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동쪽 첨탑 위에 그레고르의 비서관이 올라 황제의 로브를 흔들었다.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젊고 건강했던 황제의 죽음을 알리는 세 번의 외침에 사람들은 가게 문을 닫고 세상을 떠난 그레고르의 명복을 빌기 위해 두 손을 맞잡았다.
그레고르는 폭정을 펼친 황제였기에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에 잘됐다며 조소를 날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제국민들은 자신들의 삶이 힘들어진 이유가 황제에게 있다는 것을 짐작할 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린 딸을 남겨 두고 승하한 그를 불쌍하게 여겼다.
여론이 그레고르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아이네스의 편을 들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귀족원의 의견을 수합해 그레고르를 황위에서 끌어내리기 직전이었던 하차니아는 한 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가여우신 황녀 전하.”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나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곳 그레고르의 무덤가에 주저앉은 아이네스를 흘깃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새까만 새틴 원피스를 입은 아이네스는 반질반질하게 빛이 나는, 마찬가지로 검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레고르의 손을 짓밟던 새빨간 구두와 같은 디자인이라 나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나는 다시금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제 곧 에티모스가 돌아올 거야. 그럼 모든 게 끝이 나.”
모든 것이 끝난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신이 나간 것처럼 몽롱한 얼굴의 아이네스는 같은 말만 되뇌이다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법사의 맹약을 어떻게 맺는지쯤은 공녀도 알고 있겠지.”
영혼에 새겨진 약속을 어길 시에 바짝 마른 사막처럼 마나가 고갈되는 ‘마법사의 맹약’은 기본적으로 흑마법에 속했지만, 제국의 황녀는 사도를 걷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는 듯 주문을 외웠다.
‘…이제 그레고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
윌레닌의 국법에 따르면 섭정을 세울 수 있는 건 통치자에게 큰 결함이 발견되었을 때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레고르를 죽인 거겠지.’
그가 죽으면 황제의 적장자인 프란츠 황태자가 자연스레 황위를 잇게 된다.
프란츠가 그레고르만큼이나 폭정을 휘두르지 않는 이상 더는 귀족들이 마음대로 섭정을 세울 수 없게 된 상황이었다.
나는 내 손목에 일렁이는 마나의 쇠사슬을 내려다보다 아이네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가리는 검은색 망 사이로 언뜻 우울해 보이는 소녀의 모습이 들어온다.
“이제 막 여덟 살이 되셨을 뿐인데… 어휴, 딱해라.”
아까부터 아이네스를 안타깝게 여기던 귀부인이 다시금 물기 젖은 눈가를 손수건으로 훔친다.
“안녕히 가세요, 아버지.”
절벽에서 굴러떨어져 산산조각 난 그레고르의 유해가 담긴 관을 향해 아이네스가 작은 손을 팔랑인다.
“저는, 아이네스는…….”
콜록.
연약한 기침 소리를 낸 아이네스는 걱정 어린 사람들을 뒤로한 채 그레고르의 묘비를 껴안았다.
“아이네스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부디 걱정하지 마세요.”
죽은 아버지에게 보내는 어린 딸의 작별 인사.
확실히 가슴 아픈 장면이었다. 그녀의 인사에 그레고르의 국장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한숨을 터뜨렸다.
가여우신 황녀 전하의 입꼬리가 남몰래 올라간 것은 오직 내 눈에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요동치는 그녀의 마나가 폭주하기 일보 직전인 것도.
* * *
“괜찮은 겁니까, 공녀.”
국장을 치르고 수도 저택으로 복귀한 내가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눕히자, 종종걸음으로 쫓아온 히스가 걱정 어린 눈으로 내 몸을 찬찬히 살핀다.
“마나의 흐름이 이상합니다.”
“응?”
“마치 고갈된 것처럼.”
“……귀신이네, 히스.”
나는 바람이 일지 않는 호수처럼 차분한 그의 청안을 마주하며 가볍게 웃었다.
“아이네스에게 마나를 조금 나눠 주고 왔거든.”
“조금이 아니질 않습니까.”
내 대답에 잘생긴 미간을 찡그린 그가 몸을 숙여 내 이마에 손을 뻗는다.
나는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푸른색 마나의 줄기가 내 몸을 천천히 감싸 안는 것을 느끼고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치유마법으로 회복시키려고 해도 소용없어. 지금은 너무 바닥일 거라서.”
“마나가 완전히 소진되면 마법사는 미칠 수도 있습니다.”
“알아.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아이네스는 내가 알레테이아의 교리에 빠져들었다는 걸 완전히 믿는 눈치가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이 ‘특별한’, 선택받은 헬리오스라는 자부심과 교만에 빠져 있긴 했지만 무턱대고 나를 신뢰할 만큼 조심성이 없지도 않았다.
