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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206)화 (441/486)

제206화

가을에 접어들자 프란츠 황제의 차별 정책이 본격적으로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황군이 앞장서서 윌레탄 민족을 제외한 소수민족 탄압을 이끌었다.

벨네르니 민족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사람들은 귀족이라고 봐주지 않고 척살당했기에 제국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북부의 문을 전부 개방하라.”

공작성의 가장 높은 첨탑 위에 원로와 가신을 소집한 아빠가 착잡한 얼굴로 도개교를 가리킨다.

“오늘부로 우리는 5대 귀족 가문 가주의 권한으로 하차니아의 자주권을 주장하겠다.”

자주권.

제국의 영주들은 어느 정도 독립성을 가지긴 했으나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지는 못했다.

아빠의 파격적인 선언에 입술만 달싹이는 원로들 중 늘 눈에 거슬리던 한 명이 튀어나와 인상을 찌푸린다.

“위험합니다. 폐하께서 각하의 이번 결정을 좌시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차니아의 봉신인지 황실의 끄나풀인지 헷갈리는 헤렌 자작의 발언에 아빠는 미끈한 손가락을 들어 올려 제 관자놀이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폐하의 오만을 좌시하지 않겠다 전하라. 어차피 그대는 이 자리를 벗어나 황도로 향할 것이 아닌가.”

짧게 대꾸한 아빠의 무감한 얼굴에 그제야 자신이 가주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걸 깨달은 헤렌 자작이 표정을 굳힌다.

“헤렌 자작, 그대는 요즘 자작령을 돌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황실에만 드나든다지.”

“북부를 위해 황도의 분위기를 살폈을 뿐입니다!”

헤렌 자작이 억울하다는 듯 대답했지만, 이 자리에 그의 결백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제국의 역사가 천 년. 벨네르니 민족이든 미르암 민족이든 윌레탄 민족이든 이 땅에 섞여 들어 산 지 천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의 주장을 들은 체 만 체 무시한 아빠가 원로들을 향해 장검을 높이 치켜든다.

“경들은 영광된 제국 하늘 아래에서 태어나, 여신 루엘라를 섬기는 자들을 이제와 민족으로 구별해 핍박하는 게 마땅하다 생각하는가.”

아빠의 엄한 꾸중에 가신과 원로들이 무언가 결심한 듯 주먹을 움켜쥔다.

“그렇게 생각하는 졸렬한 이는 북부인의 자격이 없습니다!”

“예, 각하! 민족이 다르다고 내칠 게 아니라, 그런 어리석은 자들부터 북부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물론 내가 하차니아를 독립시키자고 초석을 깔아 놓긴 했지만, 나 혼자서는 고집 있는 원로들을 완전히 설득하는 게 불가능했다.

“북부에 영광을!”

아빠의 한마디에 일제히 부복한 가신들이 눈을 빛낸다.

“북부에 영광을!!”

‘우리 아빠 최고…!’

아빠는 북부인의 긍지를 자극해 그런 원로들의 의견을 통합시켰다.

그것도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나서서 말이다.

아빠는 약자에게는 한없이 약하지만, 강자에게 쉬이 굴복하지 않는 성정의 사람이었다.

황제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귀족으로서의 자각은 있었지만, 제국민을 핍박하는 황제의 도 넘은 행동을 더는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헨리, 현재 북부에 모여든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돼?”

“10만이 넘습니다, 아가씨. 앞으로 넘어올 사람의 수도 대략 10만은 되는 것 같고요.”

얼마나 괴롭혔으면 20만이 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제 고향을 버리고 척박한 북부를 찾았겠는가.

나는 헨리의 대답에 착잡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존 북부 영민을 합하면 황도보다 많아지는 거네.”

영지의 인구가 황도보다 많아지면 해당 영지는 독자적인 자율성을 행사할 권리가 생겼다.

‘그러니까 황실은 하차니아의 독립 선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야.’

황실에 반기를 드는 영지가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결국 자신들이 초래한 결과였다.

‘각각 다른 문화를 지닌 사람들을 전부 받아들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나는 첨탑의 창문을 열고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외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공작 각하 만세!”

“공작 각하 만세!!”

도개교에 모여들어 저마다 아빠나 공작가를 찬양하는 사람들 사이로, 어린아이 한 명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그런데 가문 이름이 하차니아예요? 조금 그렇지 않아요?”

‘……가장 아픈 곳을 찌르다니!’

“이름이 무슨 상관이야! 살던 집에서도 쫓겨난 우리에게 살 곳을 마련해 주신다는데!”

나는 나 대신 소년에게 호통치는 여자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 * *


“황녀 전하, 황도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전부 북부로 몰려가고 있대요.”

