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88)화 (423/486)

제188화

핏기 가신 창백한 얼굴의 레오노라를 받아 든 건 레오노라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던 소년들이 아닌, 현관까지 나섰던 에녹이었다.

“레오노라!”

에녹은 제 동생의 몸에 다른 사람의 손길이 닿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사납게 눈매를 치켜세우며 의식을 잃은 레오노라를 껴안았다.

“동생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으니까 다들 이만 꺼져.”

에녹의 다소 무례한 축객령에 트레시 글래스턴이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 레오노라에게 말을 걸다 멱살을 잡힌 소년의 형이었다.

‘건방진 놈.’

물론 에녹의 가문인 하차니아는 5대 귀족에 속할 만큼 유서 깊은 가문인데다 최근 빠르게 엄청난 부를 축적한 재력가이긴 했다.

하지만 소년들 중에서는 하차니아만큼 난다 긴다 하는 명문가의 자제들도 있었고 글래스턴도 그중 하나였다.

‘글래스턴이 비록 백작가이지만 에녹은 후계를 이어받을 수 없는 삼남에 불과하다. 동생과 달리 백작가의 후계자인 나까지 쫄 필요는 없지.’

트레시는 레오노라를 보호하듯 껴안고 초조하게 발을 구르는 에녹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공녀에게 무슨 병이라도 있는 건가?”

걱정하는 척하지만, 레오노라에게 무슨 흠결이라도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 묻는 말이었다.

“하차니아 공작님에게는 딸이 하나뿐이라고 들었는데, 큰일이군.”

트레시는 다른 소년들에게 동의라도 구하듯 주위를 둘러보며 쓰러진 레오노라를 가리켰다.

“다들 공녀의 건강 상태를 눈여겨봐야 할 거야.”

하차니아의 명예와 부, 그리고 쁘띠 플뢰르 활약으로 이름을 날린 레오노라를 정략결혼의 상대로 노리는 가문의 수가 적지 않기에 하는 말이었다.

“어머니가 레오노라 공녀에게 관심을 보이셨는데 나도 말씀을 드려야겠어.”

트레시는 혀를 쯧쯧 차며 레오노라의 얼굴을 흘깃했다.

“예쁘면 뭐하나? 명문가의 안주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의무는 건강한 후계를 생산하는 것…… 커억!”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리던 그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른다.

룰루에게 레오노라를 부탁한 에녹은 한 손으로 트레시를 붙든 채 다른 손에 새빨간 오러구를 응집시켰다.

“이거 놓지 못해! 이 무례한 자식!”

아무 작위도 하사받지 못한 에녹이나 자신의 동생과 달리 트레시는 제 아버지인 백작에게서 자작령을 물려받은 후계자였다.

‘게다가 폐하가 봉토까지 하사하시며 예뻐하는 나를 이렇게 막 대한다고?’

트레시는 기가 막혀 제 멱살을 틀어잡은 에녹의 손을 노려보았다.

“에녹, 너는 내가 폐하와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잊은 건가?! 내게 상해를 입히면 폐하께서 네게 큰 벌을 내리실 것이다!”

“어쩌라고, x발. 백 날 천 날 어린애 뒤에 숨어서 비겁하게 입만 터는 놈이.”

트레시의 의도와 달리 에녹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벌? 주시면 달게 받지. 하지만 폐하의 엄벌보다는 내 주먹이 빠를걸.”

“뭐, 뭐라고?!”

에녹의 말에 반박하려던 트레시는 루비처럼 투명한 적안에서 작열하듯 타오르는 분노에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내 동생이 무슨 물건이라도 되는 줄 알아? 어디서 되지도 않는 감평이야, 이 개새끼가.”

퍼억-!

에녹은 결국 제 성질을 참지 못하고 트레시의 배에 그대로 오러구를 처박았다.

“헉!”

거칠지만 피부가 따가울 만큼 강렬한 열기가 주변을 뒤덮는다.

오러구 한 방에 그대로 나가떨어진 트레시의 몸이 찰나 공중을 부유했다.

“혀, 형-!”

평소 자신을 졸졸 쫓아다니던 트레시의 동생이 화들짝 놀라 트레시에게 달려가는 것을 확인한 에녹은 한숨을 푹 내쉬며 룰루가 황급히 달려나간 의료실로 걸음을 옮겼다.

‘깨어나면 또 잔소리하겠네.’

다루는 오러가 불 속성이라 그런지, 점점 더 성정이 불같아져서 큰일이었다.

* * *

‘아무래도 루에르병이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한 거겠지.’

시기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기에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이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에녹이나 룰루는 많이 놀란 것 같지만…….’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초조하게 침대 주변을 배회하는 룰루와 내 뺨만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에녹을 확인하고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응. 나 괜찮으니까 너무 호들갑 떨지 마.”

“그럼 어서 의사를 불러올게요!”

“아니, 괜찮다니까.”

