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제국은 광활한 영토만큼이나 귀족의 수가 많았고, 그런 귀족들이 속한 귀족원에서 대다수의 귀족이 참가할 만한 대회의를 여는 일은 흔치 않았다.
끼이익.
방치된 세월만큼 기름칠을 하지 않은 거대한 문이 삐끄덕 열리는 소리에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간다.
“솔로아 공작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문을 지키던 호명관의 외침에 들어서는 인영을 발견한 젊은 귀족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연다.
“저 사람은 솔로아 공작 각하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네요. 후계자인 솔로아 소공작인 것 같습니다.”
귀족원의 대회의는 원칙적으로는 가주들만 참석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나처럼 가주를 따라와 함께 회의를 듣는 것은 가능했지만, 모습을 드러낸 트리스탄은 분명 혼자였다.
“아직 후계자에 불과한 이가 어찌 가주도 없이 대회의에 참석하려 한단 말이오?”
이에 노귀족 한 명이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며 트리스탄을 향해 언성을 높인다.
“소공작, 가주 대리를 의미하는 인장이라도 가져온 게 아니라면 혼자서는 대회의에 참석할 수 없네.”
이번 대회의의 의장인 아빠도 가만히 있는데 왜 나서서 신경질을 부리나 싶었지만, 그는 귀족들 사이에서 꽤나 입김이 센 중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입을 다물고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탓에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트리스탄을 살피는데, 나를 힐끔한 그가 앞으로 나서며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다.
“가주 대리의 인장은 없습니다.”
원탁에 손을 올린 트리스탄이 짧게 대꾸한 말에 노귀족의 얼굴이 우악스레 일그러진다.
“허, 그렇다면 솔로아 공작가에서는 대회의에 불참한 것으로 처리하는 수밖에 없겠군. 리먼 경! 어서 소공작을 밖으로 모시게!”
노귀족이 혀를 차며 호위까지 불러 트리스탄을 끌어내려는 순간이었다.
“가주의 인장은 있는데, 이걸론 부족한 겁니까?”
트리스탄이 호위의 손이 제 어깨에 닿기 전에 제 품을 뒤져 검은 빛깔이 도는 인장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저 말뜻은 설마….’
나는 그의 당당한 얼굴에 상황을 가늠하듯 눈을 가늘였다.
“제가 오늘부로 솔로아를 이끌 가주의 자리를 승계받았습니다.”
나는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트리스탄의 말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닐 텐데?’
원작에서 그가 공작위에 오르는 건 여주인공인 아이네스와 사랑에 빠지기 직전인 열여덟 무렵이었다.
“하지만 소공작, 아니, 자네는 이제 겨우 열 다섯이 아니던가?”
“서, 설마 공작이 죽기라도 한 겁니까?”
트리스탄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귀족들은 체면도 잊고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아뇨. 살아는 계십니다.”
나는 트리스탄의 성의 없는 대답에 남몰래 미간을 찌푸렸다.
‘말이 왜 저렇게 의미심장해?’
살아는 있다니.
꼭 트리스탄이 제 아버지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한 것 같은 대답이질 않나.
“솔로아 공작가의 승계에 관한 자세한 내막은 후에 보좌에게 보고를 받으시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훑어보는 귀족들을 무시하며 걸어 나온 그가 원탁의 상석에 앉은 가스파르와 나를 올려다본다.
“저는 이번 대회의에 참석하러 온 것이니 이만 제 의견을 말해도 되겠습니까?”
방금까지 다른 나이 많은 귀족들에겐 퍽 고압적인 자세를 취한 주제에, 트리스탄은 가스파르에게만큼은 예의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
“허락한다.”
아빠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트리스탄의 보좌관이 그레고르와 현 윌레닌 황실의 악행이 줄줄이 나열된 또 다른 서류더미를 원탁에 투척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폐하의 정신은 쇠약해지다못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습니다.”
서류의 요약본을 손에 든 트리스탄은 길쭉한 손가락으로 글자들을 훑으며 원탁에 앉은 귀족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쾌락에 빠져 국정은커녕 황실조차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황좌는 너무 무거운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솔로아 공작님께서는 현 윌레닌 제국에 섭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네. 저 또한 5대 귀족의 특권을 발휘하여 섭정에 대한 안건을 이번 대회의의 주제로 올리고자 합니다.”
트리스탄까지 가스파르의 손을 들어 준다면 벌써 다섯 명의 5대 귀족 중 세 명이 그레고르를 대신할 섭정을 세우고자 주장한 셈이었다.
‘이렇게 되면 선대 때 그레고르의 편에 섰던 귀족들조차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겠어.’
잘한다, 우리 남주!
어떻게 벌써 공작위에 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힘들게 엄마를 찾아 준 은혜를 지금 갚는 모양이었다.
술렁이는 귀족들을 지켜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트리스탄이 저벅저벅 다가와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다만 저는 지금 승계 문제로 공사가 다망하여, 의결권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고자 합니다.”
