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흩어진 루카스의 마나가 바람에 휩쓸린다 싶더니 이내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다.
콕콕, 마치 나를 위로하기라도 하듯 내 치마를 조심스레 두드리는 루카스의 마나에 안주머니를 열자 마나는 재빠르게 주머니 안에 숨긴 원작 책을 찾아냈다.
‘…책이.’
책이 빛나고 있었다.
트리스탄에게 원작 책을 들고 처음으로 접근했을 때처럼 루카스의 마나가 빙글빙글 책 주위를 맴돌다가 곧 표지에 스며든다.
‘루카스와 나의 마나가 같은 결이라서 그런 걸까?’
나는 날갯짓하는 새처럼 혼자 책장을 파드득 넘기다 이내 허공에서 툭 떨어진 원작 책을 받아 들었다.
‘표지가 변했어.’
검은 양장 위로 피어오른 장미가 봄을 맞아 만개한 장미 덤불처럼 표지 위를 흐르고 있었다.
<아가 황녀님의 장밋빛 인생>
나는 여름을 맞아 잉크가 녹기라도 한 것처럼 흐물흐물 흘러내리는 원작의 제목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웅웅.
진동하는 책표지 위에 손을 올리자 안온한 루카스의 마나가 느껴진다.
그러나 느껴지는 건 단순히 루카스의 마나만은 아니었다.
‘악녀인 벨루치, 남자주인공인 트리스탄, 조연이었던 카렌, 그리고 서브남주인 자카리의 마나까지 책에 깃들었어.’
단순히 내 마나를 이용해 원작 속 인물들의 힘을 따라 쓰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힘이었다.
‘내가 완전히 그 인물이 된 것처럼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직접 사용해 봐야 얼마나 책의 능력이 향상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원작 책이 지닌 힘이 바뀌었다는 건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루카스….”
내 마나로는 개화할 수 없었던 아티팩트인 원작 책이 루카스의 마나가 깃들어 완전히 본 능력을 찾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야.’
원작 책이 사라져도 좋으니 루카스가 돌아오면 좋겠다.
“후윽, 끕!”
책을 꼭 끌어안은 나는 아무도 없는 정원에서 숨죽여 울다 곧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허엉…! 흐아앙!”
“리니.”
아빠가 나를 찾으러 정원으로 올 때까지.
“괜찮다. 다 괜찮아.”
나는 결국 그의 품에서 목 놓아 울다 잠이 들었다.
* * *
루카스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해서 그를 기리는 추모식은, 초대객이라곤 사뮈엘 대공뿐인 초라한 행사였다.
황족의 장례식이라고 불리기엔 턱없이 조야했지만, 나는 루카스를 위해 소담한 안개꽃으로 꾸민 정원이 퍽 마음에 들었다.
‘루카스는 화려한 꽃은 별로 안 좋아했으니까.’
제 얼굴이 여름 장미처럼 더없이 화려해서일까.
루카스는 꽃보다는 나무, 그것도 잎이 커다랗고 청량한 향기를 품은 나무를 좋아했다.
“비가 꽤 많이 오는구나.”
루카스가 사라진 나무 근처에서 서성이는 내 위로 검은 우산이 드리워진다.
“대공 전하.”
우산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든 나는 노회한 얼굴을 발견하고 꾸벅 몸을 숙였다.
“…그래.”
그는 나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고 있는 내 옆에 조용히 수그려 앉았다.
“괜찮으냐?”
나직하고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그러나 아직 가족들 중에는 입에 담은 사람이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아니요.”
사뮈엘 대공의 물음에 고개를 번쩍 든 나는 날씨 때문인지 물기 어린 그의 눈을 바로 마주한 채 대답했다.
“슬퍼 죽겠어요.”
“그래.”
“괘씸하기도 해요. 나한테는 아무런 상의도 안 했으니까.”
“그렇구나.”
“대공 전하는… 다 알고 계셨죠?”
루카스가 사라진 날, 딱히 놀라지도 않고 침착한 태도로 나를 위로하는 가스파르를 보고 알 수 있었다.
루카스가 사라지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는 걸.
“그래서 지금은 대공 전하도 미워요.”
“솔직해서 좋구나.”
내 뾰족한 말투에도 대공은 힘없이 웃을 뿐이다.
“그 녀석의 마나가 완전히 사위었다는 게 느껴져서 달려와 봤더니… 이미 사라진 모양이지.”
나는 그의 축축한 목소리에 입술을 꾹 깨문 채 나무 기둥에 이마를 콕 박았다.
“죄송해요. 대공 전하도 슬프실 텐데, 제가 화풀이를 했어요.”
루카스가 사라진 사실에 나만큼이나 슬퍼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를 자식으로 생각하는 사뮈엘 대공일 터였다.
“뚝.”
루카스가 사라진 날부터 나는 툭하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흘렸다.
“여기에 네 잘못이 어디 있다고 사과를 한단 말이냐. 뚝 하거라.”
그런 나를 안아 든 대공이 내 눈가를 큰 손으로 쓱쓱 닦아 내며 말을 잇는다.
“괜찮다. 전에도 이렇게 훅 사라졌다가 갑작스레 돌아왔던 놈이야. 또 모르지 않느냐.”
