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96)화 (431/486)

제196화

“……레일라 님.”

내가 레일라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리자 흠칫 놀란 트레시가 뒤를 돌아본다.

“네가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구나.”

“어, 어머니.”

싸늘한 레일라의 얼굴을 마주한 트레시의 얼굴이 희게 질렸지만, 레일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잘못 키웠어. 훈육이 필요하겠구나.”

담담한 레일라의 말에 트레시는 발악하듯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의 팔을 밀쳐 냈다.

“제게 실망했다는 듯 말하지 마세요! 학술원에서 아이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한 이유도 어머니 때문이잖아요!”

“네가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다 퇴학을 당한 일을 말하는 거니.”

어머니의 지적을 감당하지 못한 소년은 씩씩대며 발을 굴렀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러지 않으면 귀머거리 어머니를 뒀다고 날 우습게 봤을 테니까!”

“너는 언제나 네게 부족한 부분의 원인을 내게서 찾았지.”

“당연하잖아요! 우생학에 따르면 제 모든 결점은 하자 있는 모친을 둔 탓에-!”

다행히 레일라는 트레시의 헛소리를 오래 들어 주지 않았다.

찰싹.

“악!”

제 어머니에게 얻어맞은 일이 처음인 듯, 바짝 얼어붙은 트레시가 그 자리에서 제 뺨을 감싸 안은 채 울컥 목소리를 높인다.

“어머니가 뭔데 날 때리세요! 아버지도 나를 때리신 적이 없는데, 어머니가 뭐라고-!!”

“……입 다물어, 트레시.”

나는 등을 돌린 채 멀어지는 레일라를 바라보다 트레시의 멱살을 움켜잡아 자르파라에게 던져 버렸다.

“우리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잘 묶어 놔.”

“존명.”

자르파라가 내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을 확인한 나는 사라진 레일라를 쫓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레일라 님!”

어느새 호수 끄트머리까지 당도한 레일라의 손목을 붙잡자, 그녀가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후두둑.

나는 레일라의 눈에서 떨어지는 굵은 눈물방울에 입술을 깨물었다.

“울지 마세요. 트레시도 진심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러나 말을 하는 나도 믿지 않는 말을 레일라가 믿을 리 없었다.

“……원래는 장남이 아니었어, 트레시.”

서글프게 미소 지은 레일라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나를 돌아본다.

“트레시 전에 낳은 아이가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 버렸거든. 그래서 뒤늦게 장남이 된 아이란다.”

뜨문뜨문 이어지는 레일라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갈라지고 있었다.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어요.”

아이를 잃은 엄마의 마음 같은 건 내가 짐작할 수 있는 종류의 아픔이 아니었지만, 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레일라의 손등을 꾹 붙잡으며 위로했다.

“정말 란스 말대로 내 유전자가 열등해서인지, 트레시도 몸이 약했어.”

‘아이를 잃은 레일라에게 대놓고 그런 소리를 해 댔단 말이야?’

“어렸을 때부터 신경질적인 성격이었지만 몸이 아파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사랑으로 키운다는 게 저런 몹쓸 놈을 만들고 말았구나.”

“레일라 님 잘못이 아니에요.”

“아니, 내 잘못이야. 난 저 아이의 엄마니까.”

나는 레일라의 단호한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백작님은요? 백작님도 트레시의 아버지니까 책임이 있어요.”

“그래. 그리고 그런 인간을 제때 떠나지 못한 것도 내 책임이겠지.”

“그렇지만-!”

내가 레일라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는 순간, 그녀는 설핏 웃으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오해하지 마렴.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말이니까.”

나는 그제야 눈물이 고인 그녀의 눈이 더는 우울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우유부단함이 아이들을 망치고 있었어. 트레시를 위해서라도, 아니, 레미를 위해서라도 란스 글래스턴을 떠나야겠다.”

나는 드디어 독하게 마음을 먹은 듯한 레일라가 반가워 그녀의 손등을 붙든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도와줄 수 있겠니, 레오노라?”

“그럼요!”

글래스턴 백작은 현재 프란츠 황제의 최측근인 이아론 후작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백작을 권력의 중심에서 몰아내고, 이사벨라의 호의까지 살 수 있는데 레일라를 돕지 않을 이유가 없지.’

움후후.

속으로만 음흉하게 웃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일라가 붓꽃처럼 나붓하게 미소짓는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사람을 도우려고 한다니, 너같이 상냥한 아이를 세상에 내놓으려면 공작이 걱정이 많겠어.”

‘대가를 바라지 않은 건 아니지만…….’

