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도대체 뭐가 들었길래 건강까지 망쳐 가면서 지키려고 드는 건데?”
미간을 찌푸린 에녹의 물음에 나는 마나가 새어 나갈 수 없도록 보존마법이 걸린 나무 상자를 꼭 끌어안은 채 대답했다.
“나한테 무척 소중한 사람이 남긴 마나의 잔류가 들어 있어.”
상자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빛은 루카스의 마나였다.
루카스를 되찾아올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절대 잃어버릴 수 없었다.
“잔류? 리니, 마나는 속했던 육체가 사라지면 자연스레 소멸하는 거야. 그게 순리라고.”
“응. 그래서 내가 계속 마나를 주입하지 않으면 금방 흩어지고 말아.”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척하는 내 대답에 제 머리를 북북 쓸어넘긴 에녹은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루에르병은 마나의 흐름이 꼬여서 생기는 병이라면서. 그런 상황에 아티팩트에 꾸준히 마나를 주입하고 있었다고?”
정곡을 꼬집는 에녹의 말에 나는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겨우 보존한 루카스의 마나가 완전히 사라지게 내버려 둘 수 없는걸.’
물론 지금 내 상황에 그의 마나를 지키겠답시고 마나를 뽑아내는 건 조금 위험한 작업이긴 했다.
루에르병은 이 세계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근원 에너지인 ‘마나’가 체내에서 엉망진창으로 꼬이는 병이었으니까.
‘전생에서 봤던 병으로 비유하자면 혈액암의 일종이겠지.'
인간의 마나핵은 심장을 중심으로 원을 그린다. 그곳에서 뻗어나온 마나 줄기의 흐름은 마나를 외부로 뽑아내서 사용하는 소울나이츠나 마법사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중요했다.
“……체내에서 마나가 전부 고갈되게 만들거나 마나 폭주를 일으켜 육체가 파괴될 수도 있는 병이라던데. 치료제도 없고.”
루에르병에 대해 되뇌이는 에녹은 자신이 아프기라도 한 것처럼 기운 없는 얼굴을 침대에 묻었다.
그의 말처럼 루에르는 위험한 병이지만 무척 희귀한데다 치료했다는 기록도 전무해서 연구하고자 나서는 학자나 의사들조차 없었다.
‘그나마 힐다가 내 부탁으로 연구를 조금 진행한 모양이지만, 사실 큰 기대는 할 수 없지.’
힐다가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는 병이었다면 <아.황.장>에서 아이네스가 엘릭서를 찾기 위해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하진 않았을 테니까.
“에녹, 나 정말 괜찮아.”
나는 나를 걱정하느라 얼굴이 반쪽이 된 듯한 에녹의 결 좋은 금발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직 조금 피곤한 정도야.”
“넌 어린애가 왜 힘든 일을 다 혼자 감당하려고 해?”
비난하는 어조였지만 에녹은 사실 내가 왜 가족들에게 내 병에 대해 말하지 않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혼자 눈치챘어도 실비나 가스파르에게 말하지 않은 거겠지.’
에녹은 입을 열지 않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는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걱정해서 그런다 쳐. 그런데 실비형한테까지 숨길 건 또 뭔데?”
“실비도 바빠.”
“물론 우리가 가져온 엘릭서가 가짜라는 걸 알게 되면 실비 형은 하차니아 기사단의 편성을 그만두겠지. 그렇지만 북부를 지킬 사설 기사단이 당장 꼭 필요한 건 아니잖아.”
“필요해, 에녹.”
하차니아는 지금 남몰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후에 자르파라 용병단이 합류한다 해도 군대를 통솔할 중앙 기사단의 존재는 절실했다.
그레고르가 서거한 탓에 아이네스의 오빠, 프란츠가 황위에 오르고 말았으니까.
‘물론 프란츠는 완벽한 아이네스의 꼭두각시일 테고.’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프란츠의 팔다리에는 아이네스가 뚝딱뚝딱 움직일 수 있는 줄이 메여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아돌프가 주장했던 우생학을 바탕으로 세운 정책을 맹렬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거겠지.’
아이네스는 그레고르가 살아 있을 때에도 윌레닌 제국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에게 열등하다는 주홍글씨를 새겨넣어 핍박하고 싶어했었다.
그런 그녀의 욕망을 반영하듯, 프란츠는 본격적으로 집권을 시작하자마자 소르베 지구를 포함한 황도 내 소수민족의 마을을 전부 밀어 버렸다.
제대로 이주할 거주지도 마련해 주지 않아 몇 십 만 명의 사람들이 노숙자가 되어 버린 건 물론이고, 반란의 불씨가 될 ‘유전자’를 지닌 민족이라는 미명 하에 제국민의 신분도 빼앗기고 말았다.
‘이제 소수민족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나머지 제국민이 타겟이 될 거야.’
이미 제국의 근간이 된 윌레탄 왕국민의 피가 얼마나 순수하게 흐르는지 검사한다는 핑계로 마구잡이로 잡혀간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에녹, 우리에게는 하차니아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북부는 예로부터 중앙에서 핍박받아 도망쳐 온 사람들이나 타국에서 흘러들어온 이주민이 많은 곳이었다.
