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90)화 (425/486)

제190화

이사벨라의 동굴은 솔로아령보다 더 국경에 가까운 변경 웨스탈에 위치해 있었다.

북부인 하차니아령에서 가까운 곳은 아니었지만, 트리스탄이 우리 영지에 워프진을 자비로 설치해 준 덕에 나는 무리 없이 서부에 도착했다.

“트리스탄이 설치해 준다는 거, 내버려 두길 잘했지?”

트리스탄이 주는 건 뭐든 받기 싫다며 생떼를 부리던 에녹을 뜯어말린 사람이 나였다.

내 의기양양한 어투에 멀쩡한 문 대신 마차 창문에서 뛰어내린 에녹이 살짝 인상을 찡그린다.

“너는 그 야비한 새끼가 왜 그 비싼 워프를 설치해 줬는지도 모르잖아.”

“트리스탄은 야비하지 않아, 에녹.”

“남자는 다 늑대야.”

“하지만 늑대는 멋진 동물인걸.”

평생에 걸쳐 반려 하나만을 사랑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지킨다고 알고 있다.

“그럼 여우.”

“여우도 귀여워. 포슬포슬한 털이 얼마나 예쁜데?”

서부는 붉은 여우의 서식지였다. 마침 지나가던 여우 한 마리가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다는 듯 가까이 다가와 내 발목에 머리를 비빈다.

“아이, 예뻐라~!”

나는 새초롬한 눈을 예쁘게 깜박이는 여우를 꼭 끌어안은 채 함박웃음을 지었다. 내 품에 안긴 여우가 가르릉거리는 순간, 에녹이 뚱한 입을 연다.

“그럼 똥. 그 새끼는 똥이야.”

‘왠지 여우가 움찔한 것 같은 건 착각이겠지.’

나는 에녹을 향해 이빨을 드러낼락 말락 잇몸을 벌렁이는 여우를 쓰다듬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친구에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친구 아니라고.”

“어, 다 왔다! 저 동굴인가 봐!”

나는 에녹의 말을 듣지 못한 척하며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동굴을 향해 손을 들었다.

‘피곤하네. 오늘은 간단히 답사만 해야겠어.’

솔로아령까지는 쉽게 워프로 이동했지만, 웨스탈까지 마차를 타고 오래 이동한데다 동굴은 웨스탈 숲속 깊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손끝이 덜덜 떨려 온다.

“최대한 인기척을 내지 말고 움직여야 해.”

내 경고에 에녹이 발소리를 죽이면서도 어깨를 으쓱했다.

“이사벨라 대부인이 현역 시절 사용했던 동굴이라며? 지금은 비어 있을걸.”

나는 에녹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마녀 노릇은 그만두고 북부 사교계에서 큰 어른 행세를 한다고 듣긴 했지만…….’

마녀의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명성을 쌓았던 사람이 자신에게 영광스러운 업적을 가져다준 일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기거한다고 알려진 저택보다 동굴을 먼저 찾은 것이다.

‘역시 온기가 남아 있어.’

“당신들, 뭐야?”

혹시나 마녀가 동굴에 자신의 연구 자료를 남겼을까 입구에서 기웃거리는데 수풀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온다.

“당신들이 왜 웨스탈령에 있는 거지?”

‘트레시 글래스턴?’

아는 얼굴에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나는 당장이라도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에녹을 말리기 위해 재빨리 팔을 뻗었다.

“가만히 있어.”

기절해있는 나를 두고 별 개소리를 지껄여 에녹의 열을 바짝 올렸다는 일화는 나도 룰루에게 들어 알고 있었으니까.

남의 집 귀한 영식을 때려눕힌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가스파르가 글래스턴 백작에게 친히 편지를 썼다는 것도.

‘안 그래도 고민 많고 일 많은 가스파르를 더 괴롭힐 수는 없어.’

“놀러 왔어요, 글래스턴 공자.”

트레시는 자신을 높이는 호칭에 만족한 듯 입꼬리를 조금 허물면서도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미안하지만 나가 줘야겠어. 이 숲은 사유지야. 내 조모님의 숲이라고.”

‘트레시 글래스턴이 이사벨라의 손자라고?’

나는 복잡하게 얽힌 제국 귀족의 가계도를 떠올리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너무 아름다운 숲이라 저도 모르게 들어온 것 같아요.”

우리 영지도 아닌 서부에서 소란을 일으켜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잘못 들어온 거니까 이해해 주시겠어요?”

“뭐, 딱히 경비를 세워 둔 것도 아니니 헷갈릴 수 있지.”

다행히 트레시는 아직 에녹에 대한 공포가 남아 있는 듯 내 말에 트집을 잡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우만 놓고 나가. 내가 한참 사냥 중이었으니.”

나는 그제야 트레시가 비스듬히 들고 서 있는 사냥용 산탄총을 발견했다. 트레시의 말을 본능적으로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내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여우가 오들오들 몸을 떨기 시작한다.

“……공자께서는 사냥이 취미이신가 봐요.”

