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94)화 (429/486)

제194화

이사벨라가 편의를 봐준 덕에 나는 그녀의 서재와 매우 가까운 손님용 별채에 방을 얻을 수 있었다.

‘영혼이나 마나에 관한 책은 닥치는 대로 읽어 봐야 해.’

한동안 도노반령에 머물 것 같다는 서신을 북부로 보낸 나는 거대한 장서의 산에 파고들듯 몸을 묻었다.

서쪽의 마녀라고 불리는 명성대로 이사벨라의 서재에는 국립 도서관에 버금가는 장서가 구비되어 있었으니까.

“찾았다!”

도노반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치료 연성진에 대한 사료를 발견한 나는 케케묵은 종이 냄새에 코를 찡긋하며 책을 펼쳐 들었다.

‘혼과 정신, 그리고 영혼을 잇는 연성진이라…….’

악령이나 마물과 싸우다 혼이 오염된 소울나이츠를 위해 개발된 연성진이라 루카스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연금술은 아니었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아스테르나 헬리오스, 셀레네를 특정하는 건 고유의 마나라고 했어.’

나는 아이네스의 눈치를 보며 그간 교단에 들락날락거리며 모은 정보를 머릿속으로 추합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랑 루카스는 동일한 마나의 파동을 지녔으니 결국 루카스도 아스테르라는 말이야.’

교단은 아스테르를 끊임없이 순환하는 영혼이라고 규명했다.

‘그러니까 내 마나로 영혼의 일부나마 붙잡아 둘 수 있었던 거겠지.’

아스테르의 마나는 세계를 순환할 뿐, 소멸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한 세대에 단 한 명뿐인 셀레네나 헬리오스와 달리, 아스테르는 두 명이 존재하는 게 가능했다.

교단이 루카스가 아닌 나를 특별하게 여긴 이유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루카스를 되찾는 게 먼저였다.

‘문제는 붙잡은 루카스의 영혼을 어떻게 육체에 다시 옮기느냐겠지.’

아주 일부만 공개된 도노반 연성진을 끌어안은 채 한숨을 푹 내쉬는데 내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진다.

“도노반 연성진은 네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연금술일 텐데.”

이사벨라였다.

나는 학구열에 불탄 어린아이가 기특하다는 듯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는 이사벨라를 힐끔했다.

“확실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저는 연금술에도 관심이 많아서요.”

“사뮈엘이 마법을 가르친다고 들었는데 의외로군. 그놈은 연금술을 싫어하는데.”

마법사는 연금술사를 싫어했고, 연금술사는 마법사를 싫어했다.

마나를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다른 종족이니 대립이 불가피했지만, 마법사에 가까운 나는 연금술을 배우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려면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을 키우는 방법 따위야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대공 전하는 보수적인 분이니까요. 전 달라요, 이사벨라 님.”

내 명랑한 대답에 이사벨라의 노회한 두 눈이 반짝인다.

“그 구닥다리 늙은이놈은 버리고 내 제자가 될 생각은 없느냐?”

서쪽 마녀는 제자를 들이지 않는다.

나는 이사벨라의 제안이 무척 각별한 것임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이사벨라 님께 베리타스 연성진에 대해 배울 수 있나요?”

“아니, 그 연성진은 내가 아무리 보여 주고 싶어도 도노반의 원로들이 허락하지 않을 거란다.”

나는 이사벨라의 단호한 말에 실망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가보를 공개할 만큼 도노반에서 귀한 대접을 받으려면, 나도 응당 그에 맞는 은인이 되어야 했다.

‘다행히 글래스턴 백작 덕분에 가능성없는 일은 아니게 되었지.’

도노반이 흠결 없이 완벽한 집안이었다면 파고들 틈도 없었으리라.

“아! 레일라 님과 티타임을 가질 시간이에요.”

나는 내가 하는 공부가 궁금한 듯 기웃거리는 이사벨라를 향해 활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다녀올게요, 이사벨라 님.”

“내 딸과 매일 티타임을 가진다니. 레일라가 요즘 부쩍 잘 웃더구나.”

딱히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사벨라가 나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가 레일라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는 레일라 님과 보내는 시간이 좋아요.”

내가 사교계에서 외톨이나 다름없는 신세인 레일라와 열심히 어울려 주고 있었으니까.

‘지금 한창 사교계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나와 가까운 사이라는 소문이 퍼지면 레일라를 괄시하는 사교계의 태도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물론 역으로 내 평판이 깎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 내 딸이 공녀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구나.”

서쪽의 마녀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평판 따위는 손톱만큼도 아깝지도 않았다.

서재에서 빠져나온 나는 한적한 정원 구석에 마련된 가제보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레일라에게 한달음에 달려나갔다.

“레일라 님!”

