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아구, 우리 아가씨~! 어쩜 오늘도 이리 어여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우신지!”
찰칵-!
“아앗, 눈부셔! 아가씨의 미모에 눈이 멀 것만 같아요~!”
찰칵, 찰칵-!
랄라가 앞이 안 보인다며 난리를 피웠지만, 내 앞에서 얼쩡거리며 마도구를 들고 설치는 룰루 때문에 눈이 부신 건 외려 나였다.
“…룰루. 그 마도구, 기자 전용 아니야?”
사진기 아티팩트는 값비싼 가격도 가격이었지만, 귀족들의 사생활 보호와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사용이 제한되어 있었다.
떨떠름한 내 물음에 룰루가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대답한다.
“네, 맞아요. 써머 소르베에게 뒷돈 주고 샀어요!”
나는 룰루의 뻔뻔함에 기가 막혀 혀를 찼다.
“걸리면 큰일나는 거 아냐?”
“아가씨가 자라는 모습을 생생하게 간직할 수만 있다면 범죄자가 되어도 좋아요.”
“한낮, 한밤, 매순간마다 어찌 이리 빨리 자라시는지.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매일 밤 눈물을 흘린답니다.”
나는 정말로 슬프다는 듯 핑- 눈물까지 맺힌 랄라의 눈가를 힐끔하며 한숨을 삼켰다.
“…됐고, 황성 연회나 빨리 가자.”
“네, 아가씨!”
오늘은 간만에 황도에 내려가는 날이었다.
‘황제가 직접 주최하는 파티라니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레고르가 새로 들인 비(妃)인 율리아를 고위귀족들에게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한 모양이었으니까.
“오늘 아주 귀엽네요, 레오노라.”
에스코트할 기사로 카렌을 선택한 나는 청량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뻗는 카렌에게 폭 안겼다.
“카렌도 엄청 멋져요.”
“내가 멋지긴요.”
“정말인데!”
나는 내 칭찬이 쑥스럽다는 듯 볼을 붉히는 카렌을 올려다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뒷목까지 오는 단정한 암갈색 머리칼과 대조되는 녹안 덕분에 청금의 기사로 불리는 카렌의 주가는 요즘 나날이 상한가를 치고 있었으니까.
‘날이 갈수록 본인 인기가 많아지는 걸 아직 모르는 모양이네.’
청량한 미소, 단정하고 깔끔한 태, 그리고 레이디를 존중할 줄 아는 기사도까지.
기사가 갖출 만한 소양이란 소양은 전부 갖춘 카렌을 자신의 기사로 삼고 싶어 하는 영애를 줄 세우면, 북부 끝인 하차니아에서 남부 끝인 아르델까지 닿는다는 낭설이 돌 정도였다.
카렌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린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허공을 보는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카렌에게서 눈을 뗄 줄 모르는 걸 보고도 내 말을 못 믿겠어요?”
“…과연 제게서 눈을 못 떼는 걸까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을 찰나, 내가 황궁에 발을 들이는 것을 확인한 호명관이 뿔고동을 불어 젖힌다.
부우우-!
팡파레 비슷한 굉음과 함께 쁘띠 플뢰르에게만 허락된 장미 꽃잎이 카펫 위에 휘날렸다.
“올해의 쁘띠 플뢰르, 레오노라 에스트렐라 드 하차니아 영애와 영애의 에스코트를 맡은 카렌 경 드십니다!”
‘…아무리 쁘띠 플뢰르로 선발되었지만 소개가 너무 요란한 거 아닌가.’
카렌을 힐끔힐끔 보던 시선들이 일제히 내게 쏠리자 민망해진 나는 괜히 뺨을 긁적이며 아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안녕하세요, 다미아 백작 부인.”
내 인사에 나를 알아본 다미아 백작 부인이 빙긋 웃으며 쥘부채를 펼친다.
“하차니아 공녀님이시군요. 반가워요.”
그녀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나는 마침 다미아 백작 부인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다른 귀부인을 향해 드레스를 잡아 쥔 채 인사했다.
“리콘 남작 부인도 계셨네요! 피니아는 잘 지내나요?”
“안부를 물어봐 줘서 고마워요. 수도에 올라온 김에 리콘가의 타운하우스를 방문해 주면 딸이 많이 기뻐할 거랍니다.”
피니아 리콘은 로렐라인의 친구로, 종종 티파티에서 어울렸던 어린 영애였다.
‘로렐라인의 안부가 궁금했던 참이니 리콘가에 방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수도 사교계에서 아는 얼굴이 꽤 늘었다는 생각에 뿌듯해진 나는 히죽 웃으며 남작 부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피니아가 보고 싶어요. 꼭 놀러 갈게요!”
“공녀는 늘 활기차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싱그럽게 하네요.”
“과찬이세요, 부인.”
리콘 남작 부인의 칭찬에 몸을 배배 꼬는 내 뒤로 음침한-남들이 들으면 신성모독이라고 하겠지만-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아, 나의 아이야.”
익숙한 어투에 흠칫 몸을 떤 나는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가슴에 손을 올린 채 뒤를 돌았다.
“교황 성하!”
간만에 연회에서 모습을 드러낸 발레리의 등장에 사람들이 홍해처럼 갈라지며 일제히 허리를 숙인다.