여기서 검은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어 나는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시겠죠.”

“넌 정말 네 어머니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었겠구나.”

“……그랬으면 좋겠네요.”

노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당장 그녀가 나나 아빠를 기억하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으니까.

‘엄마인 노엘이 아니라 피도 섞이지 않은 루카스를 먼저 찾으려고 한다고 실망할 수도 있겠지.’

“아니, 분명 그럴 거야. 네 눈물 한 방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미소 한 자락에 세상을 다 가진 듯 기쁘셨을 거란다.”

나는 나를 위로하는 레일라의 말에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계획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레일라 님이 도와주신다면 훨씬 수월할 거예요. 일단 파티에서-“

* * *

‘일단 파티에서 최대한 백작님을 자극해 주세요.’

레일라는 레오노라의 말을 떠올리며 파티장에 그득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자극이라…….

일평생 남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한 레일라지만, 란스는 시시콜콜한 이유로 그녀에게 기분이 상하는 일이 잦았다.

그 덕에 란스를 자극할 만한 요소는 전부 꿰뚫고 있는 레일라는 진주로 장식한 제 손톱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란스는 내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

해서 레일라는 난생처음 입어 보는 은사로 만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파티장에 나섰다.

“글래스턴 부인이신가요? 오늘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그녀를 발견한 이사벨라의 측근이 화들짝 놀라며 감탄한다.

“고마워요. 남편에게 안내해 주실 수 있나요?”

레일라는 성장한 제 모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아 파티장의 중앙에 들어섰다.

“……레일라?”

사람들과 축배를 들던 란스 글래스턴이 제 아내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린다.

“당신이 여긴 무슨 일로 온 것이오?”

반가운 기색은 아니었지만 글래스턴은 입을 크게 벌려 레일라가 자신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게 배려하고 있었다.

‘내 장애가 눈에 띄는 게 싫어서 저러는 것이겠지만.’

그 일련의 행동을 근거로 글래스턴 백작이 자신을 아내로는 여기고 있다고 생각한 과거가 한탄스럽다.

“당신의 사업 개시를 축하하는 자리인데 아내인 제가 안 올 수 있나요.”

“헬렌이 몸이 아픈 당신을 대신해 날 도와주고 있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

레일라는 퉁명스러운 백작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

“그렇긴 해도 저도 당신을 돕고 싶으니까요.”

레일라는 다소곳한 미인으로 차분하게 말할 때면 잘 가꾼 붓꽃처럼 우아한 사람이었다.

그런 레일라의 품행에 감탄한 백작의 측근들이 그를 위한답시고 레일라를 추켜세운다.

“백작 부인께서는 정말 마음씨가 고우신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몸도 안 좋으시다고 들었는데 백작님을 위해 나서 주시질 않습니까.”

기대했던 사람들의 반응에 레일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백작의 손을 잡았다.

“남편을 위해서 무리할 정도의 건강은 된답니다. 다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 순간, 레일라가 등장한 순간부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헬렌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레일라가 왔으니 전 이만 가 보도록 할게요.”

평소라면 그런 헬렌을 만류했겠지만, 레일라는 헬렌의 공연한 심술에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헬렌. 이만 들어가 봐.”

헬렌은 마치 이 파티를 주최하는 안주인이 자신이라는 듯한-실제로 레일라였지만- 레일라의 축객령에 싸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오늘 사업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명단이야.”

“오늘… 뭐라고?”

“이런, 미안해. 내가 말을 너무 빨리 했나 보네.”

레일라가 제대로 읽을 수 없게 입을 오므려 말한 헬렌은 과하게 미안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직도 귀가 들리지 않는 거지?”

자신의 장애를 지적하는 헬렌의 말에도 레일라는 우아한 태도를 잃지 않고 그녀를 돌아볼 뿐이었다.

“글래스턴 백작 부인이 귀가 안 들리셨나요? 몰랐네요.”

“하지만 저번 대회의에서 글래스턴 백작은 분명 장애를 가진 귀족은 작위를 박탈해야 한다고…….”

레일라가 워낙 조용히 생활하는 탓에 그녀에 대해 알지 못하던 귀족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고,

“일대일 대화밖에 못 하는 당신이 이렇게 사람이 많은 연회장에서 안주인 노릇을 할 수 있겠소?”

백작은 흥분한 숨을 씨근거리며 그녀가 수치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역시 당신이 나서기만 하면 흥이 죽어 버리는군.”

백작은 소란스러워진 군중 속에 제 아내를 내버려 둔 채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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