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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208)화 (443/486)

제208화

파리스는 명목상으로는 프란츠 황제의 비서관이었지만, 아이네스를 위해 움직이는 교단원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세계를 거쳐 온 아스테르라더니, 하는 짓도 특이하군.’

파리스로서는 제국이 버린 패,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소수민족들을 대거 받아들이겠다는 북부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벨네르니 민족이든 미르암 민족이든, 결국 윌레탄 왕국이 윌레닌 제국으로 칭제하는 과정에서 짓밟힌 나라와 땅에 살던 패배자들이 아니던가.

‘영토를 갑작스럽게 넓힌 반발을 막기 위해 허울뿐인 국적을 줬을 뿐, 진정한 윌레닌의 국민은 아니었지.’

끓는 점을 지나지 않았을 뿐 프란츠 황제의 차별 정책은 예견된 일이었다.

국교인 루엘라드교조차 신관을 뽑을 때 소수민족을 받지 않았으니까.

‘우리 알레테이아 교단은 윌레탄 민족이 아니라면 교단원조차 될 수 없으니 두말할 것도 없지.’

오직 중앙에 뿌리를 둔 나의 자식들만이 구원받으리라.

교단의 핵심 교리를 떠올린 파리스는 북부에서 터전을 잡아 보겠다며 아등바등 짐을 옮기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다 옆을 힐끗했다.

“폐하께서 지시하신 일은 잘되고 있는 겁니까, 자작님?”

그의 물음에 그제야 파리스의 존재를 눈치챈 헤렌 자작이 화들짝 놀라 파리처럼 두 손을 모은다.

“아아, 파리스 님! 그럼요, 제가 요즘 자금이 조금 부족하긴 합니다만 폐하를 위해 아낌없이 주머니를 열었습니다.”

“돈으로 소수민족의 회유가 가능했다는 말씀이십니까?”

“후후. 야만족놈들이 돈의 가치를 알겠습니까? 관리들을 공략했지요.”

헤렌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의심쩍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파리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대부분 비천한 피를 타고난 천한 것들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관리가 소홀해도 제 버릇 못 숨기고 날뛸 게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게다가 소수민족들 중에서 하차니아 같은 고위 귀족을 미워하는 놈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놈들을 부추기는 건 아주 쉬운 일이죠.”

헤렌의 주장에 파리스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완전히 설득당한 눈치는 아니었다.

‘황제의 보좌라 그런지 의심이 많구먼.’

헤렌은 아무리 황제의 측근이라 할지언정 자신보다 어린 파리스에게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상황이 탐탁지 않았다.

‘입궁하고 나면 폐하께 이놈 대신 나를 곁에 두시라고 충언을 드려야겠다.’

자신은 적재적소에 주머니를 풀어, 더러운 야만족과는 말 한 번 섞지 않고 황제가 원하는 분란을 만들어 냈다.

‘아까 부하놈이 미르암 민족 구역이 아주 난리가 났다고 보고를 올렸었지.’

미르암은 헤렌이 뇌물을 먹인 용병대가 관리하는 민족이었다.

헤렌은 자신의 성취에 취해 어쩔 줄 몰라 파리스를 이끌었다.

“뭐, 이왕 오셨으니 구경하다 가시죠. 아주 아수라장일 겁니다.”

자랑스레 파리스를 대동하고 미르암 구역을 방문한 헤렌은 곧 의문 가득한 파리스의 시선을 받아 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풍경이 자작님께는 아수라장으로 보이십니까?”

파리스가 가리킨 곳에는 임시로 만든 광장이 있었고, 그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든 사람들이 이국적인 집시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어떻게 이토록 평화로울 수가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돼!’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네?”

“아까 내게 분명 미르암 민족 구역에 소동이 있다 하질 않았어?!”

자작의 호통에 부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퉁명스레 대답했다.

“아뇨,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고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

“공녀님께서 직접 예술인들을 고용해 작은 가든파티를 열자고 제안해 주셨거든요. 사람들이 힘든 상황도 잊고 신이 나서 난리입니다.”

* * *

북부에서 받아들인 소수민족은 민족만 따져도 여섯이 넘었고, 뿌리는 같아도 다른 지역으로 갈라져 언어까지 다른 집단도 존재했다.

‘제국이 넓긴 넓네. 이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고 있었다니.’

나는 윌레닌을 제국으로 칭제한 초대 황제의 업적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렇게 무작정 영토만 넓혀 봤자 지금처럼 금방 분열되었을 텐데 뭐하러 대륙 전쟁을 벌인 거지? 다른 목적이라도 있었던 건가?’

“헨리, 민족별로 거주지가 정해지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

북부는 땅덩어리는 넓었어도 인구가 부족해 남는 땅이 많은 지역이었다.

그럭저럭 자급자족이 가능한 영토를 골라낸 나는 지도를 가리키며 헨리에게 턱짓했다.