호들갑 떨지 말라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알아들은 걸까.

나는 호다닥 방문으로 달려 나가려는 룰루에게 손을 뻗어 그녀를 만류했다.

“의사 부르지 마.”

“정말 괜찮으신 거 맞아요?”

“응. 나 에녹이랑 할 말 있으니까 잠깐 나가 줄래?”

“네…….”

내 부탁에 어쩐지 시무룩해진 룰루가 어깨가 축 처진 채 방을 나선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내가 의식을 차렸는데도 굳은 얼굴로 주먹만 말아 쥐고 있는 에녹을 돌아보았다.

“에녹.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어떻게 알아?”

“그냥 보면 느껴져.”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에녹이나 실비는 이제 얼굴만 봐도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였다.

내 무심한 대답에 에녹이 동그랗게 만 주먹을 꿈틀거리며 입술을 달싹인다.

“할 말 있으면 해. 에녹답지 않게 고민하지 말고.”

“할 말은 없는데, 너한테 궁금한 건 있어.”

물어봐도 좋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에녹이 인상을 찌푸린 채 말문을 연다.

“너, 어디 아프지.”

“…….”

나는 에녹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저번처럼 또 더위를 먹었다거나, 빈혈이 생겼다거나 하는 핑계 대지마.”

엘릭서를 찾아 떠난 후로 감감무소식인 자카리나 성년이 된 후 공작가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실비와 달리 에녹은 그나마 나와 보내는 시간이 많은 편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알아챌 만큼 아픈 티를 냈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하여간 놀러 다닌다고 상점가며 펍이며 들락날락거리더니 이상하게 눈치만 늘었다.

“설마 엘릭서도 그래서 찾아 달라고 부탁한 거야? 네가 아파서?”

바로 대답하지 않자 초조해졌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진다.

나는 시뻘건 피가 맺힌 에녹의 입술에 손가락을 얹은 채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근데 낫고 있어. 에녹이 엘릭서를 구해 줬잖아.”

“……내가 구한 엘릭서가 네 병을 치료했다고.”

그러나 에녹은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리니, 나는 네 말이라면 내가 사실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 해도 믿을 거야.”

“…….”

“그러니까 분명하게 말해 줘. 정말 안 아파?”

에녹이 마지막으로 묻는 말에 양심이 찔려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기다려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에녹의 맑은 적안에 핑그르르 투명한 눈물이 차오른다.

“언제 눈치챘어?”

“의심하기 시작한 건 1년 정도. 확신하게 된 건 네가 묘하게 기침을 많이 하게 된 때부터고.”

에녹이 천방지축 도련님을 자처하며 뒷골목을 쏘아 다닌 시기와 일치했다.

“기침 좀 했다고 내 병을 확신했다고?”

“나는 어릴 때부터 네 몸 상태를 체크하고 있었으니까. 마나 흐름도 묘하게 틀어진데다 호흡도 점점 더 가빠지고 있어, 너.”

‘그렇게나 나를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있었구나.’

“네가 아버지나 형, 내게 말하지 못할 병이라면 현재 하차니아의 모든 인력을 동원해도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없는 병이라는 거겠지.”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모호한 얼굴로 미소 짓는 나를 흘깃한 에녹이 제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한다.

“그럼 후보군이 좁혀지잖아. 엘리아네나 헤페, 루에르처럼 마나와 관련된 불치병일 테지.”

작게 중얼거리며 에녹이 주섬주섬 꺼내 놓기 시작한 것은 평민들이나 쓰는 싸구려 종이로 만들어진 서적 여러 개와 출처를 알 수 없는 녹색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 각양각색의 물약들이었다.

“이게 다 뭐야?”

“……루에르는 너무 자료가 없어서 못 찾았고, 엘리아네나 헤페는 서민들은 이런 치료 방법을 시도한 모양이야.”

“여태 치료 방법 알아보겠다고 그렇게 쏘다닌 거야?”

“그럼 네가 아프다는데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

한량이 천성이라 막내 도련님답게 놀고먹겠다고 아주 결심한 줄 알았는데.

나는 그간 에녹에게 잔소리를 해 댄 게 조금 미안해져서 뺨을 긁었다.

“루에르지? 네 병.”

확신이 깃든 에녹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런 것 같더라.”

한숨을 푹 내쉰 에녹이 길게 자란 제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입술을 벌린다.

“그럼 저 상자, 보관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냐?”

이제 젖살이 완전히 빠진 에녹이 가스파르처럼 길쭉한 손가락을 뻗어 가리킨 것은 내 침대 옆에 놓인 작은 함이었다.

‘……진짜 눈치만 늘었다니까.’

나는 당장이라도 함을 파괴할 기세인 에녹에게서 함을 보호하며 고개를 저었다.

“줘, 레오노라. 네 건강에 안 좋아. 루에르를 악화시킬 거라고.”

“나도 알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상자에 담겨 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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