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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97)화 (432/486)

제197화

‘지금부터는 레일라의 태도가 중요해.’

레일라를 괄시하는 백작의 태도가 은연중에 사람들에게 드러난 셈이지만 그가 퇴장해 버렸으니, 사람들의 관심을 백작 부부에게 돌리는 건 레일라의 몫이었다.

“……제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모르셨던 분들에게는 사과드릴게요. 숨기려던 건 아니었답니다.”

레일라의 나긋한 사과에 그녀 주변에 서 있던 귀족들이 당황하며 허둥지둥 손을 내젓는다.

“아뇨, 부인께서 사과하실 필요는 없는 일이지요. 백작의 무례에 저희도 크게 놀란 참입니다.”

그중 나이가 지긋한 신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레일라를 위로했다.

“그런가요?”

레일라가 고맙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짓자 노신사는 면구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애는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부인께서 마음 상하실까 염려될 뿐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죠. 지금은 모르겠지만.”

“작금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벨네르니인을 학살하는 데 앞장서고 계신 분이 백작님이니까요.”

노신사는 프란츠 황제의 우월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정책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의 귀족들은 대부분 윌레탄 출신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단순히 인종을 기준으로 차별 정책을 내세우는 황제에 대해 불만을 품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백작님 같은 귀족들이 나라를 이끌고 있으니 기괴한 정책들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겠습니다, 레일라.”

“다음 타깃은 저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겠지요. 그다음은 뚜렷한 장애는 없으나 재능이 특출나지 않은 사람들이 될 것이고요.”

레일라의 말에 프란츠의 차별정책에서 빗겨 가 있던 사람들이 흠칫 놀라 몸을 떤다. 그들은 순혈 윌레탄인이긴 했지만, 레일라처럼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발을 저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정말입니까? 백작님이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분인지는 몰랐는데요.”

“남편은 제가 장애가 있기 때문에 늘 자신한테 미안하고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본인이 외도를 저질러도 저는 눈을 감아야 한다고 믿죠.”

사랑으로 결혼하는 부부가 더 드문 귀족사회에서, 불륜이 흔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다.

“믿을 수 없군요.”

그러나 공식적인 첩실이나 정부가 아닌 이상 엄연히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기에 레일라의 폭탄 발언에 사람들은 저마다 숨을 삼켰다.

“백작님은 우생학을 따르는 분이 아니었습니까? 도덕성 결여도 우생학에 따르면 인간의 큰 결함입니다.”

글래스턴 백작의 최측근인 카터 남작이 레일라의 말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인상을 찌푸린다.

“남작님 말씀대로라면 남편이 바람을 피울 리는 절대 없겠네요.”

“그렇습니다, 부인. 백작님의 태도에 마음이 상하신 것은 이해합니다만 남편의 흉을 보는 것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카터 남작은 마치 자신이 모욕받았다는 양 레일라를 질타했다.

“남작님, 지금 말씀이 너무 심하신-”

레일라에게 공감한 몇몇 사람들이 앞으로 나서려고 했지만, 내 차분한 눈빛에서 속뜻을 읽었는지 그녀가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어요, 남작님. 제가 자중하도록 하지요.”

‘나이스, 레일라.’

나는 레일라의 태도에 남몰래 헤실 웃으며 콧수염을 매만지는 남작을 돌아보았다.

‘백작이 그런 인간일 리가 없다고 사람들이 옹호하는 순간이 반전을 주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야.’

카터 남작은 내 기대에 부응하듯 앞으로 나서며 말을 이었다.

“네. 서운하신 건 알겠지만 부인께서도 백작님을 조금 더 믿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글래스턴뿐만 아니라 부인의 친지인 도노반까지 챙기는 분이 아닙니까.”

“제 남편이 도노반을 위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예. 이번 수로 사업을 이용해 도노반도 커다란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겁니다.”

레일라의 물음에 수로 사업에 크게 관여하고 있는 카터 남작은 은혜라도 베푸는 것처럼 으스대기 시작했다.

“부인께서 백작님과 제게 고마워할 일이지요.”

“하지만 도노반의 행정관들은 지반이 무너질까 염려하던데요.”

“저희는 그런 무분별한 공사는 진행하지 않습니다.”

카터 남작은 레일라의 염려가 어리석다는 듯 코를 찡긋하며 창문 너머로 보이는 호수를 가리켰다.

“저 잔잔한 호수를 보십시오.”

쿵!

“지반이 약해졌다면 약간의 흔들림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노반의 단단한 지반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제자리에서 풀쩍 뛴 카터 남작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든다.

