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86)화 (421/486)

제186화

셀레네는 알레테이아의 중앙성전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받은 몇 안 되는 교단원 중 한 명이었다.

열세 명의 현자 중에서도 뛰어난 능력과 충성심으로 신의 달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그를 존경하는 교단원의 수가 적지 않았다.

“셀레네 님, 레오노라 공녀…. 아스테르가 알레테이아에 입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교단 경비병의 보고에 왕좌처럼 화려한 검붉은 의자에 앉아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던 셀레네가 고개를 든다.

“헬리오스의 말에 따르면 아스테르가 드디어 각성했다고 하더군.”

셀레네의 건조한 목소리에 왕좌 주변에 몰려들었던 신도들의 안색이 환해진다.

“잘된 일 아닙니까? 이제 곧 퀴리오스 님의 힘을 전부 되찾을 수 있겠습니다!”

셀레네는 제 발치에 무릎 꿇은 지부장의 말에 지독한 장미향이 풍기는 제 보랏빛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래. 잘된 일이지. 아스테르가 혼자 자각에 성공했다는 게 헬리오스의 착각만 아니라면.”

셀레네는 교만한 헬리오스, 자신이 정말 퀴리오스를 대체할 만한 교단의 태양이라고 착각하는 아이네스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몇 십 번을 환생하며 지켜봤지만, 회귀를 거듭할수록 성정이 나빠지고 있다.’

알레테이아의 힘으로 새로운 생을 부여받으면 부여받을수록 신에 대한 사랑이 커져만 가는 자신과 달리 아이네스의 신앙심은 자신에 대한 오만한 믿음으로 오염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아스테르가 혼자 알레테이아의 사랑을 각성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기도 하고.”

수많은 아스테르를 지켜본 환생자였기에 셀레네는 이례적인 레오노라의 행동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 하지만 이번 대의 아스테르는 특별하다는 신탁이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아이네스의 예쁨을 받는 지부장 엔코가 셀레네의 말에 반박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모든 것을 끌어안을 별이 나타나 에티모스 님의 부활을 밝힐 것이라는 신탁이 알레테이아의 묘비에 나타나질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지.”

“설마 알레테이아의 신탁을 의심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알레테이아의 신탁을 그들이 제대로 해석한 거라면 레오노라야말로 에티모스를 부활시키고 교단원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낙원의 문을 열어 줄 열쇠였다.

“의심이라니. 그만큼 특별한 새 신도님이니 내가 직접 맞이해 아스테르의 신앙심을 확인할 생각이다.”

엔코의 말에 불쾌한 듯 인상을 찡그린 셀레네는 교단왕의 왕좌에서 천천히 일어나 신도들이 기도를 올리는 분수대로 걸음을 옮겼다.

* * *

“아스테르로서의 자아를 직접 각성시켜 줄 계획이었는데, 혼자 눈을 떴다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교단원이 이끄는 분수대에서 나를 맞이한 셀레네는 전과 달리 온화한 얼굴이었다.

“환영합니다, 신의 별 아스테르여.”

보라색 머리가 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셀레네라는 사람은 목소리까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헷갈릴 만큼 중성적이었다.

“안녕하세요, 셀레네 님.”

알레테이아의 성서를 마치 보물처럼 꼭 끌어안은 내가 고개를 숙이자 그가 인자하게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신도님의 신앙심을 확인해야겠지요.”

언뜻 다정해 보이지만 냉철하게 빛나는 그의 눈빛에서 실낱같은 의심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셀레네가 가리키는 오목한 쇠그릇 앞에 섰다.

“알레테이아의 사랑을 자각했다면 그녀의 힘이 깃들었을 겁니다. 성수에 자신의 마나를 담아 물을 일으켜 보세요.”

‘마나의 색을 확인하려는 건가.’

나는 셀레네의 말에 침을 꼴깍 삼키며 성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성서에 묘사된 부분이라 짐작하고 있긴 했지만, 셀레네가 직접 나설 줄은 몰랐는데.’

일반 교단원이나 지부장급이라면 나보다 마나를 컨트롤하는 능력이 크게 떨어질 게 분명했기에 대충 눈속임으로 넘어가려고 했었다.

‘일이 잘못되면, 튀자.’

눈짓으로 히스에게 의사를 전한 나는 셀레네의 지시에 따라 성수 위에 손을 올렸다.

내 의지를 담은 마나가 손끝에서 뻗어 나와 잔잔한 수면 위에 작은 파동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투명한 색이군요.”

“셀레네 님의 에테르와 흡사한 색입니다. 알레테이아의 사랑이 아스테르에게 깃든 것이 틀림없습니다!”

셀레네 옆에 시립해 있던 남자가 환히 웃으며 나를 돌아본다.

“아아, 신의 사랑을 받는 별이 드디어 스스로 교단에 걸음하셨군요.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는 신호겠지요.”

