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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74)화 (409/486)

제174화

“지금은 단장직에서 내려왔지만, 흑랑(黑狼)을 십 년이 넘게 이끌었던 몸입니다. 외려 전하의 몸이 상하시지 않았다면 제가 다행으로 여길 일입니다.”

황비의 말 어느 부분이 우스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빠의 입가에는 그 특유의 다감한 미소가 걸린 채였다.

‘안 돼…!’

웃지 않고 있을 때에는 퍽 냉정해 보이는 가스파르의 얼굴이 그럴 때 얼마나 다정해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소리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우당탕 그를 향해 달렸다.

‘그렇게 함부로 웃지 마요! 설레할 거라고!’

“그래…. 그대 몸이 탄탄해 보이긴 하네.”

“……?”

나는 이미 아빠의 미소에 홀린 듯 작게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는 율리아 황비와, 그녀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이는 아빠 사이를 가르듯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제국을 비추는 은혜로운 달을 뵙습니다. 광영을 누리소서!”

아빠에게 푹 빠져 내가 응접실에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율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돌아본다.

“크, 크흠! 본비가 몸소 공녀의 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걸음하였는데, 마침 눈을 떴다 하니 다행이구나.”

“네, 황비 전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황비의 검은 속내를 애써 모른 체하며 천진한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래. 아직 몸이 다 회복하지 못했을 테니 공녀는 가서 쉬는 게 좋겠어.”

그러자 내 인사에 대충 대답한 황비가 방문의 본 목적도 잊은 듯이 가스파르 쪽으로 아예 몸을 틀어 버리는 게 아닌가.

“그나저나 공작, 본비의 발목은 이제 멀쩡하니 더 걱정할 필요는 없네.”

나는 그리 말하며 은근슬쩍 제 발목을 내보이는 황비의 행동에 기함했다.

‘이 아줌마가 미쳤나…!’

어린애 앞에서 뭐하는 건가 싶었지만, 가스파르는 그녀가 기행을 벌이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단정한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네. 다행입니다.”

“그대가 의사에게 보이는 게 좋겠다고 본비를 신경 써서 말해 준 덕분이야.”

나는 살짝 붉어지기까지 한 황비의 발그레한 뺨을 힐끔하다 턱을 쓸었다.

‘잠깐만.’

정말 우리 아빠를 좋아하는 거라면 이용해 먹지 않을 이유도 없잖아.

‘살짝만 떠볼까.’

나는 가스파르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모르는 율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아빠. 황제 폐하께서 공비를 들이라고 권한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뭐?”

나는 대체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아빠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아. 그랬…지.”

그러자 내 부릅뜬 눈을 마주한 가스파르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인다.

“후보도 추려서 보내 주신 걸로 기억하는데요!”

물론 없는 말을 지어내는 건 아니었다.

그레고르는 분명 이아론 후작을 이용해서 공석으로 비워 둔 공작 부인 자리를 메우려고 들었으니까.

“황제 폐하께서 본비와 상의하지 않고 공작가의 내정까지 살피셨을 줄은 몰랐는데.”

“폐하께서 아빠에게 하신 말씀까지 정확히 기억나요! 진정한 남자라면 부인을 다섯은 둬야 한다고 하셨죠.”

내 말에 율리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는다.

‘그레고르가 앞에 있었으면 한 대 쳤을 것 같은 눈이네.’

황제는 대놓고 불륜을 저지르다 못해 신하들에게까지 정부를 들이라고 권유할 만큼 형편없는 남편이었으니 율리아의 심정을 이해 못 할 것은 없었다.

“…개국공신인 공작가의 대소사를 살피는 일은 황실의 안주인인 본비나 이본느 황비가 맡아야 할 터인데 부끄럽군. 미안하네, 공작.”

“아닙니다. 게다가 저는 공작 부인을 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전하.”

“네, 네!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황비 전하도 그렇고, 황제 폐하도 그렇고 아빠랑 저를 매우 챙겨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나는 아빠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썩어 들어가는 율리아의 얼굴을 힐끔했다.

‘감정 조절에 능숙하진 않나 보네.’

가까이에서 관찰한 율리아 황비는 사교계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같은 황비였지만 이본느는 남들 앞에서 결코 제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으니까.

‘이베트 부인으로 활동할 때에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제 막 윌레닌으로 시집온 율리아는 아직 수도 사교계의 때가 덜 묻은 모양이었다.

‘그래, 따지고 보면 자카리보다 겨우 몇 살이 많은 정도니까 그럴 수도 있지.’

나는 문득 율리아의 얼굴이 무척 앳되다는 것을 깨닫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노엘에게 관심을 보인 것도 그렇고, 그레고르는 아주 다방면으로 파렴치한 인간이긴 했다.

“율리아 황비 전하처럼 따뜻한 분이 공작가로 와 주신다면 좋을 텐데요.”

