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그런 사례가 있어요? 아빠가 다른 아저씨들이랑 말하는 걸 들었는데, 귀족이 황족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한 경우는 없대요.”
내가 놀랐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는 말에 율리아가 윌레닌 제국의 황실을 비웃기라도 하듯 입꼬리를 올린다.
“기록에 남은 경우가 없는 거겠지. 윌레닌의 법전은 상당히 희한한 방식으로 공개되더구나.”
나는 율리아의 말에 공감하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위에 오른 그레고르는 루카스를 옹립하려던 귀족들에게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작위를 빼앗거나 봉토를 회수했다.
그 수가 적지 않아 자신의 재산이나 작위를 지키기 위해 반박하는 귀족 무리가 형성되자, 그레고르는 그들이 황제인 자신에게 공식적으로 대항할 수 없도록 법전 열람까지 금지해 버렸다.
‘말도 안 되는 악법이라며 법관들이 들고 일어나서 후에 법전을 다시 공개하긴 했지만….’
수정이 불가능한 제국법은 건드리지 못했지만, 그레고르가 후에 귀족들에게 보급한 황실특별법은 황족을 재판에 세울 수 있을 만한 조항이 전부 삭제되어 있는 얼토당토않는 개정판이었다.
결국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들과 황족만 온전한 법전을 볼 수 있으니 보통 사람들은 황족이 어떤 법을 어겼는지조차 알 수 없어 항의는커녕 고발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황비 전하는 혹시 윌레닌 제국의 완전한 법전을 읽어 보신 적이 있는 걸까요?”
“그래. 해서 공작이 공녀에게 독을 먹인 범인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절실하다면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걸 알지.”
“…범인이 황녀 전하라고 해도 죄를 물을 방법이 있는 건가요?”
“크흠, 글쎄.”
내 노골적인 물음에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내뱉은 율리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은 본 비가 말이 조금 많았던 것 같구나.”
벗어 두었던 외투를 챙겨 든 율리아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내게 턱을 치켜들었다.
“지루했을 공녀에게 본 비가 책 선물을 하나 하고 싶은데, 받아 주겠니? 책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느긋한 척하지만 초조하게 흔들리는 시선은 내가 아닌 응접실 창가를 훑고 있었다.
‘율리아에게도 감시가 붙었구나.’
그제야 마나로 다른 사람의 인기척을 감지한 나는 천진한 아이를 가장하며 손뼉을 마주쳤다.
“정말 기뻐요! 전에 말씀하신 동화책인 거죠? 감사히 읽을게요!”
내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인 율리아가 방을 벗어난 후, 그녀의 시종을 통해 내게 들린 책은 그림책 따위가 아닌 두터운 법전이었다.
<제국법 - 황실법령 131년 발행본>
제국력 131년이라면 그레고르가 황족에게만 유리한 법만 공개하도록 법전을 개정하기 전에 발행된 원형이었다.
쾌쾌 묵은 먼지가 쌓인 법전의 표지를 손끝으로 쓱쓱 닦은 나는 훅 끼치는 종이 냄새에 코를 찡긋한 채 책을 펼쳐 들었다.
‘따로 접어 둔 페이지도 있네.’
풀리지 않던 문제의 힌트라도 받은 기분이라 심장이 다 두근거린다.
나는 율리아가 따로 표시해 둔 듯한 책장을 펼쳐 빠르게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제국법 제58조 제2항, 백작위 이상의 귀족은 귀족원의 의견이 통합된 경우 국가 안정 보장 및 질서 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청문회를 열 권리가 있다.
제국법 제63조 제1항, 정당한 사유가 존재하는 경우 귀족원에게는 황제의 섭정을 세울 권리가 존재한다.
폭정을 펼치는 황제를 끌어내릴 수 있었지만, 윌레닌은 전제군주제로 황제는 바뀌어도 황제의 성은 바뀌는 역사가 없었던 나라였다.
‘그래서 다음 대 황위 계승권자가 너무 어릴 경우에는 섭정이 통치를 맡았었지.’
율리아가 표시한 법은 단 두 조항뿐이었지만, 나는 그녀가 내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지금 아이네스가 너무 어리니까, 그레고르를 끌어내리려면 섭정이 필요하긴 할 거야.’
율리아 황비가 생각보다 야망이 크다.
나는 그녀가 바라는 바를 눈치채고 코웃음을 쳤다.
‘자신을 섭정으로 세워 주길 원하는 거잖아.’
하지만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이렇게 율리아가 먼저 배신을 계획할 정도라면, 그레고르와 아이네스에게 등을 돌린 귀족의 수가 적지 않다는 말이겠지.’
하지만 반정에 성공하더라도 윌레닌을 율리아에게 맡기진 않을 거다.
‘그냥 독립국만 세워서 내 가족만 건사하자고 생각했지만, 더는 못 참아.’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에 의자 팔걸이를 초조하게 손끝으로 두드렸다.
* * *
“계획 다 세웠어.”
