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84)화 (419/486)

제184화

“트리스탄.”

나는 못 본 새 훌쩍 자라 벌써 평균적인 성인 남성의 키는 웃도는 것 같은 적발의 미남을 올려다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너의 기사님이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놀라서 움찔거리는 내 콧잔등을 꾹 누른 그가 아주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레 입을 연다.

“…트리스탄이 제 기사님을 자처한 사실을 어떻게 잊겠어요. 얼마 전에도 도와줬잖아요.”

나는 반쯤 농담인 것 같으면서도 왠지 모를 원망의 기색이 담긴 그의 태양 같은 눈동자에 꼴깍 침을 삼킨 후 말을 이었다.

“공작위의 인가는 제대로 받은 거예요? 그레고르 황제가 승하한 탓에 정신이 없었을 텐데.”

내 물음에 죽은 황제를 떠올린 듯 그의 눈매가 침잠한다.

“다행히도. 그가 절벽에서 발을 헛디디기 전날에 인가를 받아 뒀다.”

나는 고갯짓을 따라 매끄럽게 흔들리는 그의 턱을 훔쳐보다 새삼 <아.황.장>의 남자주인공인 그가 얼마나 잘 컸는지 깨달았다.

‘에녹이랑 실비만 보고 살아서 눈호강이라면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베일 듯 날카로운 턱선이 예사롭지 않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그냥요.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워서.”

내가 제 얼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꿈에도 모를 트리스탄은 멍한 내 시선을 사로잡은 채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래. 어찌 됐든 필요하다면 내가 너를 위해 엘릭서를 찾으러 떠나겠다.”

“엘릭서 찾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에요?”

나는 트리스탄의 말에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아.황.장>내에서도 엘릭서를 손에 넣는 사람은 건국 이래 단 한 사람-자카리-이었다는 묘사가 나올 만큼 전설의 명약을 찾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으니까.

‘망망대해도 건너고, 사막도 건너고, 마물이 드글드글하는 무슨 이상한 숲에도 들어가야 하는데….’

게다가 자아가 있는 성물이나 마찬가지라 위기를 느끼면 제멋대로 위치를 바꿔서 엘릭서가 현재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엘릭서가 있을 만한 위치를 표기한 지도도 동화 삽화로 나오는 이 허접한 약도가 전부고.’

“힘들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지만, 너를 위해 그 험난한 길을 걸을 수 있다니 영광이군.”

나는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이는 트리스탄의 촘촘한 금색 속눈썹을 바라보다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트리스탄, 이제 막 솔로아 공작위에 올랐잖아요. 제대로 자리 잡는 것만 생각해도 바쁠 텐데, 남의 가문 일에 이렇게 열을 올리는 거 아니에요.”

“누가 남이라는 거지?”

자신을 걱정하는 내 말이 불쾌했는지 트리스탄의 미간이 살짝 구겨진다.

나는 무슨 해괴한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발끈하는 그의 반응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너랑 나랑 남이지, 그럼 누가 남이야?’

“말했을 텐데. 나는 네 자리를 비워 뒀다고.”

“제 자리가 무슨 자리이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연히 솔로아 공작 부인의 자리지.”

“…네?”

나는 내 물음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트리스탄의 무뚝뚝한 얼굴에 허허,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막 아홉 살 될락 말락 한 응애였으니까.

‘게다가 트리스탄도 이제 겨우 열다섯인데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대귀족들은 대개 일찍 약혼을 한다지만, 아홉 살은 일러도 너무 일렀다.

“기사 맹세가 혼약과 다름없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겠지.”

‘몰랐는데요.’

그러나 트리스탄은 놀라는 내가 더 이상하다는 듯 여상히 설명하며 내 손등을 붙잡은 손에 꾸욱 힘을 주었다.

“너는 차기 공작 부인이다. 미래의 내 부인을 돕는다는데 반대하는 솔로아의 가신은 없을 거다.”

“…….”

그의 말에 할 말이 사라져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문 내 몸이 휙 돌아가는 듯 싶더니 어느새 단단한 등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저리 꺼져, 트리스탄.”

트리스탄을 경계하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는 귀에 익은 것이었다.

“듣고 있으려니 기가 막혀서. 누가 미래의 솔로아 공작 부인이야?”

언제든 검을 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나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소년은 하차니아 공작가의 삼남, 에녹이었다.

“이 미친 새끼가. 우리 리니 나이가 몇인데 개소리냐고.”

나는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 겁도 없이 남자주인공에게 쌍욕을 날리는 에녹의 소매를 말리듯 붙잡았다.

“에녹.”

에녹과 트리스탄이 아무리 어릴 때부터 어울렸던 친구라고 해도 트리스탄은 이제 5대 귀족가문 중 하나인 솔로아를 이끄는 가주였다.

그러나 에녹은 트리스탄의 권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어깨를 밀치기까지 했다.

“바리스탄이 적랑의 단장직에서 물러났다는 말을 듣지 못했나. 나는 이제 너의 상관이다.”