“황도에서 서로 어울려 살던 사람들도 있지만, 각기 다른 영지에 틀어박혀 교류가 없던 집단도 적지 않아. 트러블은 피할 수 없을 거야. 트러블을 피하려면 사람들의 협조가 필요해.”

“그거야 각 민족의 수장들을 불러서 단속을 시키면 되는 거 아닌가요?”

“수장도 수장이지만, 예술인들의 도움이 더 필요할 거야.”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헨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예술인들이요?”

“응. 그리고 다른 민족의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랑 종교 지도자들도.”

윌레닌 제국의 국교는 루엘라드교였지만, 아이네스를 포함해 알레테이아교를 섬기는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소수민족 중에서는 종교가 없거나 자신들이 원래 섬기던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살던 곳에서 쫓겨나다시피 도피해 우리 영지로 온 거잖아.”

“아무리 북부가 돕겠다고 나섰다고 해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들이겠죠.”

“꽤 큰 난관을 함께 마주한 셈이니 다른 민족이어도 유대감을 쉽게 형성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 거야.”

공동의 적을 둔 사람들은 친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경우에, 공동의 적은 프란츠 황제와 황실이겠지.’

“공녀님께서는 그 유대감을 본격적으로 키우실 생각이신 거고요?”

“응. 고유의 예술성과 종교를 인정해 주면 북부가 자신들을 수용해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음악이 가장 발달된 민족인 미르암 구역에서 주기적인 연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집은 따뜻하고, 음식은 맛있고, 들려오는 노래까지 좋으면 갈 곳 잃은 사람들의 마음이 풀어지는 건 시간문제였으니까.

* * *

헤렌의 생각대로 소수민족 중에서 대귀족을 믿지 않거나, 하차니아도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서 자신들을 받아 주는 게 아니겠냐고 의심하는 자들의 수가 적지는 않았다.

“자작님 말씀이 그르지 않습니다. 공작가가 우리를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북부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소수민족들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며 제국이 그들을 버린 것처럼 북부도 그들을 버릴 것이라는 헤렌의 주장에는 분명 일리가 있었다.

“저희야 어딜 가든 힘이 없는 소수이질 않습니까.”

“그래! 자네들의 사정을 이해하는 내가 자금을 댈 테니까 지금이라도 자네들이 힘을 모아 봉기하면……!”

“하지만 공작가가 우리의 편의를 이토록 봐주고 있는데 괜히 소란을 일으켜 은혜를 원수로 갚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미르암 구역에서 열린 연회에 참여한 헤렌 자작이 분란을 만들기 위해 용을 썼지만, 레오노라가 집집마다 깔아 준 뜨끈뜨끈한 온돌에서 빵처럼 구워지는 사람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하기만 했다.

“귀찮기도 하고……. 사실 원래 살던 집보다 공녀님이 마련해 주신 이 집이 더 좋습니다.”

온돌에 달라붙은 남자의 말에 미르암 구역에 놀러 왔던 벨네르니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친다.

“맞아요. 제국이 대충 황도 구석에 마련해 준 판자촌보다는 훨씬 좋지요.”

“온돌도 있고, 북부에서 남부보다 더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질 않습니다.”

“아! 공녀님께서 미르암의 문학이 발달한 편이라고 우리 구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해 주셨는데, 아시는 책인가요?”

벨네르니 여자의 발랄한 물음에 미르암 남자가 씨익 웃으며 현악기를 튕긴다.

“미르암 출신 작가 진의 소설이군요. 제가 무척 좋아하는 책 중 하나입니다. 다 읽으신 후에는 이 책을 읽어 보십시오.”

“네. 들려오는 선율이 아름답네요. 전통 음악인 걸까요?”

여자는 레오노라가 귀띔해 준 대로 미르암의 음악을 칭찬하며 넉살을 떨었다.

‘공녀님이 미르암 민족이랑 친하게 지내면 좋겠다고 하셨지.’

벨네르니 민족은 역병을 몰고 다닌다는 소문 탓에 다른 사람들과 좀처럼 접점을 만들지 못했었다.

황도에서 한 번, 이렇게 북부에서 두 번씩이나 자신들에게 손을 내밀어 준 공녀에게 은혜를 갚기는커녕 배신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도에서는 좀처럼 연주하지 못했지요. 황도 귀족들은 집시의 음악이 사특함이 깃든 음악이라 생각하니까요.”

여자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남자는 본격적으로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음악은 통역이 필요 없는 언어라는 말도 있지요.”

여자가 덧붙인 말에 사람들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미르탄 라일이 자리에서 일어나다 고꾸라진다.

“헉!”

쿠웅-

쿵! 쿵!

“어머, 남작님! 괜찮으세요?”

심장이 격동하는 소리에 놀란 여자가 쓰러진 미르탄에게 다가선 순간,

죽여.

죽여.

죽여.

“꺄아악!”

그가 여자의 목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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