사냥을 고급 스포츠 정도로 생각하는 귀족은 발에 치일 만큼 많았으니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우리 가족이 동물을 좋아하는 나를 배려해서 북부의 사냥을 일절 금지해서 그렇지, 프란츠 황제만 해도 사냥 대회 따위를 즐겨 열었으니까.

‘에녹이나 실비가 오러를 드러내기만 해도 꼼짝도 못 하는 것들이, 꼭 말 못 하는 짐승에게만 폭력적이지.’

정말 비열한 건 속셈을 감추고 워프를 설치한 트리스탄이 아니라 지금도 에녹은 쳐다도 못 보면서 마치 내가 제 부상의 원흉이라는 양 노려보는 트레시 글래스턴 같은 인간이었다.

“이 여우는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것 같아요.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이런, 어쩌지.”

내 부탁에 트레시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간다.

“사유지에서 서식하는 여우도 내 소유물이거든. 그러니까 내가 그 여우를 죽이든 산 채로 가죽을 벗기든 공녀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하여간 단단히 이름값을 하는 놈이다.

나는 이제 몸을 떨다 못해 구슬픈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여우를 에녹에게 넘기며 트레시를 돌아보았다.

“사냥을 그렇게 좋아하시니 내기를 할까요?”

“……무슨?”

“사냥은 즐기지 않지만, 저도 사격이라면 꽤 좋아하거든요.”

“여자가 사격을 즐긴다고? 하하하.”

내 말에 무슨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양 트레시가 배까지 잡고 웃기 시작한다.

“몸이 아픈 것과 더불어 내가 지켜 줘야 할 비밀이 또 하나 늘었네.”

“비밀이요?”

“그래. 여자가 사격이라니, 너무 왈가닥 같아서 공녀의 값어치가 떨어지는 취미잖아.”

‘아, 에녹이 쟤 왜 때렸는지 알겠다.’

주먹이 아니면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는구나.

나는 히죽히죽 웃는 트레시의 얼굴에 정통으로 주먹을 갈겨 줄까 고민하다 드레스를 걷어 올렸다.

“아무데서나 훌렁훌렁 맨살이나 드러내고 말이야. 정말 내 동생이 아니면 데려가 줄 남자가 없겠어.”

‘리니, 나 정말 계속 참아야 해?’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에녹이 입 모양만 벙긋하며 나를 바라본다.

‘응.’

나는 에녹을 향해 단호히 고개를 끄덕인 후 허벅지에 장착된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딸칵.

총구가 제 머리를 향하자 트레시가 그제야 웃음을 거둔다.

“……뭐 하는 거지?”

“내기하자니까요.”

“무슨 내기를 말하는 거야.”

“저와 사격 실력을 겨뤄 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나는 반질반질 빛을 내는 새까만 총구를 거두지 않은 채 저벅저벅 그에게 다가섰다.

“여, 여자랑 총싸움을 하라고? 됐어.”

“왜요?”

“공녀에게 너무 불공평하잖아.”

나를 배려하는 척 말하지만 나는 지금 트레시가 겁을 집어먹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트레시를 마주했던 여우가 움찔했던 것처럼, 나를 마주한 트레시도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으니까.

‘내게 이유를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는 거겠지.’

포식자와 마주친 사냥감들은 어쩔 수 없이 공포에 떨게 되어있다.

그리고 나는 기본적으로 포식자였다.

레오노라로 살아가면서 총을 만질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허겁지겁 도망가는 절박한 타겟을 노리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동물은 좋아해서 사냥하지 않는 것뿐이다.

“내, 내기라면 단순히 사격으로 겨루지 말고 나와 같이 사냥을 하는 게 어떤가! 마침 내가 붉은 여우를 포함해 사냥감을 많이 풀어 놨거든! 동물이 싫다면 다른 사냥감을 사냥하면 돼!”

“동물 말고 다른 사냥감이 있나요?”

“그래! 폐하의 유전자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제국민들을 잔뜩 데려왔지.

‘아돌프에게 선동된 미친놈이었구나.’

트레시는 소수민족을 학살하는 것을 내게 권유하며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어때, 관심이 생기지 않아? 사냥이라면 실컷 하게 해 줄 테니 그만 내게서는-!”

나는 트레시의 말에 총을 붙든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네가 이럴까 봐 내가 나서려고 했던 건데.”

내 총구가 트레시의 이마를 노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에녹이 내 손을 붙잡는다.

“넌 꼭 매번 조용히 열받아 하다가 폭발하더라.”

나를 말리려는 걸까.

‘하긴, 아무리 참지 말라고 내가 훈련을 시켰어도 에녹은 엑스트라였지.’

한때는 제 친구라고 데리고 다녔던 소년이니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폭발한 적 없어.”

내가 차분한 얼굴에 숨긴 분노를 알아챈 듯 에녹은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죽일 거면 차라리 마탄을 써. 얼굴이 망가져서 시체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할 정도는 되어야 우리도 수습할 시간을 벌 수 있지.”

“뭐, 뭐야~! 날 죽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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