에녹에게 어깨를 내주며 뒤로 물러나면서 트리스탄이 가볍게 경고한다.

“아, 그놈의 적랑.”

에녹은 트리스탄이 가리킨 제복의 완장을 떼어내며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마침 지긋지긋해서 때려치우려고 했어.”

에녹의 손안에서 붉은 늑대가 섬세하게 수놓인 완장이 와그락 일그러진다.

“그러니까 이제 너는 내 상관 아니다. 알았으면 꺼져.”

나는 그가 적랑의 표식을 바닥에 내팽개치는 것을 확인하고 미간을 좁혔다.

“에녹, 그게 무슨 말이야? 적랑을 그만두겠다니.”

“루카스 선황자가 사라졌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다.”

당황한 내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에녹이 아니었다.

“설마 실비까지 백랑을 나오겠다는 거야?”

나는 에녹을 뒤따라 제 완장을 뜯어낸 실비를 발견하고 동그랗게 입을 벌렸다.

“왜?”

“레오노라, 너는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지만 네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어떻게?”

나는 실비의 말에 귀를 쫑긋하면서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형제들에게 전해 준 정보는 매우 한정적이었으니까.

‘아이네스와 교단의 관계도, 루카스의 정체도 완전히 말해 준 건 아닌걸.’

게다가 에녹이나 실비는 내가 교단이 찾는 ‘아스테르’라는 존재인 것도 몰랐다.

“너는 우리의 소중한 막냇동생이니까.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그래, 리니. 네가 모든 걸 짊어질 필요는 없어.”

나는 트리스탄에게 화가 나 숨을 씨근거리면서도 나를 와락 안는 에녹의 품에 안겨 작게 입을 벙긋했다.

“에녹, 실비…….”

그래, 젖병 대신 마차 바퀴 이고 다니면서 키운-특훈시킨- 보람이 있다.

울망울망한 내 눈매에 에녹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순간이었다.

“자카리 오라버니?”

나는 순간적으로 시야를 가득 메우는 검은 늑대가 그려진 스카프에 머뭇대며 고개를 들었다.

“자.”

“…이게 뭐예요? 설마 흑랑의 단장패는 아니겠죠.”

“맞다.”

에녹에 이어 실비, 그리고 자카리까지.

어쩌다 보니 하차니아 공작가의 삼형제가 전부 실직자가 되게 생겼다.

‘흑랑이든 적랑이든, 전부 황실 소속 기사단이나 마찬가지라 언젠가는 그만두게 할 생각이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것도 자진해서 자신들의 유년기를 모조리 털어넣은 기사단을 나와 줄 줄이야.

“다들 날 도와준다고 나서줘서 고마워! 그럼 엘릭서가 있을 만한 곳을 표시한 지도를 나눠 줄게.”

어찌 됐든 감동은 감동이고, 실리는 실리였다.

‘원래는 자르파라의 용병단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소울나이츠인 자카리, 트리스탄이나 에녹, 실비의 도움을 받는 게 빠르겠지.’

게다가 이들이 보통 소울나이츠던가. 무려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들로만 구성된 적랑이나 흑랑, 백랑에서도 두각을 보이는 천재들이었다.

나는 나를 위해 엘릭서를 찾아나서 주겠다는 네 명의 소년-매우 유능한-들의 얼굴을 차례로 훑으며 이불을 달싹였다.

“오츠크 해협의 놀만섬, 검은 사막의 오아시스, 페렌체 숲의 동굴, 그리고 지룬티 평야의 레어. 이 네 곳 중 한 곳에 엘릭서가 있을 확률이 높아.”

원작의 묘사와 내가 여태 조사한 자료들을 취합해 찾은 후보군은 총 넷이었다.

“그래. 우리가 꼭 엘릭서를 찾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지도를 건네받은 에녹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내 머리칼에 입을 맞춘다.

“리니, 너는 혼자가 아니니까.”

“그래, 레오노라.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넌 왜 껴? 끼지 마. 꺼지라고 세 번 말했어.”

에녹은 자신을 뒤따르는 트리스탄의 말이 거슬리는지 인상을 확 찡그리며 하차니아의 병사들을 찾았다.

“솔로아 공작님을 밖으로 모시지 않고 뭐하는 거야?”

말은 공작님이지만, 마치 불청객을 쫓아내는 듯한 말투였다.

트리스탄은 에녹의 축객령에 얌전히 물러나면서도 엘릭서가 있을 만한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원작에서 엘릭서를 찾아낸 자카리도 있으니까 승산은 있어.’

나는 제각기 목적지를 정해 흩어지는 소년들을 바라보다 다짐하듯 주먹을 쥐었다.

‘내 병이 발병되기 전에, 내가 먼저 엘릭서를 손에 넣어야만 해.’

그래야 하차니아든 제국이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지.’

“…히스.”

“네.”

“내가 납치당했던 곳, 기억하지? 교단의 중앙지부. 안내해 줘.”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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