그는 아이네스와 비슷한 말을 중얼거리며 내 발등에 입을 맞췄다.

“알레테이아의 종복된 노예가 사랑받는 아스테르를 뵙습니다.”

종복된 노예가 주인의 발등에 입을 맞추는 관습을 따라 하는 것 같았다.

“아…. 네….”

그의 행동이 퍽 부담스러워 뒤로 물러나는데, 내 옆에 얌전히 서 있던 히스가 와그작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허리를 숙인다.

“내가 먼저 섬긴 주인님입니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나는 잔뜩 경계하며 남자를 향해 가시를 세우는 히스의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히스, 너는 내 노예가-”

“아, 이 소년은 아스테르의 노예였군요. 그럼 사람이 아니니 신앙심을 검증할 필요도 없지요.”

“맞지. 네, 이 소년은 제 노예가 맞아요.”

나는 남자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처음부터 히스를 내 노예로 데려왔다는 양 뻔뻔하게 히스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모, 목줄은 깜박 잊고 놓고 왔네.”

“제가 가져왔습니다, 주인님.”

“……그래.”

언제 챙겨 왔는지, 어디서 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목줄을 히스가 내 손에 쥐여 준다.

나는 떨떠름히 히스의 목에 목줄을 채우면서도 남몰래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교단에 납치당했을 적 목격했던 셀레네의 에테르와 내 마나 고유의 색은 투명한 빛에 가까운 흰색이었지만, 히스의 마나는 여름 바다처럼 청량한 물빛이었으니까.

‘성수로 마나의 색을 확인하는 것 같으니 히스의 색은 들키지 않는 게 좋겠지.’

만약 히스가 알레테이아를 믿지 않는다는 게 밝혀지면 나 혼자 성전에 잠입할 생각이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럼 다시 한번 성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신의 별이여.”

어딘지 탐탁지 않다는 듯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셀레네는 나와 히스를 환영하며 두 팔을 벌렸다.

“이곳은 길을 잃은 영혼들을 위한 안식처이니 알레테이아를 가깝게 느끼고 싶을 때마다 언제든 방문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들을 각자에게 배정된 신도의 방으로 안내해 주게, 엔코.”

나는 셀레네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만만해 보이는 지부장을 붙잡고 천진한 미소를 꾸며 냈다.

“지부장님, 다정하게 맞아 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교단에서 환영받지 못할까 봐 무서웠거든요.”

“신의 별이 성전을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실 셀레네 님이 조금 무서웠어요.”

내 말에 엔코라고 불린 지부장의 표정에 묘하게 화색이 돈다.

“그렇죠. 셀레네 님의 인상이 조금 더럽긴 합니다.”

쁘띠 플뢰르에 참가하겠다고 수도 사교계에서 어언 1년을 구른 몸이었다.

‘누가 누구를 꺼림칙해 하고, 질투하는지 훤히 보인다고.’

“엔코 님은 셀레네 님과 달리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하신 분인 것 같아요.”

“후후. 그런 인상을 아스테르에게 남겼다니 다행이군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나는 엔코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귀엽게 웃으며 지부장의 손등을 붙들었다.

“……그럼 마다하지 않을게요. 알레테이아의 사랑을 늦게 깨달은 만큼 조금이라도 빨리 알레테이아에 대해 배우고 싶은데 방법이 있을까요?”

학구열을 가장하는 내 말에 엔코가 뿌듯하다는 듯 콧잔등을 움찔하며 성전의 왼쪽 날개를 가리킨다.

“교단과 관련된 모든 서적은 중앙성전의 좌측에 마련된 도서관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건가요?”

“으음. 보통 신도가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은 제한되어 있긴 합니다만……. 아스테르가 원한다면,”

“저는 아직 일반 신도에 불과하니까요. 괜찮아요! 천천히 공부할게요.”

벌써부터 욕심을 부려 괜한 의심을 살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아이네스만 아는 정보가 서적으로 기록되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나는 망설이는 엔코를 안심시키며 도서관의 위치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 * *

레오노라와 노예 소년이 교리 공부를 위해 마련된 소강당으로 떠난 후, 셀레네는 레오노라가 일으켰던 성수가 담긴 물그릇을 안아 들었다.

‘정말로 저 아이가 신이 선택한 별이라는 건가.’

아까는 아주 미세한 파동만 일으켰던 성수가 끓는 물이라도 된 듯이 부글부글 요동치고 있었다.

다른 교단원들은 셀레네가 단순히 레오노라의 신앙심을 확인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가 진짜 확인한 건 알레테이아의 사랑 따위가 아니었다.

‘이 낡고 지친 세계도 드디어 끝을 보게 되는군.’

쨍그랑-!

에티모스의 부활을 앞두고 들떴던 아이네스와 달리 셀레네는 비릿하게 웃으며 레오노라의 손길이 닿았던 성수를 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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