“누가 사라졌나요?”
대공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던 나는 상황에 맞지 않게 발랄한 목소리에 황급히 몸을 틀었다.
‘아이네스.’
나와 눈을 마주한 아이네스가 예쁘게 반짝이는 녹안을 접으며 웃는다.
“레오노라, 요즘 좀처럼 보이지 않아서 아이네스가 직접 방문했어.”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슬픈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 걱정이 되더라고.”
“네. 감사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지만, 아이네스는 루카스가 사라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증스러워.’
그가 사라진 날, 원작 책을 펼쳐 든 나는 루카스가 사라졌다며 쾌재를 부르는 아이네스의 심리를 읽을 수 있었으니까.
“이제 곧 공작령으로 돌아간다지?”
“…그럴 것 같아요.”
“날개라도 하나 뚝 떼어진 새 같은 얼굴이네. 가여워라.”
아이네스가 작은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는다. 나는 차마 황녀의 손길을 피하지 못하고 뒤로 숨긴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렇게 슬픈 얼굴 하지 마. 아이네스가 다 슬퍼지잖아.”
“네, 황녀 전하.”
네 말대로 언제까지 슬퍼만 할 수는 없겠지.
루카스에게 약속한 대로, 나는 그레고르를 제위에서 반드시 끌어내릴 거니까.
“그러게, 레오노라.”
귓가에 입술이 닿을락 말락 가까이 다가온 아이네스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인다.
“좋게 말했을 때 내 사람이 되었으면 좋았잖아.”
달콤한, 다정하지만 은은한 협박처럼 들리는 어투였다.
“사실 나는 루카스 선황자가 사라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거든. 돌아올 방법도.”
“……!”
“자, 이제 수도에서 네 할 일은 끝났으니 조용히 사라지도록 해.”
아이네스는 놀란 내 얼굴을 보고 만족했다는 듯 웃으며 내 어깨를 세게 쥐었다.
“레오노라의 얼굴을 봤으니 아이네스는 이만 가 볼게.”
핑그르르.
아이네스가 들고 온 검은 레이스 우산이 빙글빙글 허공을 돌며 멀어진다.
‘저게 무슨 말이지?’
아무리 원작의 여자주인공이라지만 루카스는 원작에는 제대로 등장하지도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루카스에 대해 저렇게 잘 알고 있는 거야?’
입술을 짓씹은 나는 대공에게 양해를 구하고 허둥지둥 자리를 벗어나 원작 책을 펼쳐 들었다.
◈
‘이렇게 기를 팍 죽여 놨으니 당분간은 몸을 사리겠지.’
레오노라의 풀죽은 얼굴을 떠올리며 아이네스는 경쾌하게 손뼉을 쳤다.
“후후~ 원래도 작았던 얼굴이 반쪽이 되었더라구. 아이네스, 조금 슬펐어.”
“공녀를 보고 오신 건가요?”
그런 아이네스의 말에 요즘 좀처럼 아이네스를 먼저 찾지 않는 율리아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평소라면 뺨이라도 쳤겠지만, 아이네스는 오늘 무척 기분이 좋았다.
“루카스 선황자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왔어.”
“정말 완전히 사라진 건가요? 그는 @#$@잖아요.”
“율리아 말대로야. 바퀴벌레 같은 놈이지. 없애고 없애도 또 튀어나오는 게 아주 지긋지긋해.”
루카스의 거대한 마나를 떠올린 아이네스는 몸을 파르르 떨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마나의 핵마저 공작의 영혼이 육체를 되찾는 데 쓰인 것 같으니 얼마 못 가서 완전히 소멸하긴 할걸. 나라면 막을 수 있겠지만, 교단이 아니라 공작가에 붙은 놈을 뭐하러 살리겠어?”
“황녀 전하는 선황자를 다시 세상에 불러오는 방법을 알고 계시는 건가요?”
“당연하지. 나는 헬리오스잖아.”
“신기하네요. 루카스 선황자는 어떻게 되찾을 수 있다는 건가요?”
휘둥그레 눈을 뜬 율리아를 힐끔한 아이네스는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간단해. @#$!#!@#%%#.”
“……네?”
“!@#$%%$%$#.”
짧게 설명한 아이네스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든다.
“그런데, 율리아….”
콰직.
한순간에 율리아의 목을 쥔 아이네스는 작은 손으로 여자의 목을 압박하며 희번덕 눈을 떴다.
“루카스를 다시 불러오는 방법 따위를 왜 알려고 드는 거야?”
“커억!”
“아이네스, 조금 짜증 나려고 하잖아.”
“큭, 허억-! 저, 전하!”
콰드득.
“흐음.”
결국 힘없이 축 늘어진 율리아의 몸을 뒤적인 아이네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율리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도청기 아티팩트 달고 첩자짓이라도 하는 건가 싶었는데 몸에 아무것도 없네?”
아이네스는 율리아를 내려다보며 후후, 미안하다는 듯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미안. 아이네스가 율리아를 오해했나 봐.”
그러다 곧 표정을 바꿔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본다.
“그렇지만, 쓸모없었던 네 잘못이야. 아이네스는 잘못 없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