‘황도를 휩쓸었으니 아이네스는 곧바로 하차니아를 노릴 거야.’
그리고 아이네스의 유전자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북부인들은 거의 없을 터였다.
할머니의 할머니가 벨네르니인이기만 해도 잡혀 들어가는 판국이니까.
루에르병으로 신경쇠약을 앓게 되기라도 한 건지, 벨네르니인들을 향한 아이네스의 혐오는 거의 광기에 가까울 만큼 지독했다.
“우리는 하차니아의 영주니까.”
“그래, 우리에겐 영민들을 지킬 의무가 있지.”
내 말에 동의하며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인 에녹이 내 뺨을 조심스레 쓸어내린다.
“하지만 내게는 널 지킬 의무도 있어.”
“…….”
“나는 네 오빠잖아, 리니.”
자식이, 언제 이렇게 다 커서는.
나는 코끝이 찡해져 움찔하곤 그의 손을 붙잡았다.
“잘 컸네, 우리 에녹. 내 걱정도 다 해주고.”
‘조그마한 마차 바퀴 등에 메고 연무장 돌 때가 엊그제 같은데….’
에녹이 올해로 열일곱이었으니 이제 거의 성년에 가까운 나이였다.
“누가 할 소리를 하냐.”
내 말이 기가 막히다는 듯 허탈하게 웃은 에녹이 내 이마를 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일단 힐다라도 불러올게. 쉬고 있어.”
“응! 근데 나 정말 안 아파.”
나는 방문을 나서면서도 끝까지 내 안색을 살피는 에녹을 향해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읏!”
아닌가, 조금 아프긴 하네.
내가 심장이 옥죄여 오는 고통에 헐떡이는 숨을 몰아 내쉰 건 에녹이 완전히 방을 나선 후였다.
* * *
이튿날, 나는 날이 밝자마자 공작성 뒤편에 우뚝 솟은 얼음마탑을 찾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속 학자가 나와 히스밖에 없던 작은 마탑에 최근 새로운 인원이 충원되었다.
“할아버지.”
나는 얼음마탑의 막내 학자, 사뮈엘 대공을 향해 오도도 뛰어가며 두 팔을 벌렸다.
“뭐 하고 계셨어요?”
“녀석, 뛰지 말래도. 넘어진다.”
“할아버지 빨리 보고 싶어서 그랬죠!”
내 아양에 사뮈엘 대공이 허허 웃으며 툭 불거진 자신의 광대를 긁는다.
“그래. 나도 리니가 보고 싶더구나.”
그는 자신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내가 자신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 반감은커녕 흡족하다는 듯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4년 동안 열심히 따라다닌 보람이 있네.’
루카스가 사라진 후, 나는 그의 숙부인 사뮈엘 대공과 꽤 친밀한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다.
나를 보면 어릴 적 루카스가 생각난다며 그가 나를 퍽 달갑게 여겼으니까.
사뮈엘 대공은 루카스가 내 마법 스승이나 다름없었다는 걸 알게 되자 얼음마탑에 들어와 내 스승을 자처할 만큼 나를 예뻐했다.
‘나 좋다는 권력자 마다할 이유는 없지!’
여러모로 황실의 웃어른인 사뮈엘 대공이 가진 연줄이 필요했던 터였다.
“오늘은 무슨 마법을 알려줄꼬.”
“루카스가 제 나이 때 배웠던 것들이요.”
“흠. 네게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한번 시도는 해 보자꾸나.”
사뮈엘 대공은 제 턱을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 허공에 작은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장거리 워프는 힘들 테고, 같은 공간 내에서 수직으로만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이다.”
미리 그려 넣은 진의 발동 없이 워프를 시도하는 건 웬만한 마법사는 시도도 못 할 만큼 고위 마법이었다.
‘아무리 단순히 수직 공간만 이동한다지만, 이런 마법을 열두 살에 해냈다고?’
나는 사뮈엘 대공의 말에 기함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재수 없네요, 루카스.”
“그놈이 좀 그렇지. 어렸을 때부터 특출나서 재수가 없었다.”
사뮈엘 대공은 루카스를 흉보는 내 말에 맞장구를 치며 장난스레 웃었다.
노회한 눈이 살짝 접히는 모습이 언뜻 루카스와 닮아서, 나는 저릿한 가슴을 꾹 누른 채 입술을 삐죽였다.
“……재수 없는데 보고 싶은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런 게 가족인 모양이다.”
“할아버지, 혹시 제가 부탁한 건-”
내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사뮈엘 대공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가 품에서 꺼낸 서류를 확인하고 침을 꼴깍 삼켰다.
“네 말대로 찾긴 했다만, 그 여자가 정말로 루카스를 되찾을 방법을 알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단다.”
서쪽의 마녀, 이사벨라.
나는 마녀의 동굴 위치를 확인하며 눈을 가늘였다.
“확실하지 않다고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