내 손등에 입을 맞춘 트리스탄이 내민 패에는 솔로아 공작가의 대리를 의미하는 붉은 사자가 새겨져 있었다.
“제 레이디에게 귀족원과 관련된 솔로아의 모든 권한을 위임하겠습니다.”
‘아니, 그런 것까지는 필요 없는데!’
트리스탄의 말은 대귀족의 한 축이나 마찬가지인 솔로아의 권력을 내게 안겨 주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발언이었다.
“트리스탄-”
나는 너무 과한 권리를 내 손에 쥐여 주려는 그를 만류하듯 허둥지둥 손을 뻗었지만, 그는 내 두 손을 한 손으로 잡은 채 태양이 녹은 것처럼 밝게 빛나는 금안을 깜빡였다.
“레오노라.”
나와 눈을 마주한 트리스탄이 미묘하게 낮아진 목소리로 내 이름을 속삭인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네 도움이 적지 않았다. 감사를 표하고 싶으니 거절하지 마.”
트리스탄이 공작위를 손에 넣는 데 내가 도대체 무슨 도움을 줬다는 걸까.
반박하고 싶어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는 내게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네 자리도 비워 뒀다.”
“…네?”
“하지만 넌 아직 많이 자라야겠지.”
뭔 자리?
영문을 모르고 눈만 끔벅이는 내 어리숙한 반응에 트리스탄이 나직한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레오노라, 나는 너를 섬기는 기사라는 걸 잊지 마.”
“제가 트리스탄의 레이디라는 거 그냥 한 말 아니었어요?”
어릴 때-물론 지금도 어리지만- 헛소리 아니었나 싶어 인상을 찌푸리는 내 이마를 그가 손끝으로 툭 밀어내며 입을 벌린다.
“쁘띠 플뢰르의 슈발리에 노릇까지 시켜 놓고 섭섭한 말을 하는군.”
“하지만 기사가 섬기는 레이디라는 거, 특히 서부에서는 의미가 남다르잖아요.”
“그래. 내 심장, 내 영혼, 내 검까지 전부 네 것이라는 의미지. 그러니까 나는 너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
나는 트리스탄이 무심한 목소리로 툭 던지는 대답에 경악하며 입을 벌렸다.
‘그렇게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자꾸 하고 다닌다니 완전히 남주 실격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아이네스도 로맨스판타지 소설의 여자주인공 자격은 없으니까 괜찮나.’
“리니.”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내 어깨에 손을 얹은 가스파르가 나와 트리스탄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인다.
“네?”
“나도 기사다.”
“…….”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에녹과 실비 덕에 다져진 눈치로 나는 가스파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뇨! 됐어요! 나는 아빠 목숨 같은 거 필요 없어요.”
나는 내 단호한 대답에 시무룩해진 가스파르와 이유를 알 수 없는 승리감에 젖은 트리스탄을 돌아보며 사납게 인상을 찡그렸다.
“트리스탄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됐고, 바쁜 것 같은데 황성에나 가 봐요.”
나는 내게 무언가 변명을 하려는 듯한 트리스탄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원탁을 턱짓했다.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이왕 의결권을 건네받았는데 허투루 쓸 수는 없지 않은가.
‘귀족원의 의견만 모아지면 섭정을 세우고 그레고르를 끌어내리는 게 불가능하진 않겠지.’
그리고 내가 내세울 인물은 당연히 이본느 황비와 사뮈엘 대공이었다.
아이네스의 팔다리를 자를 내 수족이 되어 줄.
* * *
가스파르가 몇십 년 만에 귀족들을 통합해 대회의를 열었다는 소식에 아이네스는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감히 섭정을 세우자고 주장하고 있다고?’
귀족들의 건방진 주장이 괘씸하고 또 괘씸했지만, 그들이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를 제국법에 따르면 정말로 그레고르가 제위에서 내려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빠! 지금 술이 입에 들어가세요?!”
아이네스는 그레고르가 저지른 범법들이 빼곡하게 쓰여진 귀족들의 항의서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독한 위스키를 연거푸 마시는 그레고르를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를 높였다.
“황제 대신 제국을 통치할 섭정을 세우겠다고 귀족들이 난리를 치고 있는데! 술이 입에 들어가시냐고요!!”
길길이 날뛰는 아이네스를 힐긋한 그레고르는 손톱을 튕기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율리아 황비가 있지 않느냐.”
“네?”
“네 말이라면 껌뻑 죽는 율리아 황비를 섭정으로 세우면 내가 제위에 앉아 있는 것과 다름없지 않겠느냐고.”
마침 황제라는 이유로 이거 해라, 저거는 하면 안 된다 귀찮게 하는 신하들의 잔소리에 이골이 난 터였다.
그레고르의 책임감 없는 대답에 아이네스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율리아, 죽었어요.”
필요 없어져서.
그런데 이제는 자신의 아버지라는 작자가 제 쓸모를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