물론 카터 남작의 말대로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호수는 평화롭기만 했다.

‘고마워요, 카터 남작.’

나는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호수와 자신만만한 카터 남작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반이 뭐예요, 남작님?”

“땅의 표면을 말합니다.”

“아! 지반이 흔들린다는 게 콰쾅- 하면서 땅이 흔들리는 지진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거구나!”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남작의 말을 받아친 나는 내 옆에 얌전히 서 있는 히스를 향해 턱짓했다.

“땅이 흔들리면 엄청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히스는 브리넨 구휼원에서 데려왔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므로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는 나보다 조금 작은 그가 내 물음에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처럼 굴라니까!’

나는 아이답지 않게 차분한 히스의 반응이 불만족스러웠지만, 다행히 겉보기엔 충분히 아이 같았는지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린다.

“또래답지 않게 똑똑하다더니, 공녀님도 아이군요.”

“그러게요. 그나저나 공녀님이 데려온 시동 소년이 무척 예쁘지 않나요?”

“성장하면 무서울 정도의 미남이 되겠는데요.”

아무래도 히스의 미모 덕분인 것 같아서 나는 히스에게 품었던 불만을 잊어버린 채 그의 손을 잡고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와아. 지금 조금 흔들린 것 같아요!”

폴짝폴짝.

내가 방긋 웃으며 제자리 뛰기를 하자 당황한 카터 남작이 나를 만류하며 손을 뻗는다.

“파, 파티장에서 뛰는 거 아닙니다.”

“하지만 방금 남작님도 뛰었잖아요?”

“저는 단지 도노반의 지반이 얼마나 튼튼한지 보여 주기 위해-”

찌걱.

남작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악단의 음악 소리를 뚫고 홀을 울린다.

찌거걱.

“……?”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죠?”

웅성이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냈다.

“세상에! 저것 좀 보게들!”

레일라를 위로하던 노신사였다.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곧 눈에 보일 정도로 큰 금이 가기 시작한 타운하우스의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택의 2층이 무너지려고 하질 않나!”

나는 경악한 노신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

.

.

.

.

땡-!

내 마음속 신호와 동시에 갈라진 천장이 후두둑 무너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가장자리로 흩어졌다.

쿠르르- 콰콰쾅!

대리석이 갈라지는 소리가 꼭 천둥소리 같아서 두 눈을 휘둥그레 뜬 나는, 오도 가도 못 하고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레일라를 잡아끌며 뒤로 물러났다.

“이리 오세요, 레일라 님.”

쿵!

“꺄아아악!!!”

그 순간, 레일라가 있던 자리 위로 완전히 무너진 천장과 함께 거대한 가구 하나가 떨어졌다.

‘침대째 떨어질 줄은 몰랐는데.’

내가 손쓴 건 백작이 계획한 수로를 미리 타운하우스 근처를 에두른 형태로 더 깊게 판 정도였다.

‘역학을 계산해서 충격을 주면 침실 바닥이 무너지도록 파긴 했지만…….’

나는 예기치 않은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새하얗게 질린 글래스턴 백작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히스가 손써 준 건가?’

무언가 불만 어린 얼굴로 파티장을 둘러보고 있는 히스를 힐끔하는데, 카터 남작이 앞으로 나서며 내 시야를 가려 버린다.

“백작님?! 괜찮으신 겁니까!!”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오! 지진인 건가!”

“……일단 옷부터 입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카터 남작은 드러난 글래스턴 백작의 희멀건 상체에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고, 그제야 자신이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백작은 민망해하며 뺨을 긁었다.

“허, 허어. 내, 내가 피곤해서 낮잠을 청하려던 중인지라.”

“그런데 아까 여자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노신사의 의문에 시치미를 떼는 백작의 뻔뻔함에 나는 앞으로 구르듯 나서며 기둥이 부러진 침대를 가리켰다.

“웅? 침대가 불룩해요!”

“뭐, 뭐라?!”

“백작님은 몸을 일으키고 있는데, 요기 이 부분이 뽈-록 튀어나와 있어요!”

콕.

콕콕콕.

“아! 숨바꼭질하려는 거구나!”

방긋 웃으며 손뼉을 친 나는 꿈틀거리는 인영을 찌르는 것을 멈추고 이불을 잡아 끌어 내렸다.

“찾았다~!”

드러난 모습에 한순간의 소동으로 시끌벅적했던 군중이 착 가라앉는다.

“……헤, 헬렌이 아닙니까? 백작 부인의 사촌인.”

귀부인 한 명이 충격적이라는 듯 중얼거리는 말과 함께 헬렌의 귀가 타들어 갈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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