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공자들의 걸음걸음마다 수도 저의 복도가 얼어붙었다 불이 붙었다 하는 통에 내부가 남아나질 않았다.
쩌적- 쩍.
“어쩌죠, 아가씨….”
나무 기둥에 생긴 틈이 갈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셀리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돌아보며 가볍게 제 턱을 쓸어내린다.
“일이 너무 커졌는데.”
“그러게.”
이불에 쏙 파묻힌 채 오빠들의 간절한 시선을 애써 외면하던 나는 침대 밖에 튀어나온 발을 팔랑거리다 이마를 짚었다.
‘내가 평소에 너무 안 아팠나?’
독약을 먹은 게 큰일이긴 하지만, 의사들이 단순히 잠에 든 것뿐이라고 재차 확인을 해 주는데도 저 난리를 피울 줄은 몰랐다.
‘이제 슬슬 내가 아픈 거에 익숙해져야 할 텐데 큰일이네.’
나는 이제 곧 아홉 살이었고,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시간은 막을 길이 없었으니 금세 루에르병이 발병할 터였다.
‘엘릭서를 손에 넣을 방법을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아프긴 아플 텐데 그때 애들 정신이 남아나려나.’
나는 분리 불안을 앓고 있는 멍멍이들 같은 차남과 삼남을 떠올리며 아효,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자카리는 냉정을 유지해서 다행이지.’
역시 서브남주라 내게는 관심이 없구나, 싶어 안심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부서진 기둥 아래 길게 늘어난 그림자를 발견하고 말았다.
쉐도우나이츠가 물체의 그림자를 이용해 누군가를 겁박한 흔적임이 틀림없었다.
“…이건 아빠가 한 건가?”
가스파르는 나와 관련한 일이라면 에녹 못지 않은 다혈질이 되어 버리곤 했었다.
고용인들 겁준다고 애꿎은 저택 수리비만 나오게 생겼다.
“어휴, 다들 별것도 아닌 일로 난리들이네.”
“아뇨, 이건 가주님이 아니라….”
절레절레 고개를 내젖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셀리아가 머뭇머뭇 입을 연다.
“응?”
“아뇨, 아니에요.”
“뭐야, 싱겁게. 아빠가 아니면 누군데?”
내가 셀리아가 감추고 있는 무언가를 캐묻기 위해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선다.
“공녀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일명 <레오노라 공녀 음독 사건>의 주동자인 힐다였다.
“응. 멀쩡해.”
나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시퍼렇게 물든 내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체내에 흡수된 어떤 독이든 단기간에 손톱 밖으로 배출해 내는 약이라니….’
힐다가 개발한 신약은 어떤 병이든 치료할 수 있는 엘릭서는 아니었지만, 어떤 독이든 약효를 발휘하기 전에 막아 낼 수 있는 신통방통한 해독제였다.
‘물론 해독제의 유효 기간이 매우 짧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면 세간의 주목을 끌 만한 신약이지.’
제랄드 공방에서만 활용하던 아크레아의 유물을 힐다의 제약 회사 쪽에서도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몇 개 골라 넘겨줬을 뿐인데, 힐다의 연구는 요즘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개를 치고 있었다.
“노엘은 괜찮아?”
“네. 공녀님이 말씀하신 대로 깊게 잠들게만 해 놨어요.”
“고마워, 힐다.”
짐짝처럼 들고 있던 노엘을 내 발밑 소파에 내려놓은 힐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불만을 토로한다.
“아가씨 부탁이라 몰래 황궁 의료원에서 빼내 오긴 했지만, 다시는 이런 일 시키지 마세요. 전 새가슴이라고요.”
‘그렇다기엔 작전 짜면서 너무 눈을 반짝이지 않았나….’
힐다의 신약을 활용한 작전을 내놓았을 때 가장 재미있어했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게다가 노엘에게 먹일, 인체에 무해하지만 적당히 독극물처럼 보일 약을 고르면서도 엄청 신나 했었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무방비한 상태로 내게 당한(?) 노엘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를 노린 범인으로 지목될 가장 유력한 후보였으니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따로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없지?”
“원래는 공녀님의 경쟁 상대였던 저 소녀로 몰고 갈 계획이었던 것 같은데, 물거품이 되었죠.”
힐다의 말에 내가 예상했다는 듯 입꼬리를 들어 올리자, 내 작은 콧잔등을 툭 두드린 그녀가 한숨처럼 말을 덧붙인다.
“위험한 작전이었지만 성공이긴 해요, 아가씨.”
“아이네스가 내게 먹이려던 약의 성분은 알아봤고?”
“네. 저도 처음 접하는 성분이 있더라고요. 독보다는 연금술로 제조된 약물에 가까워요.”
나는 힐다가 내 몸에서 빼낸 약물이 담긴 투명한 플라스크를 힐긋하며 입을 열었다.
“효과는?”
“정신 지배입니다.”