활짝 웃으며 그녀를 부르는 내 목소리가 정원에 맑게 울려 퍼졌지만,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 뒤에서 부르면 못 들으시지.’

“레-일-라-님!”

서둘러 테이블 앞쪽으로 돌아간 나는 코바늘을 손에 쥔 레일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레오노라 왔니.”

고개를 든 그녀가 다정한 얼굴로 나를 맞아 준다.

‘이사벨라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도 있지만, 역시 난 레일라가 좋아.’

레일라는 조금 답답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상냥한 봄 장미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어휴. 이런 사람한테서 어떻게 트레시 같은 아들이 나왔지.’

도노반에 머무는 내내 영지에 숨은 벨네르니인은 없나 호시탐탐 찾아다니는 트레시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는 나를 향해 누군가가 작은 손을 팔랑이며 인사한다.

“고, 고, 고, 공-! 바, 바, 반-!”

언젠가부터 나만 보면 말을 더듬는 레미였다.

“으응. 나도 반가워, 레미.”

나는 나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시뻘겋게 얼굴을 붉히는 레미를 향해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에녹은 오늘 훈련하러 갔어.”

“어, 어어…….”

내 말에 레미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레미, 친구와 사이가 안 좋은 거니?”

“아,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레미를 걱정하는 레일라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레미를 바라보며 코를 찡긋했다.

‘트레시와 달리 레미라도 레일라를 잘 따라서 다행이야.’

나는 이사벨라의 눈을 피해서 헬렌과 도노반령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글래스턴 백작의 행적을 떠올리며 뜨개질을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레일라의 손을 잡았다.

“레일라 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레미가 있으면 곤란한 말이니?”

“네. 레미, 미안하지만 레일라 님과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 자리를 비켜 줄 수 있을까?”

내 부탁에 레미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킨다.

나는 소년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앞에 놓인 티팟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레일라 님, 저는 도노반 저택에 머물면서 레일라 님이 많이 좋아졌어요.”

“나도 그렇단다, 레오노라.”

“그래서 글래스턴 백작님이 미워요.”

“또 그 말이니. 어머니께서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결혼도 강제하신 분인걸.”

“그건…….”

나는 레일라의 단호한 말에 곤란해져 입술만 달싹였다.

백작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이사벨라는 바로 이혼을 종용하겠지만, 레일라가 제 남편의 외도를 밝히는 것을 꺼려 했으니까.

“란스의 외도가 알려지면 난 다시 한번 도노반에 불명예를 가져오는 꼴이 되는 거란다. 귀머거리에 남편 간수도 제대로 못 하는 여자라는 소리를 듣겠지.”

“하지만 백작님의 외도는 절대로 레일라 님의 탓이 아니에요.”

“너는 상냥한 아이니까.”

내 말에 레일라는 한숨처럼 웃으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란스처럼 탐욕스러운 남자가 나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았으니, 나는 그의 부족한 면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도가 겨우 모난 점 따위로 치부될 수 있는 문제였나 싶었지만, 나는 이어지는 레일라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 생각도 해야지.”

“……레미도, 이사벨라 님도 레일라 님의 행복을 바랄 거예요.”

트레시는 모르겠지만.

부러 내가 제 큰아들의 이름을 빼먹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일라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연다.

“도노반에 불명예를 가져오지 않으면서 란스를 떠날 기회가 생긴다면 나도 놓치지 않아야겠지. 나 같은 게 행복을 바라도 괜찮다면 말이야.”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이사벨라 님이 무척 슬퍼하실 거예요.”

나는 이사벨라의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레일라가 안타까워 입술을 깨물었다.

레일라도, 이사벨라도 서로를 아꼈지만 그들은 도통 소통을 할 줄 몰랐으니까.

“내 어머니는 슬픔을 모르는 분이란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 같은 건 없어요.”

“…….”

“표현할 줄 몰라서 참고 있을 뿐이에요. 지금의 레일라 님처럼요.”

나는 내 말에 무언가를 느낀 듯 입을 꾹 다무는 레일라를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니?”

“기회가 생긴다면 놓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그 말, 꼭 지키세요.”

* * *

“백작님, 축하드립니다. 이사벨라 님이 서부 개척 사업을 백작님께 맡기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하, 내가 이번에 아주 거하게 한 건 해냈지.”

“백작님은 어쩌면 이렇게 능력도 출중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세요? 귀머거리 아내에게도 그렇게 지극정성이시라면서요.”

“아내를 아끼고 귀애하는 마음에 장애가 중요하겠나. 뭐, 아돌프 박사의 이론이나 황제 폐하의 정책과는 조금 어긋나지만 말이야.”

나는 솔직하지 못한 모녀의 마음을 이어 줄 도개교 역할을 할 남자의 등을 향해 씩씩하게 나아갔다.

“불, 쿨럭, 륜, 푸에취-!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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