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꺄아아악!”
찻잔에 손을 댄 레오노라의 작은 몸이 휘청거리다 가을 낙엽처럼 바닥에 툭 떨어지자, 쓰러진 아이를 가장 먼저 발견한 귀부인이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여기 사람이 쓰러졌어요!”
그녀의 말을 기점으로 상황은 삽시간에 비상상태에 접어들었다.
“공녀님이…! 공녀님이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의사, 의사를 불러오지 않고 뭣들 하는 것이야!!”
당황한 사람들이 의사를 찾는 와중에 쥘부채를 쥔 여자가 나직하지만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또렷하게 툭 말을 내던진다.
“…누가 감히 황궁에서 음독 살해를 계획한 걸까요?”
“공녀가 독에 당한 거란 말인가요?”
“어머나!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멀쩡했던 아이가 차 한 모금 마셨다고 갑자기 쓰러질 리가 없네요.”
그녀의 말에 먹이를 발견한 배고픈 짐승 무리처럼 가십에 목마른 사교계의 사람들이 수런거리기 시작한다.
레오노라에게 차를 서둘러 마시라고 강요했던 아이네스는 두 눈을 도로록 굴리다 준비했던 멘트를 천진하게 입에 담았다.
“공녀가 독에 당했다면, 누가 범행을 계획했을까요? 설마… 아이네스의 배동이 너무 되고 싶었던 건 아니겠죠?”
“저년, 저년을 끌고 가거라! 감히 짐이 있는 자리에서 음독을 계획해?!”
속상하다는 듯 큰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는 아이네스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레고르가 노엘을 지목한 순간이었다.
“헉! 노엘 양!”
“노엘 양도 쓰러졌습니다!”
레오노라의 뒤를 따르기라도 하듯 노엘마저 쓰러지고 말았다.
* * *
‘아이네스의 계획이 틀어진 모양이군.’
그레고르는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 황궁에 입성한 가스파르를 맞이하며 턱을 괴었다.
“오랜만이네, 공.”
노엘의 실종 이후 가스파르는 전처럼 그레고르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황제가 먼저 인사를 건네는데도 별다른 감흥 없이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가스파르를 지켜보던 그레고르는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딸의 일은 짐도 매우 유감스러워.”
“…….”
“배동 선발전이니 뭐니, 외부인이 황궁에 섞여 들어와 관리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야.”
“제 딸이 쓰러지기 전에 폐하께서 하사하신 찻잎을 우려낸 차를 마셨다고 들었습니다.”
가스파르의 딱딱한 말에 그레고르는 울컥하며 입을 열었다.
“설마 짐을 의심하는 것인가?!”
샛노란 황금으로 두른 의자 팔걸이를 붙든 손등에서 시퍼런 핏줄이 투두둑 올라왔지만, 가스파르는 전처럼 분개한 황제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새까맣게 빛나는 고요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할 뿐이다.
‘원래 이렇게 속을 알 수 없는 자였나?’
그레고르는 가스파르의 속내를 간파하기 위해 눈을 가늘이며 말을 이었다.
“짐에게 자네의 딸을 해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나. 공녀는 공의 딸이기 전에 노엘의 딸이기도 하네.”
“모르죠.”
실종된 공작 부인까지 언급하며 제 결백을 주장하는 황제를 응시하던 가스파르가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모르니 지금부터 밝힐 생각입니다, 폐하.”
“…….”
“만약 폐하께서 이번 사건과 아주 조금이라도 연루가 되셨다는 게 밝혀진다면, 아무리 제국의 황제라 하셔도 그냥 넘어가실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레고르는 가스파르의 말에 그제야 자신 앞의 사내가 늘 겸손하고 수그릴 줄만 알던 공작이 더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 귀족 가문에 속하긴 했지만, 그간 다른 귀족들의 비웃음이나 샀던 하차니아가 얼마나 성장했는지와 함께.
“지금 그게 무슨…! 감히 짐을 겁박하는 건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더니 아주 개판이야. 여전히.”
가스파르를 붙잡고 윽박을 지르려던 그레고르의 말은 누군가의 비뚜름한 목소리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늘 개판이던 곳이라 딱히 놀랍지는 않군.”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인영이 눈에 띈다.
느른한,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묻어나는 목소리는 그레고르가 혐오하던 자의 것이었다.
“…루카스.”
‘깨어났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리 멀쩡할 줄이야.’
루카스는 소유한 마력이 워낙 방대해 군권을 장악했던 그레고르조차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숙적이었다.
허리까지 길게 뻗은 결 좋은 은발, 토끼처럼 소름끼치는 분홍색 눈을 힐끔한 그레고르는 이를 부득 갈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어찌 저리 멀쩡한 거지? …는 분명 루카스가 깨어나 봤자 금방 사라질 거라고 하지 않았나.’
주목받지 못하던 황자 시절에 손을 잡은 이의 말을 떠올린 황제는 살아 있는 악몽과 같은 루카스를 마주한 채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네가 황성에는 무슨 일이냐.”
“어린아이 한 명 지키지 못해서야 황실 체면이 남아나지 않겠다는 생각에 내 형제가 걱정되어서.”
거침없이 단상 위에 오른 루카스가 황좌 위로 비스듬히 허리를 숙인다.
그레고르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전부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두 눈에 움찔하며 황좌를 내려쳤다.
“짐 앞에서 함부로 입 놀리지 마라!”
그래, 자신은 황제였다.
