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64)화 (399/486)

제164화

“나는 그런 거 아냐.”

아벨의 말에 기겁하며 고개를 내저은 나는 아이네스와의 차이점을 말해 주기 위해 다급히 입을 벌렸다.

“내가 위로 오빠만 셋이고, 오빠들 전부 오러 사용자라 오러에 대한 지식이 남달라서 그래.”

게다가 그중 두 놈은 내가 직접 오러 강화까시 시킨 전적이 있었다.

“오러에 대한 지식이 있으시다고요.”

나는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의구심이 깃든-그 와중에도 예쁜- 주홍색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벨의 손을 덥석 잡았다.

“못 믿겠으면 오빠들을 불러 줄까?”

“…실베스테르 공자를 불러 주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아벨이 되묻는 말에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웃었다.

‘미끼를 물었네.’

“흐응. 너, 실비 좋아하는구나.”

자카리나 실베스테르, 그리고 에녹은 어린 병사나 기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셋 모두 매우 이른 나이에 오러를 발현한 천재인데다 벌써부터 각각 기사단에서 중역을 맡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으니까.

‘자카리는 무려 기사 단장이고.’

하지만 아벨이 동경하는 사람은 또래 윈터나이츠 중에서 유일하게 설산을 움직일 만한 위력을 지닌 실베스테르인 모양이었다.

‘그래, 이럴 때 아니면 우리 차남 어디서 또 써먹겠어.’

“응. 오늘 당장이라도 부를 수 있어.”

안 그래도 쪽지 하나만 덜렁 남기고 저택을 빠져나온 터라 내 걱정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가족들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 참이었다.

나는 아벨의 시큰둥한 얼굴이 발그스름한 복숭앗빛으로 물드는 것을 확인하고 단상 위에 올라섰다.

“자, 다들 기초 훈련은 마무리한 것 같으니 이리 모여!”

나는 내 앞에 옹기종기 모여든 소년병을 둘러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 훈련부터는 검술과 보법을 알려 줄 선생을 붙여 줄 생각이야. 기초 훈련은 오전에 마치고 오후에는 네 명씩 찢어져서 훈련에 참가하도록 해.”

“선생이요?”

“그래. 에녹 하차니아와 실베스테르 하차니아가 일주일간 우리 미남대… 의 선생님이 되어 줄 거야.”

입에 잘 붙지 않는 분대의 이름을 겨우 읊은 나는 화들짝 놀라 입을 벌리는 병사들을 흘깃했다.

“그웬달 경과 에드가 경을요?!”

아벨과 마찬가지로 아직 어린 병사들까지 에녹과 실베스테르의 미들네임을 알 정도로 그들을 동경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화색이 도는 병사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검술은 실비, 보법은 에녹이 전문이니까 잘 보고 배워 두면 도움이 될 거야.”

“와아-! 다행이다. 나는 또 오늘처럼 재미없고 힘든 훈련만 매일 할 줄 알았는데!”

에녹과 실비를 초빙하겠다는 말에 제이크가 두 팔까지 번쩍 들며 환호성을 내지른다.

“오늘 한 훈련, 이제 매일 할 건데?”

“예?!”

나는 그가 헛된 희망을 품지 않도록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말했잖아. 오전 기초 훈련은 통일이라고.”

에녹이랑 실비도 그러더니,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기초 훈련을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기초가 탄탄해야 오러든 마나든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법이거늘….’

하여간 빠져 가지고.

나는 그들을 흘겨보며 쯧쯧 혀를 찬 후 우선 씻고 오라며 병사들을 해산시켰다.

병사들이 훈련관 안으로 사라지자마자 내 부름을 받고 저택을 빠져나온 룰루랄라가 서둘러 달려 나온다.

“아가씨!”

“룰루! 부탁한 물건들은 가져왔지?”

“네, 물론이죠. 저택 연무장에서 아가씨 전용 의자도 가져왔어요.”

“히히. 역시 룰루랑 랄라가 최고야.”

내 마음을 찰떡같이 읽어 준다니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랄라가 대령한 교관모와 선글라스를 품에 안은 채 의자에 착석했다.

“부채도 부쳐 드릴게요!

“아휴, 오늘 힘드셨나 보다. 땀이 송골송골 나셨네.”

쪼로록.

룰루가 주머니에서 꺼내 든 유리병에 빨대를 꽂은 나는 딸기 주스를 호로록 빨아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아벨이라는 이름,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아벨, 아벨….

지금 소지하고 있는 원작 책은 내가 전생에 읽었던 단순한 로판과는 아예 궤가 달라졌기 때문에 이제 본 내용을 떠올리는데는 도통 도움이 되질 않았다.

아벨의 이름을 속으로만 되뇌며 끙끙 앓던 나는 곧 포기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뭐, 곁에 두고 지켜보다 보면 떠오르겠지.’

