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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205)화 (440/486)

제205화

내 말이 순 헛소리라며 혀를 끌끌 찬 사람은 헤렌 자작이었다.

‘헤렌 자작은 소심해서 회의할 때 발언하는 걸 못 봤는데.’

늘 주눅 든 얼굴로 원로들의 눈치를 보던 헤렌 자작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타국의 권력자라면 일국의 왕족이나 황족, 적어도 귀족을 이야기하시는 것 같은데 그들이 뭘 믿고 아무 업적도 없는 어린 공녀님께 돈을 맡기겠습니까?”

헤렌 자작의 지적은 날카로운 듯했지만 알맹이는 나를 깎아내리는 것에 불과했다.

그의 말대로 나는 어렸지만, 이룬 게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제가 아무 업적이 없다고요?”

“쁘띠 플뢰르 정도로는 타국 귀족의 신임을 사지 못합니다. 영민하신 줄 알았는데 제 착각이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고작 차기 사교계의 꽃-이것도 엄청난 지위였지만-을 두고 경합을 벌였던 쁘띠 플뢰르를 언급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원로들 중에서는 제랄드 아티팩트 공방과 자르파르 상단의 실질적인 주인이 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더 드물 텐데.’

나는 헤렌 자작의 발언에 그가 단순히 원로회 내에서 입지가 좁은 아니라 원로들과 아예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제 신원을 보증할 사람이 있다면 생각을 바꾸실 건가요, 자작님?”

“그래 봤자 공작 각하의 보증 아닙니까? 하지만 공녀님의 아버지이시니 각하의 보증을 누가 믿겠습니까.”

나는 나를 비웃듯 비뚜름히 입꼬리를 올리는 헤렌 자작을 바로 마주한 채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아빠, 아니, 각하의 보증을 말하는 건 아니었는데요.”

끼이익-

내 신호에 회의장에 문이 열리고,

쿵!

누군가가 지팡이로 바닥을 찍는 소리가 위엄 있게 울려 퍼진다.

“내가 공녀가 벌이는 사업의 보증을 맡을 생각이네.”

지팡이를 양손으로 짚은 채 엄중히 선언하는 인물을 알아본 원로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인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뜻밖의 인물을 마주해 놀란 원로들의 심장을 떨어뜨리기라도 하겠다는듯, 사뮈엘 대공의 뒤에 숨어 있던 이본느 선황비가 매혹적으로 웃으며 빼꼼 고개를 내민다.

“어머. 멋대로 혼자 등장하시면 어떡해요? 저도 투자를 약속한 건 마찬가지인데.”

“서, 선황비 전하?”

그레고르와 율리아가 죽었기 때문에 이본느는 현재 유일무이한 황실의 큰어른이었다.

그레고르의 승하 이후 칩거에 들어간-사실 이베트로 평온한 삶을 누리고 있었을 뿐이지만- 그녀의 등장에 원로들은 제각기 눈을 홉떴다.

“선황비 전하와 대공 전하께서 공녀님의 사업에 투자를 하겠다 약조해 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약조해 준 게 아니네. 내가 공녀에게 졸랐거든, 제발 투자하게 해 달라고.”

“망할 리 없는 사업이라고 판단했으니까요.”

나는 사뮈엘과 이본느의 말에 방긋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강국인 윌레닌 제국의 황족 두 명이 막대한 돈을 투자했다는 게 알려지면 당연히 내 사업의 신용도는 올라갈 수밖에 없지.’

“저도 아무나에게 투자를 받을 순 없었어요. 말씀드린대로, 제가 생각하는 사업은 권력자들의 비밀 금고를 운영하는 거니까.”

나는 놀라 굳어 버린 원로들을 돌아보며 대공과 선황비를 이끌고 상석에 올라섰다.

“지금 제 사업에 반감을 가질 분들도 있다는 걸 알아요. 잘못하면 황실의 눈밖에 날 수도 있는 사업이니까요.”

하지만 하차니아는 이미 아이네스의 눈밖에 나도 단단히 났다.

‘무슨 이유로 윌레탄 민족만 남기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차니아는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는 땅이니까.’

“하지만 적이 이미 칼을 뽑았는데, 멍청하게 목을 내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저는 하차니아의 영역을 제국 밖으로 확장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영민들을 지키고 싶어요.”

“공녀님, 그 무슨 망측한 말씀이십니까! 지금 반역이라도 하시겠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나는 헤렌 자작의 반발에 눈을 가늘인 채 원로들 한 명 한 명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반역이 아니라 자기방어입니다. 현 황실은 하차니아뿐만 아니라 온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를 갈고 있어요. 설마 그 정도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신 분이 이 자리에 있는 건가요?”