뛰어난 루카스와 늘 비교당하던 비루먹은 황자가 아니라.
“…짐이 너를 살려 두는 이유는 짐의 손에 피를 묻혀 가며 직접 처리하지 않아도 네가 곧 죽을 목숨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얼마 남지 않은 루카스의 시간을 지적해 보았지만, 그는 그레고르의 예상과 달리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그래, 위대하신 황제 폐하. 하지만 폐하가 알아 둬야 할 게 있어.”
그저 담담하게 위엄이 깃든 황좌에 앉은 자신을 내려다볼 뿐이다.
“나는 누구든 끌어안고 절벽에서 떨어질 준비가 되었다는 거.”
“…….”
“내가 없는 세상에 남겨 둘 아이를 해하려는 사람은 어떻게든 끌어안고 같이 죽을 생각이다, 그레고르.”
루카스는 황위를 코앞에 뒀던 그때처럼 느른히 웃으며 제 형제의 어깨를 가볍게 쥐고 황좌에서 떨어졌다.
“…젠장! 제기랄! 빌어먹을 놈들!!”
곧 루카스와 가스파르가 떠나 텅 빈 알현실을 거친 욕지거리가 가득 메운다.
* * *
각하께서 변하셨다.
또.
“본성 의료원을 통째로 들어 옮기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해독에 성공해야 한다.”
으득.
“실패할 시….”
평소 자신들의 안위를 다정히 살피며 어르던 주인은 더는 이 자리에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의사들은 황급히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저, 절대 실패하지 않겠습니다!”
“예! 저희가 꼭 해독제를 구해 오겠습니다!”
힐다를 따라 공작성의 의료원 개혁을 주도한 로이크는 간밤 자신의 보고를 받으며 제 부인의 안부까지 물어봐 주던 가스파르를 떠올리며 남몰래 입술을 짓씹었다.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상냥하셨잖아요!’
어느 날은 봄날 햇볕처럼 따스했다가, 어느 날은 세상에 이토록 무심한 자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차갑게 굴다가를 반복하던 가스파르가 무심한 쪽으로 성격을 굳힌 지 어언 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최근에는 또 예전처럼 사용인들을 챙기곤 했었기에 로이크는 가스파르가 제 본 성정을 되찾았나 싶었다.
‘이중인격자도 아니고 도대체 왜 허구한 날 사람 성격이 바뀌느냐고?’
제 휘하 의사들을 데리고 공작의 집무실을 나선 로이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채 고뇌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집안에서 이상한 건 가주인 가스파르만은 아니었다.
“너네 다 몸조심해라. 공자님들도 아가씨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구시지만, 아가씨만 없으면 무슨 개….”
“히익! 로이크 님!”
로이크는 제 부하의 다급한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가 살벌한 얼굴의 소년 셋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고, 공자님들. 각하를 뵈러 오신 겁니까?”
“아니, 그대를 찾아왔는데. 힐다는 자리를 비웠다기에.”
무심하게 대꾸하는 실베스테르의 어투는 정중하기 짝이 없었지만, 로이크는 제 발밑이 실시간으로 얼어붙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 발목까지 얼려 버리시면 어떻게 공녀님을 치료하러 움직입니까…!’
항의하고 싶었지만, 실베스테르 앞에 나선 막내 공자가 활짝 웃으며 로이크의 어깨를 짚는다.
“형. 발을 얼리면 어떡해? 움직이게는 해 줘야 리니를 치료하든 말든 할 것 아니야.”
로이크의 속마음이라도 읽은 듯, 에녹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진다.
“내가 녹여 줄게, 로이크.”
화르륵.
“…….”
발목이 얼어붙었다 활활 타는 바람에 없어질 것 같았지만, 로이크는 타닥탁 타오르는 제 바짓춤을 마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 요즘 오러 조절이 제대로 안 되네. 하마터면 옷 말고 사람을 태울 뻔했어.”
에녹의 태연한 말에 그는 수도 저택에 올라가게 되면 막내 공자를 가장 조심해야 한다는 힐다의 경고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공녀님이나 가주님 앞에서만 아이처럼 구는 분이니 조심하세요.”
“힐다 님이 뭔가 오해를 하시는 거 아닌가요? 에녹 도련님이라면 실비 도련님과 달리 밝고 다정하신 편인 것 같은데….”
“로이크, 에녹 도련님이 적랑(赤狼)에서 무슨 역할을 맡고 있는지 알면 그런 생각 못 할걸요.”
“그냥 최연소 부대장 아니었습니까?”
“…에녹 도련님이 맡은 부대, 적랑의 정보부예요.”
적랑의 정보부.
제국에 속한 다른 기사단과 타국을 견제하기 위해 세워진 적랑의 최정예 부대로 갖은 암투와 술수에 능한 기사단의 그림자나 마찬가지였다.
“에이. 정보부대원들에 대한 정보는 적랑의 기밀이나 마찬가지인데, 힐다 님이 잘못 안 거 아닐까요? 에녹 도련님, 이제 막 열세 살이 되셨잖아요?”
그때는 힐다의 말을 의심했지만, 로이크가 마주한 에녹은 웃는 얼굴로 금방이라도 제 온몸을 활활 태운다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소년이었다.
‘우리 아가씨, 반드시 치료하자.’
아가씨가 깨어나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이고 의료원에 속한 기십 명의 사람들이 진짜로 목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아니, 시체라도 남기면 다행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