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85)화 (420/486)

제185화

히스에게 교단의 위치를 전달받은 나는 오데트에게 부탁해 바로 짐을 꾸렸지만, 예상하지 못한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 짐은 다 뭔가.”

에녹이나 실비, 자카리가 저택을 떠날 때는 별다른 관심도 보이지 않던 가스파르가 내 침실을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기웃거리기 시작했으니까.

“어딜 가려는 거지.”

언젠가 룰루가 사다 준 복숭아 배낭에 이것저것 필요한 짐을 꾸리던 나는 언뜻 초조해 보이는 가스파르의 얼굴에 한숨을 푹 내쉬며 그에게 다가섰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아빠. 위험한 짓은 안 할 거예요.”

손위 형제이긴 했지만 아직 어른이 되려면 한참 남은 에녹과 실비를 위험한 곳으로 보내 버린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아빠가 너무 불안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다.

“제가 평범한 어린애는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나는 걱정 어린 가스파르의 눈빛에 그를 안심시키듯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오래 혼자 뒀지.”

그러나 내 말에도 그는 초조한 기색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래서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리니.”

나는 한탄하는 듯한 가스파르의 중얼거림에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왜 아빠를 믿지 못한다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에녹이나 실비, 자카리는 네 부탁으로 영지를 벗어나지 않았느냐.”

“네?”

“내게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건, 나는 도움이 필요할 때 필요하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라고 여기게 된 거겠지.”

나는 가스파르의 말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아빠.”

나는 침울한 얼굴의 아빠에게 성큼 다가가 그의 단정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리니에게 아빠가 너무 소중한 존재라서 그래요.”

언젠가 그가 나에게 해 줬던 말이었다.

“내게 너만큼 소중한 이가 존재했던 역사가 없다, 리니.”

그러니까 그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거나 예뻐 보이기 위해 애를 쓸 필요가 없다고.

가스파르는 자신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움에 떨던 내게 그런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 주었다.

“내게 리니, 너를 사랑하는 일은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니까.”

아직도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나를 어르고 달래며 가스파르가 속삭이던 말들을 떠올리다 잠들곤 했다.

“……저는 아빠를 또 잃을 수 없어요.”

사라진 아빠를 그리워하며 숨죽여 울던 밤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가스파르까지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빠는 내 특훈을 받은 에녹이나 실비와는 다르게 양심이 남아 있는걸.’

가스파르는 분명 뛰어난 기사였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아군의 뒤통수를 거침없이 갈길 수 있을 만큼 정신이 개조된 형제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엘릭서를 찾으러 나섰다가 아픈 아이라도 보게 되면 홀라당 줘 버릴지도 몰라.’

교단의 성지에 데려갔다가 그가 알레테이아의 교리에 빠질 확률도 적지 않았다.

“이제 겨우 찾았잖아요. 나는 아빠를 또 잃을 수 없어요.”

결국 나는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나를 따라오고 싶어하는 가스파르를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 짓은 안 할게요. 약속.”

가스파르가 얌전히 내가 내민 손가락에 손을 걸어 줬기 때문에, 나는 내가 잠시 저택을 비웠다고 그가 벌일 난동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 *

“콜록, 콜록!”

자카리까지 저택을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황도를 벗어난 나는 알레테이아 성전 입구에서 참아 왔던 마른기침을 토해 냈다.

“……공녀, 괜찮은 겁니까?”

히스가 건네준 새하얀 손수건에 붉은 물방울이 번진다.

나는 심각하게 일그러진 소년의 뺨에 손을 올린 채 차분히 웃어 보였다.

“별거 아니야. 요즘 목이 건조해서 그래.”

히스는 구태여 내 말에 반박하지 않았지만, 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투명한 눈빛에서 히스가 나를 전혀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지금 아프다고 해도 곧 괜찮아질 거야. 오빠들이 약을 구하러 갔으니까.”

“그럼 약을 구해 올 때까지 쉬는 게 맞습니다. 그 몸으로 무슨-”

“하지만 아이네스가 시간이 얼마 없다고 했어. 루카스의 영혼이 곧 완전히 소멸할 거라고.”

나는 히스의 말을 짧게 끊으며 원작 책이 묘사했던 아이네스와 율리아의 대화를 떠올렸다.

‘분명 루카스의 마나가 세상에 남아 있어야만 그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도 유효한 거라고 했었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부분만 글씨가 뭉개져 루카스를 되찾을 방법을 원작 책으로 알아낼 수는 없었다.

“교단이랑 관련이 있을 거야. 알레테이아의 성전이 교단의 중심부니까, 아이네스가 아는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위험하다고 말려도 듣지 않으실 테죠.”

아이답지 않게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은 히스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럼 함께 가겠습니다.”

