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우리 아빠, 우리 아빠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멋진 사람이니까 율리아 신도님도 만족할 거예요.”
막 지부장 자리에 오른 율리아에게 황비의 자리를 제안한 건 다름 아닌 아이네스였다.
“교단의 신도는 아니지만, 헬리오스인 아이네스의 아빠인 데다 윌레닌 제국의 황제니까 당연히 에티모스 님이 재림했을 때 구원받을 신민이고요.”
아이네스는 율리아가 그레고르의 비가 되는 것이 마치 교단을 위한 희생인 양 그녀를 설득했었다.
“헬리오스인 나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겠어요?”
“제게 등을 맡겨 주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럼요. 율리아 지부장은 교단의 인재인걸요.”
그때까지만 해도 율리아는 아이네스가 신에게 사랑받는, 나이는 어렸어도 지혜가 가득한 현자인 줄로만 알았다.
‘아이네스가 본색을 드러낸 건 내가 황비가 되기로 결심하고 윌레닌으로 건너온 이후의 일이지.’
현자와 지부장으로 만났을 때는 그나마 예의를 차렸던 아이네스는 율리아가 그레고르의 황비가 되자마자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그녀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으니까.
“이 서류들은 뭐야? 대충 보니 아빠가 새로 들인 애인들의 신상 정보 같던데.”
“내탕금을 배분하려면 폐하의 새로운 정부가 어떤 이들인지 알아야 하니까요.”
“흐응, 아빠 입맛을 제대로 맞춰 주는 여자가 없는 모양이지? 이렇게 매번 애인이 바뀌는 걸 보면.”
가벼운 어조로 읊조리는 아이네스의 말에 율리아는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내 부황께서도 절륜함이 역사서에 실릴 것이라는 평을 듣는 분이었지만, 그레고르 같지는 않았어.’
적어도 그녀의 아버지인 칼리시만은 황궁의 안주인인 황후와 황비들에 대한 존중은 남아 있는 황제였으니까.
그러나 아이네스는 그레고르의 방탕함의 원인이 마치 여자들에게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표정이 왜 그래?”
율리아의 기분이 저조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아이네스가 찻잔을 소서에 내려놓으며 피식 웃음을 흘린다.
“설마 질투라도 하는 거야?”
아이네스의 물음에 율리아가 입술만 달싹이자, 자리에서 일어난 황녀가 율리아의 이마를 검지로 툭 밀어낸다.
“네가 아빠 뒷조사를 하고 다닌다는 말까지 돌던데.”
“…뒷조사가 아니라 황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고개가 반쯤 뒤로 넘어간 상태로 대꾸한 율리아는 아이네스의 손가락을 잡으며 한숨처럼 말을 덧붙였다.
“아무리 일개 정부라도 황제 폐하의 손을 타는 이상 황가의 일원이니 챙기지 않을 수가 없어서요.”
“흐응. 주제넘는 말을 하네, 율리아.”
“…네?”
“윌레닌 제국 황실의 일원은 황제인 아빠와 황녀인 나 둘뿐인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이네스의 말은 황비인 율리아나 이본느를 철저히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율리아와 이본느는 윌레닌의 핏줄은 아니었지만, 비(妃)의 자리에 오름으로서 황가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황족이었음에도 아이네스는 이죽거리며 조소했다.
“아빠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내칠 수 있는 여자들이 황가의 일원이 될 수 있을 리 없잖아.”
순간적으로 벙 찐 율리아가 아이네스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자, 어깨를 으쓱한 어린 황녀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여자들의 서류를 손끝으로 훑었다.
“으음. 이 여자는 뒷배도 없고 쓸모가 전혀 없어 보이니까 율리아가 알아서 잘 쳐내도록 해.”
언젠가 율리아를 매대 위에서 썩어 가는 과일 따위에 비유했던 것처럼, 아이네스가 그레고르의 애인들을 물건 취급하며 말을 잇는다.
“아, 이 여자는 벤트뫼 공왕의 조카딸이라니까 도움이 될 만한 구석이 있을 것 같네.”
‘사람을 도대체 뭘로 보는 걸까.’
율리아 자신도 아이네스에게는 쓸 만한 도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건 진즉 깨달았지만, 여자들의 정보를 살피는 황녀의 어린 얼굴은 몹시 건조해서 두려울 정도였다.
“뭐야? 얼굴이 왜 그래?”
“아닙니다.”
“네 생각해서 해 주는 말이야. 괜히 같잖은 투기 따위 한다고 쓸모있는 여자들까지 내치지 말란 말이야. 이게 다 교단을 위한 거니까.”
“…예, 황녀 전하. 전하의 말을 반드시 명심하겠습니다.”