시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체스판을 살피던 아이네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응, 알아.”

“황도 인구보다 북부의 인구가 많아지면 북부가 자주권을 가지게 된다면서요. 걱정이 안 되시나요?”

‘진작 없애 버렸어야 할 조항이었는데, 한발 늦었어.’

미꾸라지 같은 공녀가 특전을 이용해 도서관을 몇 번 들락거리더니 법전이라도 외웠는지 이상한 주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레오노라가 괘씸하긴 했지만, 아이네스는 애써 코웃음을 치며 시녀를 무시했다.

“버러지가 자주권을 가져 봤자 버러지야. 황녀인 내가 왜 그런 걸 걱정해야 하지?”

불쾌감이 서린 아이네스의 얼굴에 시녀는 화들짝 놀라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소, 송구합니다, 황녀 전하!”

아이네스가 기분 따라 스스럼없이 시녀에게 손찌검을 하는 황녀라는 것을 잊은 탓이다. 시녀는 언제 제 얼굴에 손이 올라올지 몰라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잘못을 빌었다.

“됐어. 그냥 우스울 뿐이니까.”

“레오노라 공녀님이 우스우세요?”

“그래.”

‘다른 세계에서 온 아스테르라 색다른 걸 기대했는데, 하차니아는 여전히 하찮은 반항만 골라 하는 게 웃긴 거지.’

아이네스는 레오노라를 비웃으며 예쁜 입술을 움직였다.

“벨네르니 민족뿐만 아니라 내쫓긴 다른 소수민족들도 전부 받기로 결정했다며? 멍청한 생각이지.”

시녀는 다시금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 아이네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군요!”

“응. 벨네르니 민족이야 유랑민도 많고 원래 추운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지만, 다른 민족들이 북부의 혹독한 추위를 견딜 수 있을 리 없잖아?”

아이네스는 시녀의 검은 머리칼을 무성의하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남부의 미르암은 호화로운 남부에서 편히 살던 사람들이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난동을 부릴 거라고.”

“대단하세요, 황녀 전하! 아직 연치도 어리신데 어찌 그리 잘 아세요?”

감탄하는 시녀의 말에 아이네스는 비죽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잡아뜯었다.

“커억!”

“그야, 전에도 그랬으니까.”

바보 같아.

그러니까 얌전히 내 마나통이나 하지 그랬어?


‘어쩐지 얌전하더라니 이런 생각이었구나, 아이네스.’

원작 책을 덮은 나는 잔뜩 인상을 찡그린 미르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으윽! 으으윽!”

치익.

치이익-

바닥에 눌어붙은 사람들이 어김없이 신음을 흘린다.

“으윽, 따뜻해……!”

“이런 안온함은 난생처음입니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에요.”

“남부의 작렬하는 태양보다도 뜨거운 바닥이라니, 이런 게 존재할 수 있는 겁니까?”

나는 노릇노릇한 빵처럼 구워지고 있는 사람들을 살피며 머쓱한 뺨을 긁었다.

‘추워할까 봐 미리 준비해 놓긴 했지만,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귀족들은 마도구를 사용해 난방을 제어하지만, 북부의 평민들은 그럴 돈이 없으니 힘겹게 겨울을 나곤 했었다.

전생을 기억하게 된 내가 제일 먼저 북부의 사람들에게 배급한 건 바로 한국의 난방 시스템이었다.

“온돌이라는 거예요. 하차니아의 자랑, 제랄드 아티팩트 공방의 특허품이죠.”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미르암 사람들을 향해 자랑스레 턱을 들었다.

‘정확히는 k-온돌이지만.’

“북부에는 생전 와 본 적도 없어 가장 걱정한 게 추위였는데, 다시는 남부에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의 아늑함입니다!”

“다행이네요. 저도 미르암 민족을 가장 걱정했거든요.”

나는 미르암 민족의 대표격인 라일 남작의 말에 방긋 웃었다.

“소수 민족 중에서도 가장 수가 적은 저희를 걱정해 주시다니…….”

감동받은 듯한 라일 남작이 울망울망한 눈초리로 나를 올려다본다.

“저희를 내쫓지 말아 달라고 남부의 대영주인 아르델 백작님을 설득해 주신 분도 공녀님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백작님의 배려로 눈에 띄게 피부가 검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남부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북부가 살아남기 위해 택한 전략일 뿐이에요, 라일 남작님.”

“아뇨, 소수민족 중에서도 소수인 저희는 외면하기 쉬우셨을 거라는 거 압니다. 그리고 미르암은 은원을 반드시 갚습니다.”

쿵!

“이 미르탄 라일, 영혼을 걸고 공녀님을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잠깐, 이름이 미르탄이라고요?”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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