룰루가 커다란 깃털 부채로 만들어 내는 하늘하늘한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는데 벌써부터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씻는 속도 하나만큼은 다들 빠르네.’

실비와 에녹이 온다는 말이 병사들을 꽤나 설레게 한 모양이었다.

“룰루, 랄라. 에녹이랑 실비에게 내 편지는 잘 전달한 거지?”

“네. 당장 출발한다고 하셨으니 이제 곧 도착하실 거예요.”

나는 랄라의 대답에 노곤한 몸을 움직여 입구 쪽으로 몸을 틀었다.

‘자기들 말 듣지 않고 배동 선발전에 참가했다고 성가시게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네.’

“자, 병사분들은 아가씨 뒤에 서서 대기해 주세요. 공자님들이 곧 도착하실 예정이니까요.”

“네!”

아까와 달리 예비 황녀군 병사들의 목소리에 잔뜩 기합이 들어가 있다.

이윽고 훈련관 입구 쪽으로 마차 한 대가 들어섰고, 나는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괸 채 마차에서 내리는 인영 둘을 힐끔했다.

“왔어?”

“리니….”

늘 그렇듯 누구보다 빨리 나를 발견한 에녹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왜 날 보고 얼굴을 찌푸리지?’

설마 가출했다고 삐지기라도 한 걸까 싶어 그들에게 다가서려는데 에녹이 실비의 소맷부리를 붙잡고 울먹이듯 입을 열었다.

“형….”

“?”

“우리 막내가 타락했어….”

나는 내 귀에도 들려오는 에녹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남자들을 벗겨 놓고 이상한 의자에 앉아 있다고!”

“응?”

저게 무슨 소리람.

기가 막혀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내 뒤에 시립한 병사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새된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꺄아악!!!”

여덟 살 응애 눈 썩는다~!!

나는 미남대가 아니라 타잔대처럼 보이는 병사들에게서 후다닥 멀어지며 두 눈을 양 주먹으로 가렸다.

“뭐야! 너네 왜 다 속옷 차림이야?!”

“황녀 전하께서 저희에게 하사하신 옷입니다.”

“그게 무슨 옷이야! 천쪼가리지!!”

나는 울화통이 터져 미남대를 향해 딸기 주스를 집어던졌다.

* * *

배동 선발전의 유력 후보인 레오노라가 하차니아 공자들을 황성으로 불러들였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노엘, 공녀가 치사하게 자기 오빠들을 불렀대.”

혹시라도 노엘에게 유리한 정보가 있을까 황성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레이첼이 눈살을 찌푸리며 소녀에게 다가섰다.

“반칙이나 마찬가지 아니야?”

“오빠들이라면 하차니아의 공자들을 말하는 건가.”

차분하게 검을 휘두르던 노엘이 밤의 장막처럼 어두운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레이첼을 돌아본다.

“응. 실베스테르 공자나 에녹 공자나 둘 다 오러 사용자잖아? 두 사람에게 훈련을 맡길 모양이더라고.”

“뭐, 외부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된다는 말은 따로 없었으니까.”

레이첼은 시큰둥한 노엘의 반응에 오목한 이마를 찌푸리며 입을 내밀었다.

“…노엘, 황도에 올라와서 조금 이상해진 거 알아?”

레이첼이 아는 노엘은 늘 자신들을 우선시하며 돌봐 주는 큰언니였다.

‘그런데 지금은 꼭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우리 보육원이 알레테이아의 후원을 받는다는 거 잘 알고 있잖아. 우리가 임무에 실패하면 동생들이 굶게 된다고.”

의도한 건 아니지만, 마치 노엘을 협박하듯 윽박지른 레이첼은 입술을 삐죽이며 그녀의 어깨에 매달렸다.

“자꾸 공녀가 있는 A동에 다녀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노엘이 레오노라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싫었다.

‘처음에는 공작의 딸이라 경계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닌 것 같아.’

입술을 꾹 깨문 레이첼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서글픈 얼굴을 만들어 냈다.

“노엘, 나를 버릴 거야?

노엘은 보육원 동생들 중에서도 자신을 제일 아꼈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자신을 가장 아껴 줘야 했다.

“처음에는 대책을 강구하려고 살피는 줄 알았는데 병사들 훈련도 제대로 안 시키고….”

“버리다니. 그런 말 하지 마라.”

“하지만 노엘이…!”

노엘은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레이첼을 안아 들었다.

“울지 마, 레이첼.”

“흐윽! 끕!”

“뚝. 착하지.”

레이첼이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노엘은 아이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가는 실버블론드가 뒤덮은 자그마한 등이 잘게 떨리는 모습이 그녀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으니까.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은 채 섬 한가운데 버려진 노엘을 아이가 발견했던 그 순간부터, 레이첼은 그녀가 잊어버린 무언가를 상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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