! 없으니까 다가올 필요 없다고!”
‘……안 다친 거 맞나? 볼이 새빨간데.’
나는 누가 봐도 외부인처럼 보이는 낯선 소년의 행색에 눈을 가늘이며 그에게 다가섰다.
외부인을 잔뜩 받아들인 상황이라 작은 신호에도 가시를 곤두세워야만 했다.
“열이 나는데요?”
아이네스는 미르탄 라일을 이용해 죄 없는 영지민들이 사용하는 우물에 독을 탈 생각도 하는 사람이었다.
‘아이네스가 역병도 같이 퍼뜨리려고 하는 거라면?’
그녀가 고로나를 이용해 소수민족을 탄압하려 했던 과거를 떠올린 나는 나를 피해 뒤로 물러나는 소년이 의심스러워 성큼성큼 다가섰다.
“왜 도망가세요?”
“오, 오지 마! 이 몸에게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그럼 그쪽이 따라와요. 북문을 개방하면서 질병 관리를 맡은 의료인들을 각 구역마다 파견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나는 수상할 정도로 나를 피하려고 드는 소년의 손을 잡고 가장 가까운 의료원의 문을 두드렸다.
“이, 이 손…!”
“네?”
“손 좀 놔!!”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개진 소년의 외침에 그제야 그를 놓아주었다.
“힐다, 나랑 길 가다 부딪힌 사람인데 열이 나는 것 같아. 좀 봐줄래?”
때마침 서류를 보고 있던 힐다가 내 부탁에 체온계를 든 채 소년에게 다가선다.
“으음. 열이 조금 나는 건 맞지만 아픈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공녀님.”
소년의 몸을 꼼꼼히 살핀 힐다의 말에 화들짝 놀란 소년이 나를 돌아본다.
“뭐! 네가 공녀라고?!”
“네.”
“뭐야! 소문보다 훨씬!”
“네?”
“아, 아니야.”
나는 내가 공녀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끝까지 하대를 고수하는 소년의 태도에 두 눈을 가늘였다.
‘녹안이라면 소수민족 중에서는 란테족의 특징이었지.’
란테족은 산골짜기에 숨어 사는 집단이었으니 내게 반말을 한다고 화낼 수는 없었다.
“병이 아니라니까 다행이네요. 란테 구역에 가려던 거죠?”
“……그래.”
“그럼 조심해서 가요.”
소년이 병에 걸린 게 아니라는 걸 확인했으니, 나는 다시 헨리를 찾으러 가 봐야만 했다.
“잠깐.”
의료원을 나서려는 나를 붙잡은 소년이 잎사귀처럼 새파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너는 왜 소수민족을 북부에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거지?”
아까 루카스가 내게 물으려던 질문과 비슷했다.
왜, 지금 내 손해를 감수하면서 남을 도우려고 하냐고.
“가끔은 손을 내미는 게 답일 때가 있으니까요.”
“뭐?”
“믿기 어렵겠지만, 그럴 때가 있어요.”
* * *
미르탄 라일을 당장 움직일 생각은 없는지, 그는 우물은커녕 도개교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았다.
‘아이네스가 잠잠한 게 이상한데. 황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 순간, 오늘 자 일간특급을 거머쥔 룰루가 헐레벌떡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황제가 황후를 맞이하겠다고 공표했어요, 아가씨!”
“황후를?”
“네, 아가씨! 특이한 게 이번에는 알레테이아 교단의 성녀 또한 후보 명단에 올랐더라고요.”
나는 룰루의 말에 의아한 눈살을 찌푸렸다.
알레테이아 교단은 여태 물밑에서만 활동하던 비밀 집단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황후를 통해 알레테이아교의 입지를 루엘라드교만큼 키우려는 건가?’
“저, 근데…….”
“응?”
“아가씨 이름도 후보에 있어요.”
“뭐?”
룰루의 말에 당황한 나는 기가 막혀 그녀의 손에 든 일간특급을 펼쳐 보았다.
‘프란츠 황제는 아주 어릴 때 한 번 본 게 다인데?’
루카스, 어떻게 생각해?
룰루의 시선을 피해 루카스를 돌아본 내가 눈으로 묻자, 곰인형이 작은 어깨를 털썩 들어 올린다.
뭐가?
이상하잖아. 황실은 하차니아가 특별 자치령으로 분리된 순간부터 이를 갈고 있을 텐데 황권을 나눠 줘야만 하는 황후 자리에 나를 앉힐 이유가 없어.
그때, 루카스가 털이 보송보송한 앞다리로 방 한구석에 놓인 거울을 가리켰다.
‘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