“자애로운 여신의 첫 번째 종을 뵙습니다.”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본체만체 슥슥 지나친 발레리는 내 앞에 당도하자마자 나를 번쩍 들어 끌어안았다.
“너무 오랜만이구나, 레오노라. 이 몸이 너를 그리워하느라 애가 닳다 못해 마음이 다 헤졌도다.”
“…그, 그래요.”
내가 발레리의 끈적끈적한 속삭임에 발버둥을 치는 것은 보지 못했는지, 리콘 남작 부인은 화들짝 놀라 쥘부채로 제 입가를 내려쳤다.
“세상에! 성하께서 하차니아의 공녀님을 아끼신다더니, 이건 단순히 아끼는 정도가 아니시잖아요?”
“다음 대 교황이 하차니아 공작가에서 나올 수도 있다는 소문이 정말이었나 보네요.”
나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애써 듣지 못한 체 발레리를 올려다봤다.
“아이야, 너는 이 몸이 보고 싶지 않았느냐?”
“큼큼. 저도 성하가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지러우니까 내려 주시겠어요?”
내 말에 발레리가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술을 깨문다.
“성하?”
그녀는 내가 팔다리를 파닥파닥 움직이고 나서야 나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이 몸은 이번 연회에서만큼은 공녀와 꼭 붙어 있고-”
“드디어 내 라이벌이 등장했군요!”
감히 교황 성하의 말을 자르며 등장한 소녀가 위풍당당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 내게 다가온다.
‘누가 네 라이벌이야?’
“트리스탄 영애.”
가까이 다가온 소녀의 새침한 얼굴을 확인한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벌렸지만, 스텔라는 내 표정을 보지 못했다는 듯 악수를 청했다.
“거리감 느껴지게 영애라고 부를 필요 없어요."
“네?”
“편하게 스텔라, 라고 불러도 좋아.”
‘갑자기 반말?’
뭐, 둘 다 어린이니까 큰 상관은 없었지만….
“레오노라는 내가 인정한 유일무이한 라이벌이니까요.”
나는 모종의 역할극에 심취한 듯한 스텔라의 표정에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의 격전을 벌였지만 끝끝내 승패를 가릴 수 없었던 멋진 사이.”
‘아니, 너 나한테 졌잖아?’
“…그래요, 스텔라.”
나는 내게 들러붙는 스텔라를 치우기 위해 휘휘 손을 내저으며 대충 대답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이런 날파리들-스텔라와 발레리-가 아니니까.’
딱히 내키지 않았던 황성 연회에 이왕 발을 들였으니, 수도 사교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명사들 중 교단에 속한 이들을 솎아 내는 게 다음 과제였다.
‘…일단 한 명은 발견했네.’
열세 명의 현자 중 한 명인 아이네스가 고고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발견한 나는 흠칫 몸을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교단에 납치됐을 때 들었던 정보로 추정하면 아이네스가 교단이 추앙하는 헬리오스였다.
비천한 별인 아스테르의 마력을 흡수해 빛을 발하는 교단의 태양.
‘그래서 늘 내 마나를 탐냈던 걸까.’
“공녀. 오랜만이야.”
나는 나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아이네스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떨려 오는 주먹을 드레스자락에 감추었다.
“제국의 작고 사랑스러운 태양,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이번 연회에서 내 배동을 선발할 생각인데, 공녀의 마음이 바뀌었다면 나는 여전히 그대를 배동으로 삼을 생각이야.”
‘여전히 내 마나를 포기하지 못했다는 거구나.’
나는 희게 빛나는 아이네스의 눈을 피하며 얌전히 손을 모았다.
“아버지가 아직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셔서요, 전하. 정말 죄송해요.”
“…그래? 어쩔 수 없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아이네스를 피해 뒤로 반보 물러나는 순간, 누군가가 내 어깨를 꾹 쥐며 아이네스 앞으로 나섰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레이디 뮤리엘입니다, 전하.”
“아, 레이디 뮤리엘! 그대의 딸이 그리 내 배동을 하고 싶어 안달을 낸다면서.”
“네, 네! 레티샤, 인사 드려라!”
뮤리엘의 말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레티샤가 주춤대며 허리를 숙인다.
“흐응. 뭐, 아무나 내 배동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고려는 해 볼게.”
‘아무나 네 먹이로 삼을 생각은 없다는 거겠지.’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뮤리엘과 아이네스를 바라보며 덜덜 떨고 있는 레티샤의 손을 붙잡았다.
“참, 황녀 전하. 소개 드리고 싶은 아이는 제 딸아이만이 아니랍니다. 이리 나오렴.”
내가 레티샤를 등 뒤로 숨기듯 붙잡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뮤리엘이 이죽이듯 입을 연다.
“제가 오래 후원해 온 보육원 출신의 아이인데, 영민하고 심성이 착해 제가 샤프롱(어린 영애의 여성 후원자)을 맡아 사교계에 데뷔시킬 생각이랍니다.”
나는 뮤리엘의 말에 직감적으로 아이네스를 향해 나아가는 소녀의 정체를 눈치챘다.
가스파르의 사생아.
정확히는, 뮤리엘이 가스파르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아이였다.
“노엘 드 샤나인입니다, 황비 전하.”
“죽은 공작 부인의 이름과 똑같네.”
아이네스의 말에 소녀가 얼굴을 드는 순간, 죽음을 집어삼킨 듯 새까만 눈이 나와 마주쳤다.