내 물음에 냉큼 대답한 사람은 힐다가 아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창가에 걸터앉은 자르파라가 북슬북슬한 장발의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나는 내 발등에 입을 맞추는 여인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떨떠름히 미간을 좁혔다.
“…자르파라가 이 약을 어떻게 알아?”
“나의 왕께서 태어난 순간부터 먹어 온 약이니까요.”
“히스가?”
“네, 나의 태양이시여.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했습니다만… 멀쩡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나는 핼쑥한 자르파라의 얼굴에 혀를 샐쭉 내밀며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아, 미리 말을 못 했네. 걱정 끼쳤으면 미안.”
“아닙니다. 나의 빛과 태양이신 공녀님께서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작전에서 제가 제외되었다는 건 제가 그만큼 신임을 얻지 못했다는 뜻이겠죠.”
“응? 그런 건 아니야.”
“움베르토 제약에서 제랄드 공방의 유물을 빼돌리고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자애로운 나의 빛과 태양인 공녀님의 한줄기 햇살 같은 사랑마저 빼앗고 있었을 줄이야….”
내게 들릴 듯 말듯 혼잣말을 중얼거린 자르파라의 빛나는 금안이 향하는 방향을 확인한 나는 허둥지둥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무, 무슨 효과가 있는 약이라고? 힐다보다는 자르파라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네. 아크레아의 약물인 만큼 제가 더 잘 압니다.”
자르파라의 대답에 힐다의 얌전한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는 듯싶었지만, 나는 모른 체 자르파라에게 매달리며 입을 열었다.
“우-와. 대단하다! 그럼 설명해 줄 수 있어?”
“당연하죠. 큼, 흠흠.”
자르파라는 내 재촉에 살짝 붉어진 볼을 긁으며 힐다의 손에 들린 플라스크를 가리켰다.
“이 약은 점진적으로 정신을 장악해 각인한 대상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다만 단번에 효과를 볼 수는 없고, 꾸준히 복용해야 합니다.”
“각인 대상?”
“네. 보통은 약을 제조한 연금술사지만, 만드는 방법에 따라 각인 대상을 지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약을 분석하면 누가 각인 대상인지 나온다는 말이네.”
나는 자르파라의 설명에 무색무취의 약을 노려보다 침을 꿀꺽 삼켰다.
‘좋아. 그 정도면 아이네스가 내게 독을 먹이려고 했다는 확실한 증거로 삼을 수 있겠어.’
드디어 엑스트라에 불과한 내가 주인공인 아이네스에게 반격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 * *
뽀짝뽀짝.
아빠와 오빠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침실을 빠져나온 나는 루카스의 흔적을 찾아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여기서 루카스 냄새가 나는데….’
마나로 후각을 강화시켜 루카스의 행방을 찾아낸 나는 수도 저택의 후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입구와 동떨어진 외딴 구석, 울창한 너도밤나무에 기댄 채 앉아 있는 그가 눈에 들어온다.
‘언제 봐도 참 미인이란 말이야.’
얼굴이야 잠든 상태에서도 실컷 구경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루카스는 정말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예쁜 사람이었다.
‘이렇게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남자라니.’
왜 그레고르가 황위에 오르자마자 루카스의 초상화란 초상화는 전부 불살라 버렸는지 알 것 같은 미모랄까.
나는 나보다 열 배는 부드러워 보이는 그의 은발이 햇볕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발견하고 작게 감탄하며 나무에 다가섰다.
“루카스.”
기척에 예민한 그답지 않게 루카스는 내가 코앞에 다가설 때까지도 두 눈을 굳게 감은 채였다.
‘잠든 건가?’
“루카스, 일어나 봐!”
뭔가 묘한 기시감이 들어 침을 꿀꺽 삼킨 나는 그의 이름을 목청껏 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와락.
나는 내 손끝에 닿는 까칠까칠한 나무껍질에 화들짝 놀라 몸을 굳혔다.
후두둑, 내 몸과 부딪힌 나무에서 밤송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고즈넉한 정원을 울린다.
“루카스…?”
루카스의 몸을 그대로 통과한 내가 당황해 뒷걸음질 치자, 잠든 줄로만 알았던 그가 천천히 눈을 뜬다.
“무슨 일이야? 지금, 내가- 내가 루카스를-”
떠듬떠듬 입을 여는 나를 지켜보던 루카스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엉거주춤 주저앉은 나를 안아 올렸다.
아니, 안아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그를 안지 못했던 것처럼 허공을 껴안을 뿐이었다.
“이제는 안지도 못하는군.”
나는 루카스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어 입을 벌렸다가 있는 힘껏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으니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루카스의 몸이 산란하는 햇볕과 함께 부서질 듯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울 필요 없어.”
“…….”
“내게 아쉬운 건 네가 성인이 되는 걸 지켜보지 못한 것뿐이다.”
자신을 아주 조금이라도 닮았을까 싶어서, 바란 건 아니지만 궁금해져서 기다리게 되었다고.
그가 짤막한 말을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