“온 제국이라뇨? 단지 귀족의 정통성과 우월한 제국을 위해 열등한 민족을 밀어내고 있을 뿐이질 않습니까?”

나는 헤렌 자작의 물음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헤렌 자작님, 조모가 벨네르니인이셨죠.”

내 나직한 말에 자작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뜨인다.

“그, 그걸 어떻게…….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분입니다.”

“물론 여태 조모님의 비밀을 잘 지켜 오셨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저도 알아낼 수 있었던 걸 황제 폐하라고 알아내지 못할까요?”

“지, 지금 절 협박하시는 겁니까?!”

나는 새하얗게 질린 헤렌을 무시하며 침중한 얼굴로 황제의 소수민족 말살 정책을 떠올리는듯한 원로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역사적으로 북부는 가장 나중에 윌레닌에 흡수된 지역이에요. 척박한 땅이라 수도나 다른 영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외지인들이 떠밀리듯 올 수밖에 없던 곳이죠.”

가신들은 대개 윌레탄 민족 출신이긴 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의 수도 적지 않았다.

“그런 북부를 다스리는 우리들 중에 순혈 윌레탄인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요?”

나는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원로들의 얼굴을 훑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저는 하차니아를 갈 곳 잃은 사람들의 도피처로 만들 생각이에요. 그러기 위해선 원로들의 도움이 필요하고요.”

도피처를 찾아 몰려온 사람들이 이 땅을 곧 자신들의 집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래야만 힘을 내서 하차니아를 지키려고 나서 줄 테니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낙원이야 딛고 선 땅에 만들면 그만이었다.

소수민족들은 뭉치지 못하고 흩어져 있을 때만 소수인 법이다.

‘그러니까 아이네스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되겠지.’

차별은 그 어떠한 발전도 이뤄 낼 수 없다는 걸.

* * *

공녀의 열두 번째 생일은 이미 지났지만, 뒤늦게 열린 연회는 그만큼 성대했다.

헤렌 자작은 자신보다 조금 작은 회색 머리칼 소년을 품에 안은 채 양갈래로 땋은 머리를 팔랑이는 레오노라를 노려보다 부득 이를 갈았다.

‘애송이 주제에 단번에 원로회를 휘어잡을 줄이야.’

자신은 그토록 비집고 들어가고 싶어도 절대로 틈을 내주지 않던 늙은 원로들이 저 어린 공녀의 열의에는 마음을 내주고 만 것이다.

‘같은 원로인데도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늙은 너구리들이! 고작 저 어린 계집애 말은 듣는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 공녀님 좀 보세요. 오늘도 너무 귀여우셔~!”

“언제 봐도 인형 같으시다니까요. 오늘은 공녀님만큼 귀여운 소년을 안고 계시네요. 친척일까요?”

그의 눈에는 딱히 특출나게 예쁘지도 않은 공녀를 찬양하는 귀부인들의 목소리도 거슬렸다.

‘그냥 단순히 운이 좋아 공작가의 영애로 태어났을 뿐이잖아?’

헤렌은 아무런 노력없이 권력을 거머쥔 레오노라와 달랐다.

그는 피 나는 노력으로 황제에게 영지와 작위를 하사받았으니까.

“공녀가 가문 일에 끼어들기 시작한 이후로 북부가 어수선해지고 있습니다.”

헤렌의 말에 프란츠 황제의 측근, 파리스가 맞장구라도 치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요. 공작은 그레고르 황제 폐하의 충신이 아니었습니까? 지금 북부가 이렇게 황실에 반기를 드는 건 모두 공녀 때문입니다.”

“공작씩이나 되어서 고작 어린 딸아이에게 휘둘리다니! 철혈의 기사라는 명성이 아깝습니다.”

헤렌은 레오노라에게서 회색 머리 소년을 떼어 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공작을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죠. 오히려 자작님이 북부의 주인 자리에 더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북부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느 누구 못지 않은 분이 아니십니까?”

파리스가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헤렌을 꾀어내기 위해 속삭인다.

“프란츠 황제 폐하께서 헤렌 자작님을 퍽 좋게 보고 계십니다.”

“폐, 폐하께서……!”

“아이네스 황녀 전하가 이번에 헤렌 자작님이 선물하신 목걸이를 마음에 들어하셨으니까요.”

‘황제에게 잘 보이려면 황녀를 공략하라는 조언을 듣길 잘했어.’

헤렌은 파리스의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내가 언제까지 이 외딴 영지의 보잘것없는 원로 자리에 만족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제가 조만간 폐하를 찾아뵙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자작님, 일전에 폐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큰물에서 놀려면 작은 희생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죠.”

헤렌은 파리스의 질문에 웅얼웅얼 대답하며 레오노라가 서 있는 단상을 힐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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