율리아는 혀를 쯧 차는 아이네스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아빠에게 푹 빠졌으니 금방 찾아올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나는 날이 밝자마자 다시 저택을 찾은 율리아를 마주한 채 자그마한 턱을 쓸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내가 한 일이라곤 황비가 가스파르에게 호감을 품은 듯해 앞머리 좀 올려서 데려다주라고 한 것뿐이었다.
뭐지.
설마 우리 아빠 여자 꼬시는 데 일가견이라도 있었던 건가.
나는 내 등 뒤에 선 가스파르를 연신 힐끔거리는 율리아를 향해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공작가의 수도 저택에는 무슨 일로 방문하셨을까요?”
“공녀의 몸이 잘 회복되고 있나 살피러 왔네.”
‘거짓말.’
내 물음에 뻔뻔하게 대꾸한 율리아는 다음 날도,
“오늘도 공녀의 몸이 괜찮나 걱정이 되어 찾아왔네.”
그 다음 날도,
“원기 회복에 좋다는 차를 가져왔네.”
또 그 다음 날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가며 수도 저택을 찾아왔다.
“그런데 공작은 어디 갔는가?”
며칠 동안 거르지도 않고 수도 저택에 방문한 율리아는 늘 나와-정확히는 가스파르와- 티타임을 가지려고 들었다.
“오늘은 저택에 계시지 않으세요.”
“…어째서?”
그녀의 물음에 나는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제게 독을 먹인 범인을 찾겠다고 요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시거든요. 오늘은 치안대장을 만나러 가신다고 했어요.”
“브라우스 경 말인가?”
“네. 전 괜찮다고 했는데도, 범인을 찾기 전에는 제대로 잠들 수가 없으실 것 같다고….”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나는 이미 가스파르에게 독약을 먹고 쓰러진 일이 내 자작극이었으며 아이네스를 발고하기 위해 판을 짜고 있음을 알렸으니까.
“공작은 원래도 불면증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이러다 쓰러지시진 않을지 걱정이에요. 엊그제도 복도를 걷다가 휘청하셨대요.”
예상대로 아빠의 건강을 걱정하는 내 말에 율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인상을 찌푸린다.
“오러를 다루는 기사가 쓰러질 정도라니. 그 정도로 무리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
“네. 범인의 윤곽이 좀처럼 드러나질 않아서 무리를 하시는 것 같아요.”
“…짐작 가는 사람도 없는 건가? 가령 그때 공녀의 찻잔을 매만지고 있던 사람이라던지.”
없다고 하면 아이네스가 범인이라고 대신 말해 주기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은근히 내게 힌트를 주려는 율리아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였다.
“사실 황녀 전하의 의붓어머니나 마찬가지인 황비 전하께 이런 말씀드리긴 조금 그렇지만….”
“편히 말해도 좋다.”
“전 아이네스 황녀 전하께서 제게 장난을 치신 건 아닐까 싶어요.”
“흐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날 황녀 전하께서 저보고 차를 마시라고 강요하셨거든요.”
나는 내게 슬슬 친밀감을 느끼는 듯한 율리아의 눈치를 보며 쉬잇, 비밀이라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아시죠? 지금 제 말은 황비 전하와 저 사이의 비밀이라는 거요. 다른 사람들은 제가 황녀 전하를 모독한다고 제 뜻을 곡해할 수도 있잖아요.”
내 말에 율리아가 내가 귀엽다는 듯 설핏 웃는다.
“황비 전하는 제가 아는 황족들 중 가장 공정하신 분이니까 말씀드리는 거예요.”
나는 아부를 살짝 덧붙여 말하며 율리아를 향해 웃어 보였다.
“황족… 그래, 본 비를 이 제국의 황족으로 인정해 주는 건 공녀뿐이구나.”
그러자 천진함을 가장한 내 얼굴을 찬찬히 살핀 율리아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내 뺨을 쓰다듬는다.
“네? 황실의 안주인이신 황비 전하가 황족이 아니라면 누가 황족이란 말씀이신가요? 어떤 바보가 그런 말을 했대요?!”
율리아에게 그런 막말을 할 만한 사람이라면 아이네스나 그레고르겠지만, 나는 부러 양 주먹까지 부들부들 떨어가며 분개했다.
“그러게나 말이야. 그런 바보가 있긴 있더구나.”
율리아는 저 대신 화를 내는 내가 기특하다는 듯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정말 아이네스 황녀가 공녀에게 ‘장난’을 친 거라면 공작이 꽤나 곤란하겠어. 상대가 황족이니 말이다.”
“네. 원칙적으로 황제 폐하의 신하인 아버지는 황녀 전하나 폐하의 죄를 발고하실 수 없으니까요.”
“꼭 그렇지만도 않을 텐데.”
“네?”
“귀족이 황족을 고발한 사례가 존재하긴 하니까 말이야.”
나는 율리아의 은근한 목소리에 희번덕 눈을 빛냈다.
‘옳지, 드디어 미끼를 물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