“…그래?”

‘그렇겠냐.’

아무리 황족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율리아는 결국 아이네스의 최측근이자 그레고르의 아내였다.

하지만 나는 내 말에 기쁘다는 듯 얼굴에 화색이 도는 황비를 향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지 않아요, 아빠?”

“나는 너희 엄….”

마뿐인 거 잘 알지만, 지금은 입 다물란 말이에요!

‘이게 다 엄마를 무사히 되찾아오려고 하는 거라고!’

콰직.

나는 황비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하고 엄마를 향한 절절한 애정을 드러내려는 아빠의 발등을 꾹 눌러 밟았다.

“……레오노라.”

내 행동에 기분이 상하기라도 했는지 아빠가 단정한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나를 불렀지만, 나는 그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율리아 황비를 돌아보았다.

“황비 전하, 전하께서 몸소 저택을 찾아 주셨으니 황궁까지 모셔다드리는 게 예법에 맞는 거겠죠? 저는 그렇게 배웠어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본비가 꼭 강요하려는 건 아니지만.”

예법은 개뿔 방금 내가 생각나는 대로 지어낸 핑계에 율리아가 뻔뻔하게도 고개를 끄덕인다.

“네! 마침 아빠도 오늘 대회의가 있어서 입성하셔야 하는 날이에요.”

“그래? 그럼 에스코트를 부탁해도 되겠는가, 공작?”

“…네, 전하. 공작가에서 전하께서 타고 돌아가실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황비의 요구에 가스파르가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준비하고 뵙겠습니다, 황비 전하.”

나는 인사를 올린 후 볼일이 끝났다는 듯 응접실을 벗어나는 아빠를 재빨리 따라나섰다.

“아빠! 이따 황궁 가실 때 앞머리 좀 올리고 가세요.”

“어째서.”

내가 율리아 황비와 함께 황궁에 가는 것을 권유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가스파르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는 채였다.

“…그냥요.”

나는 아빠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앞으로 도도도 달려나가 그의 허리에 이마를 비볐다.

“아빠는 깐 머리도 잘 어울리니까!”

“…….”

“황궁 사람들에게 리니 아빠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자랑하고 싶은걸요!”

“그래.”

내 말에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은지 잔뜩 굳어 있던 가스파르의 시선이 느른히 풀어진다.

‘잘생긴 얼굴 뒀다 뭐해, 이럴 때 써먹는 거지.’

나도 아빠를 팔아먹는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하지만 황궁까지 함께 가자는 아빠의 제안에 씰룩이는 율리아의 입매에서 강력한 냄새가 풍겨와 어쩔 수 없지 않나.

킁킁.

킁킁킁.

그녀를 이용해 아이네스의 덜미를 붙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승리의 냄새였으니까.

* * *

“데려다줘서 고맙네, 공작.”

“네.”

헛기침을 하는 척 목소리를 가다듬고 인사하는 율리아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가스파르는 멀어지는 등조차 정중하다 못해 단아한 이였다.

‘말을 조금이라도 더 나눠 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율리아를 향해 시녀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서류 한 장을 내민다.

“전하, 황제 폐하가 이번에 새로 들이신 정부들의 목록입니다. 내탕금을 배분하라는 황명이 있으셨어요.”

“또 새로운 여자를 애인으로 들이셨다는 말이야?”

율리아는 시녀의 말에 기가 막혀 인상을 찌푸렸다.

‘황실의 내정 예산이 전부 정부들의 생활비를 대주고 사치품을 보급하는 데 쓰이는 수준이질 않나.’

율리아는 타 제국 황녀 출신으로 사유재산이 넉넉한 이였고, 이본느 황비는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해서 원래대로라면 넉넉하게 남았어야 할 내탕금이 그레고르의 애인들 덕분에 남아나질 않았다.

“네. 그리고 이건 보석상 및 살롱에서 황실 앞으로 청구한 영수증입니다.”

율리아는 시녀가 떠넘기듯 건넨 두터운 장부에 짧게 혀를 찼다. 개중에는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보석도 적지 않았다.

“인어의 눈물…. 폐하께서 오스몬드 왕실의 가보를 새 애인을 위해 사셨다는 게야?”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렇습니다.”

‘황실 앞으로 달린 외상 금액이 벌써 이번 분기 예산을 훨씬 넘어가잖아.’

황제의 정부들이 내탕금을 소진하다니, 율리아의 고향인 칼리시만 제국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꺄아, 폐하~! 밖에서 이러시면 싫어요~!”

“이리 오래도. 보고 듣는 사람들의 눈과 귀가 있어야 너와 사랑을 나눌 재미가 있지 않겠느냐.”

율리아는 다른 곳도 아닌 황비궁 정원에서 들려오는 가증스러운 목소리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내가 잡은 줄이 썩은 동아줄이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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