율리아가 보내 준 법전을 끌어안은 나는 루카스가 비스듬히 기댄 나무 앞에 주저앉아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반드시 성공해 낼 거야.”
“…….”
“내 계획대로라면 곧 그레고르를 황위에서 끌어내릴 수 있어, 루카스.”
내 단호한 말에도 이제는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흐릿해진 루카스가 그 인영만큼이나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대답, 안 할 거야?”
그레고르의 몰락은 루카스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것이 아니었나.
‘애초에 그레고르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나랑 손을 잡은 거면서!’
나는 마치 자신이 더 세상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듯 초연한 얼굴로 울창한 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호수만 바라보는 루카스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니면 못 하는 거야?”
“…….”
“목소리 안 나와?”
“…….”
“루카스!”
나는 내 목소리가 들리긴 하는 건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루카스의 그림자를 붙들고 몸을 숙였다.
“내가 다 밝힐게…. 밝혀 낼게.”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목소리가 젖어 들어간다.
“그레고르가 네게 한 짓도 전부 다 샅샅이 밝히고, 루카스가 정당한 황위 계승자라는 것도 만천하에 알릴게.”
나는 가라앉은 목을 애써 쥐어 짜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안 사라지면 안 돼?”
내가 붙든, 제대로 붙들리지도 않는 루카스의 소매가 바람에 나붓하게 흔들린다.
나는 그가 금방이라도 바람에 흩어질 것만 같아 성급하게 입을 벌렸다.
“내가 어떻게든 그레고르 끌어내릴 테니까, 조금만 더 버텨 주면 안 돼?”
나는 나와 공명하는 루카스의 마나가 시시각각 사라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자꾸만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리는 그의 마나를 붙들기 위해 팔을 허우적거리는 순간,
“예전에 끝냈어야 할 복수다.”
여전히 호수만 바라보고 있는 루카스가 내게 속삭이듯 입을 연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지금, 이제부터 하면 되잖아!”
“사실 나는 이제 그레고르가 밉지도 않아, 레오노라.”
“뭐?”
나는 루카스의 말이 믿기지가 않아 미간을 좁혔다.
“그 자식이 내게 저주를 걸지 않았다면, 내가 공작의 몸을 차지하게 되는 일도 없었을 거고….”
내 구겨진 이마를 손끝으로 꾸욱 누른, 아니, 누르려는 듯 손을 뻗은 그가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짓는다.
“네 아빠 노릇을 할 일도 없었겠지.”
나는 루카스의 담담한 목소리에 입을 앙다물었다.
“나는 그걸로 다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이상한 생각이야. 나쁜, 아주 못된 생각이라구….”
지금 당장 루카스가 떠날 것만 같은 기분에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그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 응?”
“너와 가족이 될 수 있었으니 나는 만족한다, 레오노라.”
나는 루카스의 입에서 나온 가족이라는 단어에 그의 바짓자락을 붙잡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아빠.
그래, 루카스도 내 아빠였다.
“리니는 루카스가 없는 거 싫어.”
나는 굵은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는 눈을 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싫다잖아.”
아이가 투정을 부리듯, 되지도 않는 떼를 쓰듯 입을 크게 벌렸다.
“딸이 싫다는데 왜, 왜 사라지려고 해?”
루카스는 그런 내가 사랑스럽다는 듯 흩어지는 제 마나를 힘껏 모아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대마법사의 마나는 생명의 근원이라 쉬이 사라지지 않지.”
그렇다면 마나의 주체였던 루카스는 어디로 가 버리는 걸까.
“그러니 나는 결국 어떤 형태로든 네 곁에 남을 거다.”
나는 작별인사를 미리 준비라도 했다는 듯 태연한 루카스의 모습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그의 품에 안겼다.
“이 형태가 좋아.”
내 작은 등을 토닥이는 루카스가 결국 웃음을 터뜨린다.
“이 모습이 좋단 말이야…!”
나는 웃는 그가 얄미웠지만, 밉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말도 하고, 같이 웃고, 안을 수 있는 루카스가 좋았으니까.
밤이 무섭다고 떼를 쓰면 어쩔 수 없다는 듯 내어 주는 루카스의 품이 좋았고, 가스파르와 달리 내가 입가에 뭘 잔뜩 묻히고 먹으면 그냥 내버려 뒀다가 닦아 주는 루카스의 커다란 손이 좋았다.
“더 억지를 부리지는 않을게.”
결국 코끝이 새빨개지도록 울어 버린 나는 축축해진 제 가슴팍을 닦지 않는 루카스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예 내 곁에 남으라는 고집은 안 부릴게.”
“…….”
“돌아만 와, 응?”
내 재촉에도 루카스의 무심한 입은 벌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단순히 방법을 못 찾은 것뿐이잖아.”
“…안녕, 나의 레오노라.”
나는 루카스의 인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꼭 감았다.
“나의 사랑스러운 딸.”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아빠로 만들어 줘서 고마웠다.
“거짓말.”
사라질 리 없다.
“거짓말…!”
루카스가 나를 떠날 리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