단순히 알레테이아의 성서를 보여 주고 마법사의 맹약을 맺는 것만으로는 아이네스를 완전히 설득할 수 없었다.
만약 전전긍긍하던 내 앞에서 아이네스가 각혈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녀를 완벽하게 속일 수 없었으리라.
◈
“황녀 전하! 괜찮으세요?”
레오노라는 바닥에 고꾸라진 채 힘겹게 숨을 헐떡이는 아이네스의 상체를 붙들었다.
“피, 피를 토하셨어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소녀의 입술에서 주르륵 검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레오노라의 호들갑에 아이네스는 이런 비극쯤이야 흔하다는 듯 손등으로 제 입가를 훔치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선천적인 병이야. 체내에 마나가 모자라서 나타나는 증상이니 약으로 치료할 수도 없지.”
“…마나가 모자라요? 하지만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 대다수가 문제없이 살잖아요?”
“그건 그들이 애초에 술자의 육체를 타고나지 않았기 때문이야.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들이니까. 강대한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필요해.”
“그렇다면 제 마나를 드릴 수는 없을까요?”
‘드디어.’
떨리는 레오노라의 목소리에 아이네스는 희열을 느꼈지만, 자신이 그 말만을 기다려 왔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잠자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마나는 고유의 파동이 존재해서 다른 사람의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있어.”
“저도 잘은 모르지만, 제 마나는 조금 특별한 것 같아요.”
쑥스럽다는 듯 아이네스의 말에 작게 대꾸한 레오노라는 진을 연성해 제 마나를 실처럼 길게 뽑아냈다.
“전하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뻐요. 전하는 제 유일한 친구시니까요.”
사생아라는 이유로 버려진 레오노라에게 유일하게 다가와 준 상냥한 황녀님을 위해 레오노라는 줄 수 없는 것이 없었다.
◈
호기심 어린 히스의 시선을 피해 레오노라의 외전을 살핀 나는 책에 나온 것과 아주 흡사했던 나와 아이네스의 대화를 떠올리며 턱을 매만졌다.
‘아이네스는 회귀를 반복하는 사람이니 과거와 비슷한 말을 하는 나를 믿을 수밖에 없겠지.’
무수히 존재했던 예전의 레오노라들이 똑같은 말을 하며 아이네스에게 우정을 맹세하고, 마나를 나눠 줬을 테니까.
‘괜히 나를 마나통이라고 불렀겠어?’
극심하게 마나를 소모한 탓에 자꾸만 몸이 가라앉는다. 나는 아효효, 한숨을 푹 내쉬며 무릎을 통통 두드렸다.
“히스, 루에르병이라고 알아?”
“마나가 폭주하는 병이라는 것 정도만 압니다.”
“아크레아에서는 흔한 병이었어?”
“아뇨. 아크레아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마나를 세밀하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습니다.”
나는 히스의 무뚝뚝한 대답에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각혈이 시작되었다는 건, 아이네스의 병이 발병된 신호겠지.’
그리고 그 신호는 곧 내게도 같은 시한폭탄을 안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루에르병은 희귀병인데다 불치병으로 알려졌지만, 유일한 치료제가 존재해.”
“엘릭서를 말하는 겁니까?”
나는 히스의 물음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알아?”
“자르파라와 공녀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응? 언제?”
‘나는 히스 앞에서 엘릭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들었다는 걸까.’
의심이 깃든 내 시선을 받은 히스가 주홍빛 입술을 달싹이더니 창백한 뺨을 긁적인다.
“자르파라가 이야기해 준 걸 착각한 모양입니다.”
“……그래?”
뭐, 설마 나를 졸졸 쫓아다니다 엿들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네.”
나는 강아지처럼 얌전히 앉아 고개를 주억거리는 히스를 더는 캐묻지 못하고 떨떠름히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엘릭서를 찾아야 해.”
그레고르를 없애며 황권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아이네스를 대적하려면 이제는 엘릭서를 먼저 손에 넣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를 위해 은밀하게 움직일,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만한 기사님이 필요해.”
내 말에 히스가 맑은 청안을 빛내며 입술을 움직인다.
“공녀를 위해 내가 건너지 못할 대양과 사막은 없으며 넘지 못할 산도 없습니다.”
“아니, 어린 히스를 그렇게 위험한 곳에 보낼 수는 없어. 그러니까-”
“내가 가겠다.”
내 말을 툭 끊은 목소리의 주인이 불퉁한 얼굴을 들이밀며 나와 히스의 사이를 갈라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