“성전에 같이 들어가겠다고?”

“네.”

“히스, 나는 알레테이아의 교리에 감화된 것처럼 행동할 거야.”

교단원이 되는 것만큼 그들의 의심을 빠르게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없을 테니까.

“언제 들킬지 몰라서 조마조마한 상황에 널 끌어들이고 싶은 생각은 없어.”

“공녀가 언제 다칠지, 위험에 처할지 몰라서 조마조마한 것보다는 옆에서 초조하게 발을 구르는 게 낫습니다.”

내 말에 반박하는 히스의 굳은 얼굴은 재고할 여지도 없다는 듯 단호했다.

“여차하면 성전이라도 날려서 공녀를 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 그래도 웬만하면 성전을 날리진 마.”

“그럼 위험해지지 마십시오.”

“노력해 볼게.”

나는 히스의 당부에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성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새까만 돌계단으로 이뤄진 입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올라가는 계단이 아니라 내려가는 계단이라는 게 특이점이네.’

대개 높은 언덕 위에 지어지는 루엘라드교의 신전과 달리 알레테이아의 성전은 지하로 이어져 있었다.

발을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올라오는 축축한 기운에 부르르 어깨를 떨자, 히스가 서둘러 제 외투를 내게 둘러 주었다.

“고마워.”

티에리가 만들었을 검은 재킷에서 히스 특유의 묘하게 씁쓰름한 향기가 풍겨 온다.

쌀쌀하지만 햇볕만은 따가운 하차니아의 가을이 떠오르는 냄새다.

‘그래, 다 끝내고 어서 돌아가는 거야.’

겨우 불안을 잠재운 나는 빠르게 성전 입구에 당도했다.

* * *

폐쇄적일 거라는 기대와 달리 알레테이아의 성전 입구는 경비조차 없었다.

“어서 오세요, 새로운 신도님들이실까요?”

애초에 신도가 많지 않은 편이라 드나드는 사람이 없기 때문인지, 히스와 나를 발견한 교단원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다.

“아, 표식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예비 신도님들이신 모양이군요.”

히스와 내 이마를 힐긋한 교단원은 검푸른 머리카락 사이로 희끗희끗 샌 흰머리가 보이는 남자였다.

나는 휘어진 고목처럼 구부정한 그의 등을 힐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성서의 인도를 받아 알레테이아의 발등에 입을 맞추러 왔습니다.”

황실 서고에서 발견한 성서에 나오는 대로 인사하자 교단원이 히죽 웃으며 나와 히스에게 로브를 내민다.

“그렇군요. 환영합니다. 다만 이곳은 알레테이아와 에티모스 님의 성체를 보존하고 있는 성전으로, 속세의 물건은 전부 놓고 들어오셔야 합니다.”

“……전부요?”

“네. 전부. 무기는 물론 아티팩트도 반입 불가입니다.”

사이비 종교의 성전 주제에 들어가는 과정이 황성보다도 까다롭다.

나는 교단원의 말에 주머니 안에서 굴러다니는 원작 책과 바주카포를 떠올렸다.

‘유사시에는 총이라도 갈겨서 빠져나오려고 했는데…….’

하지만 여기서 미적대면 괜한 의심을 살 수 있었다.

“알겠어요. 탈의는 어디서 하면 될까요?”

“왼쪽 방으로 가시면 됩니다.”

나는 교단원이 겨울을 맞은 나뭇가지처럼 바싹 마른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을 힐끔하며 히스를 돌아봤다.

“가자, 히스.”

“…….”

“가자니까?”

내 재촉에 머뭇거리던 히스가 그제야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방이 하나뿐이네.’

히스나 나나 둘 다 어린아이라고 생각해서 공용 탈의실로 안내해 준 모양이었다.

‘뭐, 괜찮겠지.’

어차피 겉에 입는 드레스 아래에 실내복으로 입을 수 있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이럴 것 같아서 들어오기 싫었습니다.”

소년은 탈의실에 들어선 내가 드레스를 벗기 위해 치맛자락을 붙잡자마자 다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이를 갈았다.

“응?”

“공녀가 이렇게 옷을 막 벗을 줄 알았습니다.”

“눈 떠도 돼. 어차피 옷 입고 있어.”

“실내복이질 않습니까.”

실내복도 옷인데 뭐 어때, 싶어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히스의 이마를 누르려는데, 그가 다급하게 말을 덧붙인다.

“아크레아에서는 실내복 차림의 여성을 마주하는 건 결혼을 맹세해야 할 만큼의 결례입니다.”

“……그래?”

나는 결국 히스를 놀리려던 손을 접으며 떨떠름히 대꾸했다.

기사 서약도 혼약, 실내복 차림도 혼약.

이 세계는 결혼이 아주 쉬운 모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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